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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6화 (6/94)

<☆6>깜

도리어 놀란 건 그녀가 들어오지 않은 채 지붕에 쭈그리고 앉아서 뭔가 생각에 빠졌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방해가 될 것 같았는지 하나로 땋아서 뒤통수에 돌돌 만 상태였다. 하지만 머리 손질을 잘하지는 못하는지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많이 흘러나와 있었는데 그게 더 그녀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달빛, 그리고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 심각한 듯한 그녀의 고민하는 얼굴, 그럼에도 입가는 마치 웃는 듯이 조금 올라가 있었다. 그녀의 웃음 띤 입매는 타고난 것 같았다.

저대로 두면 영원히 들어올 것 같지 않았다. 한숨을 섞어 한 번 웃고 요정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나는 조심히 다가가 문을 열었다. 한밤중에 남의 침실에 찾아온 건 그녀인데도 나는 발소리를 낮춰서 움직였다. 그녀가 놀라길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비처럼 보였다. 놀라면 파드득,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금안이 부드럽게 달처럼 휘어졌다.

“주무시는 중이 아니셨네요.”

“…….”

“전하, 기억을 어디까지 하시고 계시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놀랐고 그게 무례하다고 느껴졌다. 내게는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이 일 하나 때문에 나는 그동안 매를 맞았고 노예처럼 굴러다녔는데 내게 침대와 식사를 하루 제공한 대가로 대답을 내놓으라고? 내 얼굴에는 분명 경계심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자 그녀가 한숨을 쉬면서 훌쩍 뛰어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창문을 닫는 사이 나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 경계심이 최고조에 이른 내가 나를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고작 뒤로 물러나는 것뿐이라는 게 조금 슬퍼졌다.

“왕세자 전하.”

그녀는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동안 계속 연기했던 천지 역할을 다시 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떻게 하는 건지 생각이 나지 않아 당혹스러웠다. 어떻게 하는 거였지. 말을 더듬고 헤헤 웃고 그럼 되는 거였던 거 같은데. 내가 눈을 깜빡이며 어떻게든 그 천치 평민 아이를 연기하려고 하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송구합니다. 모후께서는 왕세자 전하께서 변을 당하신 이듬해 큰 병을 앓으시어 돌아가셨고.”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나는 당연히 어머니께서 왕궁에 계실 거로 생각했다. 내가 거기에 돌아가기만 하면 어머니를 만나고 어머니를 끌어안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왜 나를 찾아 주지 못했느냐고 내가 어머니께 화를 내야 할 입장이고 어머니는 내게 용서받기 위해 무엇이든 하셔야 할 거라고 언제나 이를 갈아 왔었는데.

돌아가셔?

“부왕께서도 작년에 붕어하셨습니다.”

왜 아버지는 나를 찾지 않으셨는가.

나는 늘 아버지의 애정이 궁금했다. 사실은 나를 잊으신 걸까, 걱정했다. 아들인 내가 미우셨던 걸까. 못마땅하셨던 걸까. 내가 모자랐던 걸까. 그런 것들을 매 순간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거라고, 내가 고아가 되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울면 안 되는데… 그럼 모든 걸 인정하게 되는 건데, 그걸 아는데도 심장이 부서져 내리는 걸 내 작은 두 손으로는 받아 낼 수가 없었다.

나는 고아구나.

아무도 찾지 않는, 고아가 되었어.

무릎이 꺾였다.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시뻘겋게 경고음을 내지만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아. 내가 비명을 지르자 여자는 나를 재빨리 품으로 끌어안으며 입을 막았다.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울 수조차 없다. 세상은 내 울음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도 어머니의 죽음도 알지 못했는데.

많은 걸 묻고 싶었다. 아버지는 나를 걱정하시진 않으셨는지, 어머니는 나 때문에 병이 드신 거였는지, 왜 나는 이런 일을 겪어야 한 건지,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건지. 그런데 사실은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기도 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졌다. 그냥 계속 울고 싶었다. 숨이 막혔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죽고 싶었다.

견디다 보면 모든 게 다 제대로 돌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따위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다면 처음에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걸. 처음에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여자는 나와 같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나를 끌어안고 있어 주었다. 내가 소리를 죽여 울자 그녀는 내 입가에서 손을 떼어 등 위에 올렸다. 도닥거리는 손바닥이 등에서 느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숨을 헐떡이다 심장이 지끈거릴 때까지 울었다. 코가 막혔고 얼굴이 아팠다. 여자의 옷은 값비싼 하라란이었는데 물에 젖으면 망가지는 하라란은 내 눈물로 완전히 못 쓰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를 도닥거리기만 했다. 내가 왕세자라 이렇게 잘해 주는 걸까? 하지만 내가 지금도 왕세자일까?

“지금, 누가 즉위….”

코맹맹이 소리로 물어보자 여자는 나를 가만히 도닥거리기만 했다. 그녀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조금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해 주었다.

“이제는 로프넬 대공께서 즉위하셨습니다.”

그 순간 나는 어릴 때 나를 맡아 주었던 나의 삼촌이 떠올랐다.

그는 키가 크고 아주 잘생긴 사람이었고 내게 친절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건 다 시켜 주었다. 왕궁에 가면 힘든 것들을 많이 해야 했는데 그의 영지에 있으면 나는 자유였다. 공부도 필요 없었고 먹고 싶은 것도 내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다. 늦잠도 자유였고 시종들에게 어떻게 대하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가 밤에 놀러 다녀서 시종들이 그에게 고해도 윗사람의 일을 고자질한다고 시종들만 혼났다. 나는 그가 나를 정말 아끼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 밤. 내가 한밤중에 수영을 하러 갔던 밤.

모든 악몽이 시작되었던 그 밤.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그 밤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대공은 나를….”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여자는 다시 내 입을 막으려는 제스처를 취하며 경고하듯 나를 불렀다.

“전하.”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여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 입을 막았다. 그러자 문득 깨달아 버렸다.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한다. 나의 고통을, 나의 불행을. 누군가가 수영하던 나를 잡아채서 마차에 태웠어. 내가 비명을 지르는데 아무도 듣지 못했어. 그 이후에 만난 사람들은 내가 나라는 걸 밝힐 때마다 때렸어. 채찍으로! 인두로 지지기도 했어! 그런데 당신은 지금 나에게 조용히 하라고! 지금 나에게! 부모님을 잃고, 그 사실을 이제야 안 나에게!

내가 고함을 지르려고 한 순간 여자가 속삭였다.

“아까 전하께옵서는 저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계셨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건 살아남기 위함이셨겠지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전하께서 살아남으실 이유가 없어지신 건 아닙니다. 더 모질게 살아남으셔야지요. 지금 죽으면.”

지금 죽으면?

내가 눈으로 묻자 여자는 가혹한 말을 결국 꺼냈다. 미안한 눈을 하고서.

“개죽음이 됩니다.”

아버지, 저는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인간답게, 왕세자로, 살고 싶었어요. 오로지 그것 하나를 위해 달려왔는데 이제 저는 더 이상 왕세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아버지 그래도 이 여자는 저보고 살라고….

여기서 죽으면 개 같은 목숨이 되어 버린다고.

“무엄하다….”

오랜만에 꺼내 본 말이었다. 그동안 이런 비슷한 말만 꺼내도 미친 사람 취급받으며 매질을 당해 왔다. 여자가 나를 안았던 팔을 풀었고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그녀가 나를 때리기 위해 팔을 푼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주저앉은 내 앞에 기사의 예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스트레드의 사리안이 인사 올립니다. 부디 강녕하십시오.”

나의 첫 번째 기사는 아름답고 다정하고.

“당신은 내 편이야?”

“예, 전하.”

거짓말쟁이였다.

나는 첫 기사의 거짓말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기사가 아니다. 그녀는 내 삼촌의 기사일 것이다. 이 모든 세상이 내 삼촌에게로 넘어갔다. 어리고 멍청한 내가 삼촌이 준 자유라는 것에 개처럼 헐떡이는 동안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아버지는 나 같은 걸 낳으셔서는 안 되셨는데. 나보다는 더 현명하고 재주 있는 그런 아이를 낳으셨어야 했는데. 그런 아이를 보실 자격이 있는 분이셨는데.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았다.

내가 잘했더라면 빌미를 주지 않았을 텐데. 내가 강했더라면, 내가 그 밤에 수영을 하러 나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분명 내 삼촌이 무엇을 하고 싶든 간에 방법이 없었을 텐데. 그런데 내가 원인을 제공해서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그러니까 울지 않아야 했다.

울 자격도 없으니까.

“그럼 당신은 나의 기사네.”

“예.”

“나를 위해 움직이고.”

“예.”

“그럼 나의 복권을 도와줘.”

그녀의 금안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복권? 그녀는 그 복권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걸 겨우 참고 나는 마른침을 삼켜 가며 입을 열었다.

“나도 알아, 내가 왕세자가 될 수 없고 왕위에서 멀어졌다는 건. 그래, 그건 어쩔 수 없지. 삼촌이 이미 즉위해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왕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자야. 최소한 대공은 되어야 되잖아.”

“합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 대가로.”

이 여자는 나를 믿지 않는다. 나 또한 그렇다. 그녀는 내 삼촌의 기사이며 내 삼촌을 위해서 움직일 것이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하스트레드의 영주이며 하스트레드의 이권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녀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셈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가진 유일한 패를 내밀면 된다. 내가 아직도 가지고 있는 패가 있기는 하다는 게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삼촌, 날 죽였어야 해.

그게 아니면 이 패는 절대로 빼앗을 수 없거든.

“당신의 상속권을 내가 지지할게. 나의 정통성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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