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깜
분명 내가 누군지 아는 것 같았는데.
여기가 어디예요, 당신은 누구예요, 왜 나는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 거죠, 내가 누군지 알아요, 나를 돌려보내 줄 수 있나요, 나는 왕세자예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는데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오르려 했다. 나는 울음을 참아 냈다. 그것이 유일한 내 자존심이었다.
나는 이든, 이든 그로스랜.
그로스랜 왕국의 후계자. 왕국의 주인이 될 자. 그러니까 살아남아야 한다. 결코 긍지를 잃어서는 안 된다. 매일 매 순간 토할 만큼 되새겼던 말들을 다시 되뇌이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세실리아 지 사리안입니다.”
그녀는 마치 내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을 소개했다. 이런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스스로가 누군지 소개해 주는 사람. 욕도 매질도 없이 그저 담담히 웃으면서 자신을 고하는 사람이 반가운 한편 두려움도 치밀었다. 이 사람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여기는 하스트레드 성입니다.”
그게 어디인지, 이 사람이 누구인지 부끄럽게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배웠던 것들은 이미 다 잊어버렸던 때였다. 그저 나는 내가 누군지 잊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이든 그로스랜이고 왕세자이고 결코 이런 일을 당할 신분이 아니라고, 그걸 잊지 않고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씻으시고 식사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벌써 점심때가 다가왔군요.”
그녀는 마치 내가 늦잠을 자기라도 한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냄새나고 더러우며 초라하기 짝이 없는 데다 배도 계속 곯았던 나의 모든 걸 덮어 버리며 그녀는 나에게 따뜻한 목욕물, 아주 괜찮은 손님방, 그리고 한 번이라도 더 먹어 보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던 음식들을 제공했다. 그녀는 나를 손님방에 내려놓고 사라졌지만 나를 때리고 멸시하던 시종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물론 나를 노예 취급하며 채찍질을 일삼았던 그들이 갑자기 나를 존중하게 된 건 아니었다. 그녀가 나를 손님으로 대하라 이르니 그러긴 해야겠는데 이제껏 아무렇게나 대했던 나를 손님으로 대하긴 싫으니 물건 취급을 하겠다는 태도였다. 일거리처럼 나를 취급하며 그들은 마음껏 떠들어 댔다.
“아가씨가 진짜 돌아오셨네.”
“여전히 아름다우시네. 저런 얼굴로 기사라니, 얼굴이 아까워.”
“정말 아가씨께서 작위를 받게 되실라나?”
“그럼 우리나라에 최초로 여자인 공작이 생기는 거야?”
그들의 손에 내 몸을 맡긴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공작. 내가 왕세자로 있던 시절 공작 가문은 네 개밖에 되지 않았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사리안이라는 가문은 너무 생소한데.
하스트레드 성…. 하스트레드라는 이름은 어딘가에서 들어 본 것 같았지만 너무 오래전 이야기였다. 그래도 나는 필사적으로 정보를 끌어모아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세실리아 지 사리안. 사리안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 올해 스물여섯 살이며 기사이다. 나이를 알고 조금 놀랐다. 나와 일곱 살이나 여덟 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열다섯 살이나 차이가 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그런데 나이를 알고 나니 차라리 그보다 더 많은 게 잘 어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외모는 소녀 같은데 웃음은 은둔한 현자의 것 같은 여자.
나를 안아 올렸어.
내가 더러운데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어. 공작이 될 여자인데.
[ “벌써 점심때가 다가왔군요.” ]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았었다. 그녀는 어떻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나는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을 아주 뚫어지게 바라보았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아주 조그마한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발견했더라면 나는… 실망, 아니, 안심했을 것이다. 다 똑같은 것들이고 분명 또 나를 어딘가에 이용해 먹으려는 수작이겠지. 아무리 맞아도, 맞아 죽더라도, 나는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천치인 것처럼 굴었을 텐데.
그녀는 내가 누군지 말하지 않았지만 나를 왕세자로 대했다. 아니, 왕세자로 대한 것치고는 좀 무엄했다. 그래도 여느 귀족가의 아이처럼 대해 주기는 했다.
그래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가 무언가를 바꿔 줄 것만 같아서.
“아가씨가 부르신다.”
시종의 말에 나는 먹다 말고 끌려 나와야 했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그녀가 부른다는 말에 어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식사 따위 상관없었다. 내 운명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녀가 그렇게 만들어 줄지도 모르니까. 하루라도 다시 왕세자로 살 수만 있다면 나는 굶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부왕, 모후.
다들 잘 계신지, 나를 왜 찾지 않으시는 건지. 두려운 마음들이 왈칵 치밀어 오르는 가운데 시종의 손에 이끌려 반쯤 허공에 뜬 채로 그녀에게 끌려갔더니 그녀의 부하로 보이는 남녀가 서 있었다. 곧 그들도 내 정체를 알고 괴로워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피는 것 같기도 했고 나를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을 때 나는 진심으로 수치스러워졌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다정하게도 나를 안으며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같이 식사를 했다. 나뿐만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부하들에게도 같이 식사를 권했다. 공작이 될 사람이, 아무리 기사라지만 자신의 부하들과 동석하여 식사한다니. 전쟁 중도 아닌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느릿하게 식사했다.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의 부하 중 남자 또한 식사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여자는 아주 좋아했다.
“역시 하스트레드 성의 식사는 맛있네요.”
그녀는 감탄했다. 그리고 부러운 듯 덧붙였다.
“우리 성의 식사도 맛있으면 좋을 텐데요.”
“좋은 요리사는 돈이 들지.”
“그러게 말이에요.”
내 옆에 앉은 여자는 자신의 여자 부하와 스스럼없이 요리사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여자 부하가 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영주라고? 여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남자 부하는 여자 부하보다 우아하게 식사했다. 식사 예절을 배운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식사 예절을 배운 티를 내지 않고 적당히 먹으려고 노력했다. 왕세자인 지난날을 기억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처음 내가 이런 일을 겪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나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구타와 고문뿐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척을 하자 그제야 모든 것이 멈췄다. 오래전 일이지만 결코 잊을 수 없다.
어느새 내 접시에는 새로운 음식이 올라와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게걸스럽게 접시를 비울 때마다 공작이 될 여자가 눈짓으로 시종을 불러 내 접시에 새로운 음식을 채워 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문득 부끄러웠다. 빠르고 무례하게 먹은 건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 배가 고팠다. 그리고 사실 나는 내가 배웠던 예절들을 거의 다 잊은 상태였다.
“웰스 부인은 하스트레드의 자랑이죠.”
이 여자는 이상하다. 마치 내 기분을 꿰뚫어 본 것처럼 다정하게 위로한다. 내가 와구와구 먹은 게 내가 초라한 무지렁이가 되어서가 아니라 그저 웰스 부인이라는 요리사가 훌륭하기 때문이라고 나를 도닥거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는데 남자 부하가 말했다.
“웰스 부인의 급료가 남자 요리사들 이상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남자 요리사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세상 그 어떤 요리사보다 급료가 세지. 하지만 웰스 부인이 우리 성에 온 건 사실 요리사 급료 때문에 온 건 아니야.”
“그럼요?”
“아버지께서 톰 웰스의 교육을 직접 맡아 주시겠다고 했거든.”
“톰 웰스면, 설마 웰스 부인의 장남이요?”
보다 높은 가문의 인물에게 자식의 교육을 맡기는 것은 모든 부모의 공통된 열망이다. 그런데 공작이 평민 아이의 교육을 맡아 주겠다고 했다고? 여기는 왜 이렇게 불가능한 일들만 일어나지? 내가 고개를 들고 의아하게 공작을 바라보는데 여자 부하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미식가시라니까요.”
“인생을 즐기시는 분이지. 미식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음미하셨잖아.”
“술, 음식, 여자, 전쟁, 권력, 지식, 도박, 정치…. 정말 세기의 풍운아셨지.”
남자 부하가 어딘가 아련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공작의 아버지가 부러운 것 같았다.
공작의 아버지면 이 성의 성주이자 죽은 남자이며 나를 여기 가둬 둔 장본인이다. 그는 왜 나를 가둬 둔 걸까. 작년에 여기에 온 뒤 그는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나에게 자신을 소개하지도 않았고 무슨 꿍꿍이인지도 드러내지 않았다. 나를 회유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나를 염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나를 버려진 마구간에 처박아 가두고 죽지 않을 정도의 음식과 환경만 제공했다.
왜 그랬을까?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면 애초에 나를 왜 데려왔을까? 그동안 나는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내 의지로 간 곳은 한 곳도 없었다. 모두 나를 물건처럼 사고팔아 나를 옮겼다. 그들은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어 나를 움직인 것이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왜 아무도 왕세자인 나를 부왕께 데려다주지 않는 걸까. 그게 가장 큰 공이고 상이지 않을까? 나는 그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식사 시간 내내 몇 년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의문.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걸까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답은 알 수 없었다.
공작이 될 여자가 나를 찾아온 것은 한밤중이었다.
매질을 당하고 분풀이용으로 쓰이다 보니 잠귀가 밝아졌다. 조금만 바스락거려도 깨기 때문에 창밖의 기척이 이상한 것에 잠이 깬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이 깨끗한 침대, 맛있는 식사, 다정한 태도. 그런 모든 것들이 무언가를 대가로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찾아온 걸 보고 놀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