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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4화 (4/94)

<☆4>깜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이든이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식사를 못 하셨나요?”

이든을 안아 올려서 시선을 억지로 맞추며 묻자 그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머, 먹다가 와서요.”

내가 부르니까 식사를 하던 중이든 말든 그냥 끌고 와 버렸구나.

이든은 내게 존대를 한다. 그는 아마 자신이 왕세자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긴, 그가 죽었다고 알려진 게 5년 전. 지금의 그가 열한 살이라면 그때 그는 고작 여섯 살. 잊고도 남을 만한 나이다.

열한 살?

나는 새삼 내가 안고 있는 남자아이를 훑어보았다. 이든은 내 시선을 느끼자 불편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섬세한 속눈썹이 길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눈을 내리깐 모습이 정말 돌아가신 앤 왕비의 초상화와 판박이였다. 그만큼 아름답고 또 그만큼 여려 보였다. 열한 살이라기보다는 아홉 살이나 여덟 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주군?”

폭탄 같은 존재가 된 왕세자를 안아 올린 채 말없이 보고만 있는 내가 불안했는지 소피아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어.” 소피아에게 무의미한 대답을 해 주면서 다시 한번 이든을 훑어보았다. 불안한 눈동자, 가혹한 시간들을 알 수 있는 작은 몸.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팔의 오래된 상흔들이었다. 아마 채찍으로 맞은 상처로 추측되는 상흔들. 물론 우리 모두는 채찍으로 교육받는다. 나 또한 어릴 때 아버지께, 스승께, 채찍으로 매를 맞았다. 그러나 내 몸에 상처가 남을 정도로 가혹하게 맞는 일은 거의 없었고 드물게 상처가 생기더라도 바로 치료를 받았다. 멍이 들거나 하는 정도였지 피부가 찢어지는 손상을 입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이 아이는 드러난 팔조차 상흔투성이이니 아마 온몸이 그러할 것이다. 등 같은 데는 더 심하겠지. 이 정도 수준으로 채찍으로 맞고 치료도 받지 못했다는 건…. 아마, 노예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누구에게서? 내 아버지께서 이런 일을 하신 걸까? 왜?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꼬르륵, 다시 이든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이든의 새빨개진 얼굴이 이제 새파랗게 질렸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는 내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에게 누군가가 화를 낸다는 건 그가 죽도록 매질당한다는 것과 동의어일 것이다.

내게는 하늘의 재앙 같은 존재지만 이 어린 왕세자는 사실 죄가 없다. 화를 낸다면 내가 아니라 그가 내야 마땅하다. 그는 자신이 누군지 알면서도 자신을 가둬 두었을 뿐만 아니라 가축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한 내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그 자식인 나에게 화풀이를 해도 부족할 판이다.

“저도 배가 고프네요. 같이 먹을까요?”

다정하게 말을 걸자 이든의 눈이 커졌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한 게 무척 의외인 것 같은 얼굴은 곧 환해졌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같이 식사하겠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그저 기쁜 모양이었다.

외로웠구나.

괜히 이든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 왕세자의 기구한 삶이 안타까웠다. 그건 내 몫의 감정이 아닌데도.

***

아버지의 장례식은 장엄하게 진행되었다.

“일리드 지 사리안 14세, 책이 주는 진리를 가장 많이 깨우쳤던 자이고 악마도 능히 교화할 수 있을 만한 문장력을 지닌 철학자였으며 누구보다 강하고 정의로운 기사였던 그가 오늘 영면에 드니 창조신께서는 부디 달빛을 가르시어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추종자를 맞아 주시길 간청하나이다.”

신관의 말에 나를 비롯해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간청합니다. 창조주시어, 달빛을 여시어 고인을 맞으소서.”라고 읊었다.

다행히 오늘 날이 좋았다. 마침 보름이라 달이 손끝에 잡힐 것처럼 환하고 커다랬다. 아버지께서 가는 길, 달이 축복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해가 잠든 곳에 잘 도착하실 수 있으실 거 같았다.

아버지의 시신을 태운 배가 밤바다 수평선 너머의 달을 향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지. 얼굴도 보지 못하겠지. 이제는 다시는 아버지의 얼굴도 목소리도 느낄 수 없다. 실리, 라고 부르시던 그 모습.

다시는 눈으로 볼 수 없고 그저 머릿속으로만 더듬을 뿐이다. 초상화는 몇 개 남아 있지만 그 안의 아버지는 내가 아는 아버지와는 사뭇 다르고 결국 내 안의 아버지는 바래지겠지.

눈물이 떨어질 거 같아서 눈을 감았다.

여자는 약하군. 그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되는 때였다. 나는 강해야 했다. 강할 수 없다면 강해 보이기라도 해야 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하스트레드 성처럼 견고하기 짝이 없어서 아무도 내게서 공작 작위도 하스트레드 기사단도 가져가지 못할 것이라고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고아가 된 밤.

달은 따뜻하게 밝았고 밤은 냉혹하게 검었다. 내 마음은 어느 쪽에도 머물지 못한다.

“주군.”

하스트레드 기사단의 부단장인 리온이 다가왔다. 그는 조금 전에 성에 당도해 아슬아슬하게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나보다 늦게 도착한 것은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 달려온 나와는 달리 기사단을 전부 챙겨서 와야 했기 때문이다.

“사생아가 나타났다면서요.”

그의 속삭임에 문득 생각해 봤다. 이든이 내 남동생이었다면 어땠을까.

“그게 차라리 나았을지도.”

그러면 이야기가 짜증 나긴 해도 간단했을 텐데 이제 문제는 너무나 복잡해졌다. 사라졌던 왕세자와 이미 즉위한 그의 삼촌인 왕, 불붙을 정통성 문제, 그리고 왕세자는 왜 사라졌으며 누가 그를 곤경에 빠뜨렸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들,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는 왜 왕세자를 마구간에 가둬 두었었는가.

그걸 알려면 우선은 지안튼부터 족쳐 봐야겠지.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니지만 마음이 여리기 때문에 그는 결국 말문을 열게 될 것이다

지안튼을 추궁하기 전 이든이 정확히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지, 상황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한밤중, 나는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와 시종들 몰래 이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와 이든이 하는 이야기를 시종들은 어떻게 해서든 들었을 것이고 그 이야기는 지안튼에게 옮겨졌을 것이다. 지안튼은 시종들을 수족처럼 다루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나는 시종들이 알지 못하는 범위 에서 이든에게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었다.

이든이 내게 솔직한 이야기를 하게 하려면 무엇을 내놓아야 할까.

열한 살, 나는 그때 어떤 아이였지?

이든의 방으로 향하면서 생각해 봤다. 발코니로 나가 지붕을 타면서 하는 생각치고는 꽤 감성적인 생각이었지만 문제는 나의 열한 살이 이든을 설득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열한 살의 나는 검을 휘두르느라 식사도 잊곤 하는, 검에 미친 여자아이였다. 오죽했으면 아버지는 내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어다 식당에 앉혀 놓고 밧줄로 나를 묶어 두신 적도 있었다. 식사를 다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검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으셔서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했을 정도로 완전히 검에 미쳐 있었다.

여섯 살에 모든 걸 잃고 노예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은 왕세자와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지금 열한 살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나와 이든은 접점이 없을 것이다. 나는 여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아버지의 유일한 자식으로서 상속자의 위치가 흔들려 본 적도 없었고, 우리 아버지는 내가 익사했는데 시신이 안 나오면 호수 물을 전부 들어내서라도 시신을 확인해 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왜 선왕은 그리하지 않았을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자 왕세자인 이든이 미심쩍게 죽었다. 시신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는 왜 동생의 말만 믿고 ‘죽었다’고 인정했을까. 그만큼 신뢰했기 때문에?

[  “실리, 넌 정치에 대해 좀 알아야 돼.”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하는데요.”

“퍽이나.”  ]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뵈었던 건 2년 전. 그때 아버지는 내게 정치에 대해 배워야 한다고 조언하셨다. 내가 알 만큼 안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 표정이 생각난다. 코웃음을 치시는 그 표정은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다는 얼굴이셨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께서 내가 정치에 발을 담그는 걸 조금 주저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말 정치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다면 아버지께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게 정치 감각을 익히게 만드셨을 분이셨으니까.

이든의 창문 앞에서 나는 주저하고 있었다. 창문을 여는 건 간단한 일이나 그다음엔? 저 가엾은 왕세자에게 뭐라고 말하며 그의 모든 걸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해야 좋을까? 애초에 내가 그럴 주제는 되나? 그를 가둬 둔 건 우리 아버지였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저 왕세자에게 정당한 권리를 약속할 수도 없다. 그의 삼촌은 이미 즉위해 버렸으니까. 도와주겠다는 말도 가당찮다. 왕이 그를 죽이라고 한다면 나는 왕의 편에 서야 한다.

해 줄 수 있는 약속이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담보로 이야기해 달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끼익,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창이 열리고 있었다.

♡  첫 번째 뒷장. 상속녀  ♡

나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집사장, 지안튼을 향해 “넌 이제 진짜 큰일 났다.”라고 중얼거린 그녀가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빛을 등 뒤에 두고 다가오는 그녀의 머리색은 불타는 빨강. 햇빛을 녹여 빚은 듯한 금색 눈동자. 키는 크지 않았지만 아주 날씬했고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내가 그녀에게 넋을 빼앗긴 사이 그녀는 나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식사는 했습니까.”

어투는 딱딱한데 표정은 부드러웠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환한 얼굴로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내 위치를 잃어버린 뒤 사람들은 나를 역병에 걸린 것처럼 취급했다.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들은 나를 죽이거나 이용하고 싶어서 안달인 한편 내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모욕하고 벌주고 상처 입히고 싶어서 혈안이 된 거 같았다. 그 세월은 너무나, 마치 영원처럼 길었다. 인생의 반을 그렇게 살아온 내게 더러운 나를 선뜻 들어 올려 기분 좋게 웃어 주는 사람의 존재는 기적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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