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깜
내 이름 세실리아는 할머니의 이름을 땄다. 정작 아버지께서는 나를 실리라고 부르셨고 대부분의 사람이 내 이름을 실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어쨌거나 내 이름은 할머니의 이름을 딴 세실리아.
아버지의 이름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땄다.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도 이름이 같았다. 일리드. 그 이름은 사리안 가문에서 내려오는 후계자의 이름이며 하스트레드 기사단 단주의 명칭 같은 거였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을 세실리아로 지으셨을 때는 아직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라 아마 내 뒤에 남동생이 태어날 거라 생각하시고 내 이름을 세실리아로 지으신 거 같지만, 내가 후계자가 될 줄 알았더라면 일리드라고 지으셨을 것이다.
그 이후에 저 이든이라는 아이가 태어났고 후계자로 삼으실 요량이셨다면 이름을 일리드라고 지으셨을 텐데 왜 이든일까? 우리 가문에는 딱히 이든이라는 이름을 가진 주요 인물이 없는데.
이든이라는 이름이 그런데 귀에 익기는 익었다. 이든, 이든. 그 이름은 여기저기에서 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인상 깊은 ‘이든’을 꼽으라면 아마도….
“으, 으응.”
말을 더듬으며 짚더미 뒤에서 나타난 아이는 무척 초라하고 더러웠으나 아름다웠다. 정말 아름다운 미소년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 창백한 피부에 마름모꼴의 긴 눈매와 눈가의 점. 어린아이치고 키는 크지만 팔다리는 죽은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었다.
“제, 제가 식사를 안 준 게 아니라 주인님, 아니 각하께서 저에게 명령하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저렇게 마른 건 제 탓이 아닙니다, 아가씨.”
지안튼이 내 심기가 안 좋다고 생각했는지 눈치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다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이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더러운데도 금발은 레몬을 녹여 놓은 것처럼, 입술은 체리로 물들인 것처럼, 피부는 우유에 담근 것처럼 아주 달콤하게 생긴 미소년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얼굴을 안다.
“지안튼.”
“예, 예, 아가씨.”
“넌 이제 진짜 큰일 났다.”
맙소사, 아버지의 사생아가 아니었구나.
저 얼굴에 이름은 이든이라고? 어느 이든인지 잘 알겠다.
아버지, 도대체 무슨 생각이셨어요? 나는 다시 아버지의 시신을 감싼 아마포를 찢고 이번에는 아버지의 양어깨를 붙잡아 흔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야 했다. 진짜 큰일 났네.
스물여섯, 나름대로 조용하게 살아온 내 인생에 거대한 운석이 낙하했다.
“남자아이라니, 상속권을 위협받게 되신 거예요?”
소피아가 어떻게 알았는지 내 방으로 달려와 귓속말로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나를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잠시 침묵했다. 나와 같이 온 소피아가 알 정도면 이 성의 시종 중 상당수가 저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오늘 분위기가 그토록 안 좋았구나. 나는 시종들을 내보내고 소피아, 그리고 그녀와 함께 온 크라이스만 남겼다. 창문 앞에 서서 창밖을 보니 하늘에는 이미 별이 떠 있었다. 곧 자정이 될 것이다. 아버지를 보내 드리는 마음이 이토록 복잡할 줄이야.
“내 상속권은 여전해.”
내 귀로 들어도 내 목소리가 무거웠다. 나는 웃으려 노력하며 농담조로 덧붙였다.
“신성불가침까지는 아니어도 적당히 방어할 수 있는 수준이야.”
소피아는 웃지 않았다. 크라이스는 한술 더 떠 웃음이 나오느냐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크라이스가 단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불의의 사고라는 건 언제나 있는 거니까요, 주군.”
크라이스의 손가락 끝이 그의 단검을 어루만졌다. 한쪽 입술 끝만 올린 그의 입술 안에서 슬쩍 드러난 이가 잔인해 보였다. 하아. 나는 한숨을 쉬며 이 순진무구한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애가 셋이나 있는 소피아는 그래도 애를 죽이는 건 좀, 하는 얼굴이었고 크라이스는 내가 그에게서 시선을 잠깐이라도 돌리면 암묵적 허락으로 간주하고 뛰쳐나갈 판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문밖에 시립해 있는 시종에게 “이든을 데려와.”라고 명령한 뒤 다시 문을 닫았다.
“이든?”
백작 가문의 차남으로 상속권이 없어 일찌감치 기사 작위를 받고 기사단에 들어온 크라이스는 상류 사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든이라는 이름을 듣고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든이라는 이름은 가문에 없지 않으세요?’ 하고 묻는 듯한 그 얼굴에 나는 그저 쓴웃음만 지어보였다.
“이든이 왜?”
평민에서 간신히 남작이 된 소피아는 이든이라는 이름이 뭐가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크라이스에게 뭐가 문제냐고 물었다. 크라이스가 귀족 가문의 이름 짓는 방식에 대해 한참 떠들어대자 소피아가 얼굴을 구겼다.
“그럼 나는 우리 첫째 애 이름을 소피아라고 지어야 한단 말이야?”
“네 경우는 당연히 아버지 이름이지.”
“남편 이름이 아니고?”
“남작 각하. 각하께서 남작이시니 각하의 가문을 따라야지요.”
크라이스가 과장된 몸짓으로 절을 해 보이며 소피아를 바보 취급하자 소피아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죽고 싶구나?”
“네가 아무리 마검사여도 검사로서의 기량은 내가 한 수 위라는 걸 아셔야지.”
크라이스가 소피아와 자신을 번갈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가위표를 그렸다. 한마디로 자신과 소피아는 상대가 되지 않으며 자신이 한 수 위라는 뜻이었다. 소피아가 하, 하고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위라고? 덤벼, 오늘이야말로 그 착각을 부숴 주지.”
“화끈하게 성벽에서 할까? 아예 한쪽을 떨어뜨리는 걸로 하자, 어때?”
크라이스가 위험한 농담을 해 대자 소피아가 비죽 웃으며 맞받아칠 참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그사이 씻고 식사도 마친 것으로 보이는 이든이 조심조심 들어오고 있었다. 이든은 내가 무서운지 쭈뼛거렸다. 그에게 딱히 무섭게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무섭게 행동했던 지안튼이 내게 공손한 것을 보고 더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은 듯했다.
“문 닫아.”
내 지시에 이든을 집어넣고 안쪽 분위기를 살피려던 시종이 서둘러 문을 닫았다. 성의 문들은 하나같이 두꺼워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다. 특히 내 방문은 아주 두꺼운 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어릴 때 나의 안전을 위해 내 방의 벽과 문을 아주 튼튼하게 만드셨다. 납치를 대비한 여러 장치 중 하나였다.
그게 오늘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든이야.”
내 말에 크라이스가 눈을 느릿하게 껌뻑거렸다. 소피아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아이의 등장에 넋을 놓은 듯했지만 크라이스는 다른 의미로 혼이 빠진 것 같았다. 그는 두꺼비처럼 눈을 끔뻑거리며 이든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고 머리카락 색을 보고 눈동자를 확인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든… 이라고요?”
이름을 확인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이라고 해 주세요. 그 얼굴에 쓰여 있는 간절한 바람은 나의 소망이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이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부터 이 이든의 존재까지 모두 다.
“아버지가 작년에, 데려왔대. 그리고 아주 더러운 마구간에 가둬 놓으셨던 거 같아.”
“…가둬, 요?”
“나도 무슨 상황인지 몰라. 성의 시종들은 너희처럼 아버지 아들인 줄 알았던 거 같고. 하지만 얼굴 보고 이름 딱 들으면 누구 아들인지 바로 알 수 있지.”
“그냥 판에 박았네요, 아주.”
크라이스가 “신이시여, 절 지금 당장 좀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중얼거렸다. 상황이 심각한 걸 눈치챈 소피아가 크라이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꾹 찔렀다.
“누구 아들인데?”
“가장 유명한 ‘이든’의 아들.”
그렇게 대답한 크라이스가 ‘아아아아.’ 하고 신음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가장 유명한?”
소피아가 가장 유명한 이든이 누구지, 하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홱 이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피아는 그 이든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이든의 초상화는 종종 봤기 때문에 소피아도 곧 눈치챈 듯 경악해서는 손으로 입을 막아 비명을 삼켰다. 아, 무슨 심정인지 너무 잘 알지. 내가 한숨을 쉬었을 때 소피아가 내게 달려와 귓속말로 물었다.
“와, 왕세자 전하입니까?”
대답을 꼭 해야 할까.
나는 이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아름다운 외모는 신이 내린 미모라고 평해졌던 전 왕비의 외모 그대로이고, 이든이라는 이름은 왕의 이름이다. 우리 집안의 이름이 일리드이듯 왕의 이름은 이든이었다. 선왕까지는 그러했었다.
현재 왕은 선왕의 아들이 아니라 그의 동생이다. 그렇기에 그의 이름은 이든이 아니다.
“하, 하지만 죽었잖아요?”
“나도 조금 전까지 그런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럼 이게 어떻게, 되는?”
소피아가 덜덜 떨며 물었다.
왕은 작년에 즉위했다.
그가 즉위하기 10년 전 아직 대공이던 시절, 왕은 동생이자 대공인 그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교육을 맡겼다. 불안한 부분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그러나 왕은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왕세자의 교육을 다른 귀족과 왕족들이 그러듯이 남에게 맡길 필요가 있었다. 대공은 왕세자의 교육을 맡을 수 있는 인물 중 가장 높은 작위와 명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대공령으로 간 왕세자 ‘이든’에게 몇 년간은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왕세자는 사교 시즌이 되면 대공 부처와 함께 수도 옌선으로 돌아왔다. 영특하고 아름다워 보는 이마다 탄성을 터뜨리게 한다던 그 왕세자에게 문제가 생긴 건 5년 전. 왕세자가 밤에 몰래 호수로 나가 수영을 하다 익사한 것이다.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왕세자가 타고 나간 배와 그 배 안에 있는 왕세자의 팔찌가 발견되었다. 왕은 비통해했고 왕비는 까무러쳤다. 왕비는 그 일로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다음 해에 폐렴으로 죽었다. 그것이 4년 전.
작년에 선왕이 돌아가시고, 대공이었던 왕은 즉위하였지만 정통성 문제 그리고 미심쩍게 죽은 왕세자 건은 현재까지도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정작 작년에 왕세자를 발견했으면서도 우리 성의 마구간에 가둬 두었다니.
작년이면 아직 선왕께서 살아 계실 때인데 왜 왕궁에 돌려보내지 않았을까. 이건 역모죄를 뒤집어써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