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깜
아버지 돈과 명예, 작위를 바라지 않았던 것은 왜였을까. 어쩌면 나는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그런 걸 바라지 말자고 한 수 접어 둔 것은 아니었을까. 스물두 살부터 스물여섯 살인 지금까지 나는 내내 생각해 왔다. 나는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내키지 않았었는데 그건 내게 욕구가 적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은근하게 여자인 내가 아버지의 정당한 계승자가 되지는 못할 거라고 압박해 왔기 때문이었을까.
[ “네가 내 자식이어서 한 번도 부끄럽거나 아쉽지 않았다. 실리, 내가 죽으면 반드시 모조리 가져가도록 해. 나는 그 들쥐 같은 놈들에게 물려주려고 공작이 된 게 아니야. 알겠니?” ]
아버지께서는 나를 붙잡고 단호한 어조로 당부하셨다. 아버지의 유지가 그러한 이상 나는 상속권 문제에서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다. 모조리 가져라.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니까.
“아가씨.”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아버지의 서재 문 앞에 지안튼이 서 있었다. 아버지는 나라에서 이름 높은 수집가셨다. 값비싼 책들을 무척 많이 가지고 계셔서 사람들은 아버지께서 책에 대한 욕심을 버리셨더라면 왕보다 더 많은 재산을 일구었을 거라고 말하고는 했다. 그만큼 아버지의 서재는 아주 크고 훌륭한 보고였다. 아주 신뢰받는 시종들이 아니면 발끝도 못 들이는 이곳에 내가 홀로 서 있는 게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내가 책을 빼돌리기라도 해서 다음 주인에게 책임을 추궁받으면 어쩌나 하는 얼굴에 한숨이 나왔다.
“지안튼.”
“아가씨, 드릴 말씀이….”
그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걸 끊었다.
“지안튼. 다음 공작은 나야.”
“예?”
“나라고. 상속녀는 나고, 공작 작위도 내 거고, 기사단도 내 거고, 이 성의 주인도 나야. 당연히 이 서재도 내 것이고, 여기 있는 책들도 다 내 소유야.”
“그….”
“겁나는 건 알겠는데 그만 좀 해. 슬슬 짜증 나려고 하니까.”
내 말에 지안튼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본래는 늘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사람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속권 문제가 발발할 것 같자 많이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하긴 이전부터 지안튼은 일은 잘해도 마음은 좀 여린 사람이었다. 성의 집사장은 여러 사람이 제 사정을 읍소하기 딱 좋은 자리였고 지안튼은 종종 냉정하게 사람의 사정을 끊어 내지 못하여 아버지께 한 소리 듣고는 했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 상황은 거대한 압박일 것이다. 모든 사용인들이 그를 닦달하며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물어보고 있겠지. 상황은 알겠지만 지금 감정적으로 힘들고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아가씨.”
지안튼이 나를 불러 놓고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는 게 보였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난처해하는 그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가 꽤 긴급하고 난처하기까지 한 용건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안튼, 자정에 장례를 치러야 돼. 버릴 시간 따윈 없는데.”
아버지 서재에서 감상에 젖어 있던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괜히 지안튼을 재촉해 봤다. 아니면 밤새도록 이러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그는 아주 말하기 곤란해하고 있었다.
“아가씨, 각하께서 작년에.”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지안튼의 얼굴에 ‘어떡하지.’가 잔뜩 쓰여 있었다. 쓰인 곳이 또 쓰이고 또 쓰인 곳을 또 뒤덮는다. 지안튼은 작년에, 까지 말하고 입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해서 나는 고함을 냅다 질러 버렸다.
“지안튼!”
내 고함에 놀란 지안튼이 엉겁결에 같이 소리쳐 대답했다.
“작년에 남자아이를 데려오셨습니다!”
♡ 첫 번째 앞장. 사라졌던 아이 ♡
남자아이?
지안튼의 뒤를 따라 그 남자아이의 존재를 확인하러 가면서 나는 좀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내 자식은 너뿐이니, 네가 모조리 다 가져가라느니 하셨던 분은 어디 가시고 아들을 떡하니 낳아 오셨단 말인가.
“몇 살인데?”
“열한 살이라고 합니다.”
열한 살!
심지어 저 소리들을 하실 때 그 아이는 이미 태어나 있었구나. 하아,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지? 아버지께 남자아이가 있다면, 설사 사생아라 할지라도 상속권은 넘어가게 되어 있다. 입적이 안 되어 있다고 해도 아버지의 핏줄을 이었고 삼촌이 양자로 들이면 끝이다. 그는 정당한 계승권을 요구하게 될 거고 나는 순식간에 길 잃은 양이 되겠지.
아니, 뭐, 그런 건 상관없는데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왜 네가 다 가져가라는 둥 이렇게 말씀하셔서 4년이나 사람을 심란하게 만드신담. 내가 욕망하지 않는 것인가, 세상이 나의 욕망을 거세한 것인가를 두고 격렬하게 고민했던 나의 4년은 뭐냐고, 도대체.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데려오셨을 정도면 공식적이지는 않아도 핏줄은 인정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내 남동생이 된다. 남동생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존재지만 어쨌거나 동생이라면 그가 상속자이니 정당하게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지.
그리고 늑대 같은 친척들과 더 격렬하게 싸우게 되겠구나.
내가 상속자라면 차라리 이야기가 쉬워진다. 여자라서 열등하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나는 당사자다. 나는 내 뜻대로 움직인다. 누군가와 협의를 거칠 이유가 없고 나와 나 사이에는 누구의 이간질도 통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남동생과 나 사이에는 수많은 이간질이 끼어들 거고 내 이복동생이 아무리 참하게 나를 믿어도 두세 번쯤은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들 모략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까.
뭐, 이것도 아주 좋게 생각한 경우다. 남동생이 나를 적대시한다면 이야기는 더욱 피곤해진다. 다른 건 그 아이가 가져가도 좋지만 하스트레드 기사단만은 넘겨줄 수 없다. 나도 넘겨줄 수 없고 기사단도 그 아이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 중 하나는 바로 기사단이다. 그리고 그 기사단의 단주가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후계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 남동생이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다면 아마 나와 크게 반목하게 될 것이다. 기사단은 내 남동생이 가질 수 없는 것이니까.
하스트레드 기사단은 자유 기사들이 이룬 기사단으로 용병 기사단이다. 역사적으로는 이백 년쯤 된 유서 깊은 이 기사단의 소유주는 여러 차례 그 가문을 바꿔왔는데 현재는 사리안 가문, 즉 우리 가문이 이 기사단을 소유하고 있다.
소유하고 있다고는 해도 하스트레드의 법은 세간의 법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만든 집단이며 따라서 기사단에 속한 이상에는 사리안 가문의 신하로서 그 뜻을 따르지만 기사단에 머물지 말지는 각자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다. 또한 사리안 가문에게는 하스트레드의 정체성, 즉 자유와 계약을 지키는 것이 목숨보다 중요한 소임으로 여겨지고 있다.
내 아버지, 일리드 지 사리안은 그의 당대 그로스랜 국왕과 장기 계약을 맺으며 작위를 요구했고 공작이 되셨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스트레드가 그로스랜의 신하가 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스트레드와 그로스랜은 엄연히 계약 관계다. 하스트레드는 독립적이다. 친척들도 작위나 영지 같이 왕이 하사한 것들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감히 하스트레드의 단주 자리를 주장하기는 어려운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하지만 남동생이 있으면 어떻게든 파고들려고 하긴 하겠지.
아, 아직 일이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부정적인 생각하지 말자. 열한 살. 그래도 그만하면 아직 감언이설이 통할 어린애니까 대충 잘 달래서 옆에 잘 붙들어 놓고 기사단은 포기시키고 나머지만 대충 갖게 해 준 다음 서로 헤어지면 제일 좋을 것 같다.
아니지, 결혼이 있지. 남동생이 공작 작위를 받는다면 그는 바로 결혼해야 한다. 이 안주인 자리를 두고 친척들이 또 피 튀기는 싸움을 할 게 눈에 선했다. 아니면 아예 사생아라는 부분을 파고들며 결혼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하던가. 후자가 더 가능성 있겠구나. 결혼하지 말고 죽어 버리라고 하겠지.
그렇게 놔둘 성싶으냐.
피곤해질 미래를 한참 상상하고 있는데 지안튼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의 등을 보며 나도 걸음을 멈췄지만 왜 그런지 의아하기만 했다. 마구간의 구석에 데려온 이유가 뭔지…. 여긴 이제 사용하지도 않는 오래된 마구간인데.
“여기 계십니다.”
지안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내가 눈살을 확 찌푸리자 지안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제 뜻이 아닙니다, 아가씨.”
“알아, 설마 네 맘대로 했겠어.”
아무리 사생아라고 해도 공작의 자식이다. 공작의 명령이 없는 상태에서 공작의 자식을,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마구간에, 그것도 무너지기 직전의 마구간에 두는 건 불가능하다.
아버지, 도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아니 애를 데려왔으면 잘 입히고 먹이고 공부도 좀 시켜 놓으시지, 이런 쓰레기장에 처박아 두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괴짜이시긴 했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냉혈한이신 것도 맞지만 이건 좀 심한데. 이럴 바에는 차라리 데려오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텐데.
마구간은 밖에서 보는 게 차라리 나을 지경이었다. 밖에서도 용케 무너지지 않고 서 있네, 싶었는데 안에 들어서자 해괴하고 쿰쿰한 냄새에 거미줄에 먼지에 온갖 오물까지. 내 신발에 박힌 징이 삭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지안튼이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든? 이든!”
반말? 내가 지안튼을 노려보자 그가 흠칫 놀라 고개를 마구 저었다.
“각하의 명령이십니다!”
“오늘부터 나도 명령하겠는데 반말하지 마.”
“예, 예, 아가씨. 이, 이든 도련님? 도련님?”
이름이 이든이구나. 그런데 왜 이든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