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배의 꽃-1화 (1/94)

<☆1>깜

♡ Prologue ♡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위독하시다는 이야기에 서둘러 돌아왔건만 내가 성에 도착하기 전날 밤,

아버지께서는 숨을 거두셨다. 결국 입성했을 때 내가 본 아버지는 아마포에 싸인 모습이었다.

“히익, 뭐 하시는…!”

내가 아마포를 찢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대경실색해서 나를 말리려 들었지만 나는 그들을 뿌리치고 끝까지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했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버지는 죽은 척하고 사라질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인지 통나무인지 어디서 굴러들어 온 시체인지 땅에 묻기 전에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얼굴을 대면하였을 때 나는 아마포를 찢던 나이프를 든 채로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던 아버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초췌했다. 얼굴이 푸르고 어두컴컴한 것이 마치 독살당한 사람처럼 보였다.

“독살인가?”

성의 의사인 루젠에게 묻자 시신을 훼손하는 줄 알고 넋이 나가 있던 루젠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벽에 기대어 있던 그는 몸을 겨우 추슬러 일어서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검시해 보았으나 그런 징후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저주사겠군. 아닌가?”

루젠이 아닌 신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성의 신관인 로스토프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 말하지 않았지?”

성의 샹들리에 불빛이 흔들려 로스토프의 얼굴을 반만 비추었다. 나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아마포를 찢어 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내게 독살과 저주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밤에 돌아가신 분의 시신을 급작스럽게 아마포로 싸 둔 것 자체가 약간 의도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왜 다들 아버지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닌 것을 숨기려고 들었을까?

“가능성뿐이라서… 확실한 건 아닙니다.”

“가능성뿐이면 이런 중요한 일을 네 멋대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

내가 들어도 내 목소리는 싸늘하고 공격적이었다. 로스토프가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로스토프가 고개를 숙였다. 나보다 훨씬 키가 큰 로스토프가 고개를 푹 숙인 걸 보고 루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 시선이 닿자 루젠이 로스토프를 따라서 고개를 떨궜다. 마음속으로 찔리는 게 있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아버지의 시신을 앞에 두고 주변에 몰려 있는 성의 주요 인물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의사나 신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집사장이나 여러 관리까지도 내 시선이 닿으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다들 아버지의 죽음이 미심쩍다는 걸 눈치챈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다시 시선을 아버지에게로 옮겼다.

나의 아버지, 일리드 지 사리안은 냉혈한에 괴짜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했고 세상의 이목이나 상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나를 기르는 방식도 그랬고 당신이 살아가는 태도도 그랬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존재가 좀 성가실 때도 있었고 불만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랑스러웠다. 아버지는 늘 자신이 납득한 길을 가셨으니까.

이 죽음도 납득하셨으려나.

저주사인지 자연사인지 모를 이 죽음도.

“자정에 장례식을 치르도록 하지. 로스토프, 너는 저주를 건 자가 누군지 알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미리 확보해 두도록 해.”

내 명령에 로스토프가 “예, 아가씨.”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새삼스럽게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대부분 무표정이었고 몇몇 이들은 복잡한 심경을 감추기 위해 남들보다 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다들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걸 꺼려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안튼, 장례식을 준비해.”

내 지시에 집사장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이 성에 있었던 사람인데도 그는 내가 역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선을 꺼리고 있었다.

“뭡니까, 이 분위기. 누가 보면 주군께서 각하를 죽인 줄 알겠어요.”

지하에서 올라오는 계단의 석벽에 기댄 채로 상급 기사인 크라이스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같은 상급 기사이자 나의 부관이기도 한 소피아가 매서운 목소리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닥쳐, 크라이스. 괜한 소리 해서 주군께 폐를 끼치지 말라고.”

“하지만 소피, 아까 그 분위기 봤잖아. 아무도 눈 안 마주치는 거. 와, 부친이 작고한 상황인데, 동네 평민 아이한테도 안 그러겠어.”

크라이스는 아까의 분위기가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소피아가 저걸 확, 이라는 얼굴로 단검을 슬쩍 꺼내는 걸 보고 있자니 조금 웃음이 나왔다. 내가 메마르게나마 웃음을 내자 소피아가 단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뭐가 웃기십니까.”라고 불퉁하게 물었다.

“웃기잖아. 너희는 변함이 없고 저들은 너무나 눈치를 보고.”

내가 크라이스를 지나쳐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소피아도 냉큼 그를 지나 내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눈치를 왜 봅니까? 주군께서 성의 관리들을 갈아엎으실까 봐요?”

피식 웃음이 났다.

소피아는 평민이다. 하지만 드물디드문 마검사인 덕분에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 현재는 봉토도 가지고 있는 어엿한 영주인데 그녀는 가끔 이렇게 철없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그녀가 싫지 않았다. 그녀의 순진무구함이 신선한 바람을 쐬는 것처럼 상쾌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으니까. 지금 이 순간처럼.

“주군?”

소피아가 왜 웃냐는 듯 나를 불렀다. 어서 대답해 달라는 재촉에는 나를 향한 걱정과 순수한 호기심이 뒤엉켜 있었다. 대답해 주지 못할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저주사를 당하셨다고 하면 내가 복수를 하려 들 것이고 그럼 애꿎은 사람이 화를 입을 수도 있잖아. 그 애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고. 첫째는 그걸 걱정하는 거고.”

“그래서 사인도 모르도록 아마포부터 입힌 겁니까? 아이고, 충성심 한 번 같잖다.”

크라이스가 소피아의 뒤를 느긋하게 따라오며 이죽거렸다.

“둘째는요?”

소피아가 크라이스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물었다.

“내가 여자라는 거지.”

소피아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일처럼 분해하는 그녀와는 달리 크라이스는 이해할 수 없는 듯이 물었다.

“여자라는 게 문제가 되나요? 주군께서는 외동이시잖아요. 사생아도 없고. 상속권 문제는 깨끗하지 않습니까?”

“친척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

더 이상 부하들과 상속 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하고 싶지 않아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석벽은 소리가 꽤 멀리까지 울리고 이미 뒤쪽에서 미행하는 기척도 느껴지고 있었다. 내 기분을 알아챈 듯 크라이스와 소피아도 더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내게는 친척이 꽤 많다. 딸 하나만 겨우 남기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기회처럼 느껴질지 불 보듯 뻔했다. 작위와 재산, 명예와 권력. 그 모든 게 한꺼번에 굴러 들어올 기회라고 생각들 하고 있겠지. 다들 머릿속으로 계산을 돌려 보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내 나이 스물여섯.

아버지의 후계자라 상속 문제가 걸리지만 않았다면 벌써 결혼한 지 오래였을 것이고 애도 아마 예닐곱 살쯤은 되었을 나이지만 나는 늘 상속 문제 때문에 결혼하지 못했다. 친척들은 내 결혼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내가 결혼하여 데릴사위를 들인다고 해도 그는 사리안 가문이 아닌 다른 가문의 피를 가지고 있고, 그런 피를 가진 남자의 피가 반이나 섞인 남자아이가 태어나 상속권을 가지게 되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  “더러운 피를 받아 사리안 가문을 잇게 하신다면 선조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내 피도 있어요.”

“외람되지만 여자의 피는 남자의 피보다 열등하니까요. 신이 그리 창조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

나는 이런 이야기에 일일이 충돌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내 아버지께서는 나의 피가 자신의 피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며 웃는 삼촌에게 ‘우월하면 우월한 값을 좀 하지 그랬어?’라며 비꼬셨다. 삼촌이 붉어진 얼굴로 벌컥 분함을 터뜨리려 하자 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나의 삼촌, 자신의 남동생을 바라보셨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정말 궁금하다는 듯한 얼굴에는 순진함으로 가장한 빈정거림이 한껏 담겨 있었다. 결국 삼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게는 피가 열등하니 우월하니 할 수 있어도 아버지께는 찍소리도 못 하는 게 바로 친척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께는 찍소리도 못 했지만 내게는 왈왈 짖을 게 분명했다. 짖는 정도면 다행이지만 물어뜯어 내 살점 한 조각 남기지 않으려고 들 테니 나도 최대한 방어해야 했다.

[  “재혼하셔야죠, 아버지. 다들 아버지께서 자식이 없다고 입방아들을 찧어 대는데 귀찮습니다.”  ]

나는 아버지의 작위에도 재산에도 별 관심이 없었었다. 도리어 아버지의 상속녀로 살면서 피곤한 일에 엮이는 게 내심 귀찮았었다. 나는 내 실력으로 가진 것들이 있었고 내 실력으로 이룰 것들도 많았다. 차라리 아버지께서 재혼을 하시고 새어머니가 남자아이를 낳아 친척들의 입을 꿰매 버렸으면 하는 기분이 컸었다. 스물둘의 초겨울. 오랜만에 전장에서 돌아와 아버지와 아버지의 서재에서 술을 홀짝이며 재혼을 권했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의아한 눈, 믿을 수 없다는 표정. 나는 아직도 그 표정이 기억에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난다.

[  “마치… 너는 내 자식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구나.”

“…….”

“네가 내 자식이야, 실리. 너만이 내 자식이다.”  ]

아버지는 내가 말하는 자식이 ‘정정당당히 아무런 트러블 없이 상속을 받을 자식’을 말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대답해 주고 계셨다. 상속을 받을 사람은 세상에 오직 나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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