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외전 3화.
질래는 은우와 합의 하에 6개월 간 모든 일정을 비우기로 했다.
일명 PCT(Pacific Crest Trail)라고 불리는 미국 3대 트레일 코스를 은우와 함께 완주하기로 한 것이다.
본격적인 미국 생활에 앞서 은우와 아주 특별한 시간을 갖고 싶은 이유에서다.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이르는 변화무쌍한 극한의 여정. 미국의 대표적인 장거리 하이킹 코스로 유명한 PCT 구간은 약 4300km에 이르는 대장정으로, 넉넉하게 6개월을 배낭 하나에 의지한 채 견뎌내야 하는 위험천만한 모험이기도 했다.
질래가 사전에 PCT 퍼밋을 메일로 신청한 덕에 승인 완료 메일을 받고 실행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각각 배낭 하나씩 메고 6개월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을 챙긴 후, 미국 멕시코 국경에서 드디어 여정을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은우야, 나, 완주할 수 있을까?”
“바보, 시작하기도 전에 그런 걱정을 왜 해.”
“내가 가자고 해놓고, 혹시라도 너한테 짐이 될까 봐….”
걱정 어린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질래의 가냘픈 몸을 은우가 꼭 안았다. 질래 역시 짐을 메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팔을 더 벌려야만 했다.
“나랑 있으면, 그 모든 순간이 완주한 거야. 그러니까 즐기자.”
질래가 은우 품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은우와 이 길을 함께 걷는 다는 것만으로도 질래는 충분히 설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건 힘든 거였다. 시작점에서 32km 구간까지는 물이 없기에 각각 6, 7리터의 물을 배낭에 넣고 걸어야만 했다. 이외에도 옷과 장비, 일주일치 식량까지 포함하면 도합 30kg 가까이 되기 때문에 왠지 세상 걱정근심을 모두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기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교육을 받은 후 이 여정을 시작했지만 그중 절반만이 성공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질래와 은우는 그 절반에 꼭 포함될 것을 다짐하며 함께 성공을 기원했지만 첫 번째 장애물이 벌써부터 부부를 가로막았다.
바로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뜨겁다는 모하비 사막.
물을 많이 지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질래는 처음 경험하는 사막의 더위에 눌려 순식간에 물을 반이나 마셔버렸다.
“은우야, 이걸로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
“여기서 20km만 더 걸으면 물이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부족하면 내 거 마셔.”
걸어도, 걸어도 한없이 뜨겁고 끝이 없는 사막 길. 정말 목이 타들어가 탈수로 쓰러질 것만 같은 순간에도 제 물을 나눠주겠다는 은우덕분에 질래는 힘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무릎이 아파 한발을 내딛기가 어려웠고, 40도에 달하는 뜨거운 사막 열기가 저를 짓눌러 죽일 것만 같았다. 새끼발가락에 볼록하게 잡힌 물집이 집요하게 걸음걸음을 괴롭혀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왔지만 질래 곁에는 항상 은우라는 희망이 있었다.
“정말 희한해. 미주신경성실신 진단 받았을 때만해도 하이킹은 꿈도 못 꿨는데, 그런 두려움이 다 사라졌어. 같이 산 이후로 다 나은 거 같아.”
“쓰러져도 괜찮아. 남편이 괜히 있겠어?”
“그러게.”
남편은 황량한 사막 속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이 여정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막의 환경이 달리 보였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엄한 바위와 뾰족한 대형 선인장이 은근히 귀여웠고, 몇날 며칠을 걸어도 몰랐던 자연의 위대함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찌푸린 얼굴로 은우를 보며 푸념하다가도 금세 대자연 속에서 함께 손을 잡고 내일을 향해 갈 수 있음에 행복했다.
그대로 한 30km쯤 걸었을까? 은우야 워낙 전 세계 곳곳으로 트래킹을 많이 다녔던지라 괜찮았지만 질래는 진짜 힘들어 미치겠단 표현을 어떨 때 쓰는지 절로 실감했다. 그런데도 신기한 건 이 와중에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은우와 고난의 여정을 즐기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제 짐까지 지고 가는 남편을 보니 저도 모르게 은우의 땀을 닦아주게 됐고, 양보 받은 물로 그의 입술을 축여주는 동반자가 됐다.
그때마다 둘은 말하지 않아도 속으로 깨달은 한 가지가 있었다.
‘이게 앞으로 우리 부부가 가야 할 진짜 길이구나.’
질래가 몸소 느낀 벅찬 감동을 남편에게 표현했다.
“은우야, 몸은 힘든데 너랑 매일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한 일인 거 같아.”
은우는 그런 질래가 대견하다는 듯, 깊어진 눈매로 그녀를 느른하게 응시했다.
“솔직히, PCT 걷자고 했을 때 좀 의외다 싶었는데. 요 며칠 여보 얼굴 보니까 즐기는 거 같아서….”
“같아서?”
“행복해, 진짜로. 나는 꿈을 두 개나 이룬 셈이니까.”
저를 보며 꿈을 이뤘다는 남자. 질래는 무슨 꿈을 이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남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다음 말을 이어서 해달라고 재촉하듯 그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쓸어주며 은근히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말해봐. 뭘 이뤘는데?”
“음… 어렸을 때 결혼하면 와이프랑 이런 여행 꼭 함께 해보고 싶었거든. 나는 늘 혼자 다녔으니까.”
“좋아, 그럼 그건 이뤘고, 또 하나는?”
정답을 알면서도 일부러 묻는다. 은우가 밀당하듯 알아서 대답을 늦춰주니 이보다 더 찰떡궁합은 없으리라.
“그 꿈속에 함께 있는 사람이 가질래라서. 여전히 믿기지가 않아. 매일 매일이 꿈같아서.”
“나랑 결혼하는 게 꿈이었구나?”
얼굴을 스치는 뜨거운 바람을 따라 부부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사막에 흩어졌다.
때때로 형용할 수 없는 대자연이 주는 풍경에 절로 경외감을 느꼈지만 부부를 더욱 크나큰 행복으로 이끄는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거친 길 위에 마법처럼 둘만의 공간이 생기는 찰나였다.
그러니까 길 위 어딘가에 텐트를 치고 단둘이 도란도란 지난 이야기를 나누며 소박한 저녁 한 끼를 만들어 먹을 때였다. 그때만 되면 두 사람은 우리가 정말 부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 한 끼를 설익은 라면으로 때울지언정 이보다 더 맛있는 식사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며….
“자기, 아까 언덕에서 내 손 놓고 간 거 알아?”
“그럴 리가. 여보가 손에 땀이 차서 놓은 거 아니었어?”
“아니거든?”
“미안. 난 여보를 위해서 그런 건데, 내일은 여보가 싫다고 할 때까지 절대로 손 안 놓을게.”
가끔은 사소한 서운함을 털어내기도 했지만 마음씨 넓은 남편의 센스로 그들은 금세 하나가 됐다. 질래도 은우가 제 잘못도 아닌 일로 사과해 올 때면 얼른 받아줬다.
“더워 죽겠는데 무슨 손이야, 그냥 해본 말이야.”
“그래도 여보가 조금이라도 속상했으면 그건 사과할 일이 맞지.”
“이은우, 넌 나한테 서운한 거 없니? 뭐가 그렇게 착해? 너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잖아.”
은우가 질래의 물음에 돌연 내일 길에서 먹을 주먹밥 재료를 바닥에 하나둘씩 펼쳐 놓았다. 은우는 뭔가 대답하기 곤란할 때면 항상 이런 식으로 답변을 회피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질래의 뜨거운 시선을 끝까지 피하는 데는 실패한듯 한쪽 입가를 씰룩이며 속내를 꺼내 놓는다.
“없어, 나는 가질래만 있으면 돼. 서운할 틈도 없다고.”
“그게 다야?”
“기왕이면 이은우 말고, 여보, 라고 해주면 더 좋고.”
“칫, 여보! 여보, 은우 여보. 됐어?”
“응…. 좋다.”
그를 웃게 하는 방법이 단순해서 좋았다.
씻지 못해 위생상 깊은 스킨십은 못했지만 살과 살을 맞댄 후 그의 품에서 잠드는 순간이 묘하게 설렜다. 은우가 가끔씩 질래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타오르는 욕정을 대놓고 표출했지만 아내는 그의 품에서 새근새근 잘도 잤다.
그런 순간이 내심 아쉽긴 했지만 내일이 있기에, 체력을 충전해야만 사랑스러운 아내도 지킬 수 있기에, 어느새 은우도 질래를 품은 채로 곤히 잠들곤 했다.
***
며칠 후.
질래가 트래킹 중에 다리를 삐었다.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이동해야 했기에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짐만 아니라면 은우도 당장 그녀를 업은 채로 하이킹을 강행하고 싶었지만 둘은 결국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일정을 늦추기로 결정했다.
한 사람에게 생긴 변수 때문에, 때로는 날씨 때문에, 어느 날은 예상치 못한 귀한 인연이 닿아서. 질래가 짜온 견고한 일정은 수십 번도 더 변경됐다. 그게 길 위에서 부부가 살아내야 할 여정이자 삶 그 자체였다.
PCT 구간 중 500km를 돌파 했을 때쯤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구간을 걸은 터라 씻지 못해 부부는 슬슬 온몸이 근질근질 했다. 그런데도 신기한 건 그럴 때마다 자연은 인간보다 한발 앞서 마법을 부려 갈급함을 채워 줬다. 해질 무렵 어디선가 기막히게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설마 물?
질래는 볼일을 보러 간 은우를 뒤로한 채 물소리 나는 곳으로 아픈 다리를 절뚝이며 그쪽으로 향했다. 역시나 맑게 흐르는 물이 질래를 반겼다.
그녀는 그 앞에 무릎 꿇은 후 양손으로 먼지투성인 얼굴을 적셨다. 약 5일 만에 하는 세수는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상쾌한 기쁨이었다. 그만큼 사막지대에서 물은 소중했다. 얼른 은우가 와서 이 즐거움을 함께 만끽하길 바랐던 그때였다.
“꺄아아아아악!”
행복으로 가득 찬 질래의 눈동자가 돌연 겁에 질려 한없이 확장됐다.
동시에 저 멀리서 질래의 비명을 들은 은우의 새카만 눈동자도 순시에 번들거린다.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설마 실신? 아니면 또 다리를 삐끗해서 미끄러진 건 아니겠지. 고도가 꽤 높은 지역이라 그녀가 걱정이 됐다. 방울뱀을 마주했을 수도 있고, 곰이 나타나도 전혀 이상할 리 없는 지역이기도 했다.
아내의 비명에 은우는 별의별 나쁜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급히 써내려갔다. 본능적으로 질래가 있는 곳으로 미친 듯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떻게 달렸는지조차 모를 만큼.
그녀가 안전하길 간절히 바라면서, 질래 곁으로 뛰어간 은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