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물 만난 인어공주
은우가 파리로 떠난 후 질래는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를 알기 전부터 원래 홀로 있던 시간을 즐겼건만,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어느새 매일 퇴근 도장을 찍던 은우가 그립다니, 당황스러웠다.
질래는 강화그룹 경영권에서 완전히 물러난 후 1년간을 집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업무적인 일이나 참고인 조사로 경찰서에 출석하는 일 외엔 최대한 외출을 자제했다.
온종일 집에서 독서를 하거나 온라인 강의로 외국어 공부와 자격증 공부를 하다 보면 금세 하루가 지나갔다.
이마저 지루해질 즈음엔 요가를 하거나 러닝머신을 뛰면서 은우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보거나 뉴스를 틀어 세상 돌아가는 걸 확인하곤 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던 중 질래의 휴대폰이 울렸다.
은우 번호는 지정 벨소리가 있건만, 누구지?
딱히 전화벨이 울릴 만한 일이 없었기에 질래는 재빨리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기훈희 회장?
그녀가 웬일이지?
“예, 회장님.”
혹 은우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싶어 저도 모르게 엄지손톱을 잇새로 갖다 댄 후 잔뜩 경직된 목소리로 기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저녁 어떠니, 우리 집에서.
거절할 군번이 못 됐다. 당연히 간다고 대답한 후 질래는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서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정장 몇 벌을 꺼내 제 몸에 대보았다.
집에 있는 내내 트레이닝복이나 편한 잠옷 위주로 입고 있다 보니, 화려한 옷들이 주인 잘못 만난 옷처럼 한없이 어색하게 보였다.
우울함을 극복하고자 운동을 꾸준히 한 덕에 허리가 더욱 잘록해졌다.
오랜만에 전신 거울에 비친 제 몸매가 연예인 못지않게 훌륭해 보이는 게, 집이라는 우물 속에 너무 오래 있었나 보다.
‘정신 차려, 가질래.’
스스로를 다그친 후 적당한 옷을 골라 얼굴에 그럴싸한 생기를 그려 넣었다.
식욕을 잃어선지, 성욕을 잃어선지, 예전보다 확실히 얼굴이 푸석푸석한 게 낯빛이 어두웠다.
일부러 거울을 보며 예쁘게 웃는 연습도 해보았다.
‘웃으니까 더 예쁘다, 내 새끼.’
어디선가 은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유일한 내 편.
그를 위해서라도 오늘 기 회장에게 어떻게든 점수를 따고 싶은 질래였다.
출발하기 전 미리 주문한 화과자 세트와 고급 와인 1병, 꽃다발을 준비한 후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고 기 회장 댁으로 향하는 길.
그녀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집으로 초대하는 걸까. 요즘에는 어떤 생각을 하던 결론이 부정적인 쪽으로 흘러 버려서 걱정이 태산이었다.
혹 이제 와 헤어져 달라는 건 아닌지, 은우를 위해서 이민 갈 것을 권유하지 않을지. 보통 재벌가 자제와 일반인이 열애했을 때 그 집안에서 취할 법한 액션들을 떠올리며 질래는 갖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해 보았다.
그렇게 운전하다 보니 어느덧 GH그룹 본가인 대저택 앞에 도착했다. 차 키를 저택 기사에게 맡긴 후 현관문으로 들어가는 길.
기 회장이 문 앞까지 마중 나와 저를 따뜻하게 환대해줬다.
“어서 와요.”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통상적인 인사를 나눈 후 기 회장과 함께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그런데 질래 한 명 초대했다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갖가지 보양식이 한 상 차려져 있는 게 아닌가.
먹기도 전에 체기가 올라올 만큼 일류 호텔급 수준의 진수성찬은 오히려 질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기 회장은 보통 무언가를 협상할 때 먼저 거하게 대접한다는 걸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몸은 괜찮고요?”
“신경 써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안부를 주고받으며 시작된 식사는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기 회장은 의외로 은우의 연예계 활동을 흥미 있게 지켜보는 듯 마치 소녀 팬처럼 그에 이야기를 줄줄 꺼내놓았다.
식사 내내 연예계 동향과 사회 이슈 정도만 언급하던 그녀가 본론을 꺼낼 참인지 질래에게 장소를 옮겨 티타임을 가질 것을 제안했다.
“달달하게 꿀 탄 오미자차 어때요?”
“좋습니다.”
은우 이야기로 잠시 풀렸던 긴장감이 전신으로 쫙 퍼졌다. 느슨하게 늘어졌던 근육들이 불시에 탄탄하게 텐션을 되찾았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지 몇 분이나 흘렀을까.
질래 앞으로 붉은 빛깔에 살색 잣이 동동 떠 있는 따뜻한 오미자차가 놓였다.
그 특유의 향이 질래의 후각을 사로잡더니 단맛, 신맛, 쓴맛, 매운맛, 짠맛이 적절하게 조화된 오미자의 묘한 맛이 질래의 떨리는 마음을 다독여 줬다.
그럼에도 찻잔을 들고 있는 손이 불안감을 호소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 회장이 먼저 영하로 떨어진 삭막한 분위기를 온화한 미소로 녹였지만 질래는 단 한 순간도 담담할 수가 없었다.
기 회장에게 은우가 어떤 존재인지도 알았고, 제 현 위치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테러 사건 관련 무혐의가 입증됐다지만 한때는 TY그룹, 하나뿐인 장손의 아내가 될 뻔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은우가 책임지기엔 리스크가 많은 여자였다. 따지고 보면 GH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의붓아들이었던 이은구 사장을 살해한 테러 조직 수장의 딸이기도 했으니 더욱이 기 회장을 볼 면목이 없었다.
“식사할 때부터 많이 긴장해 보이던데, 편히 마셔요. 질래 씨 혼내려고 부른 거 아니니까.”
기 회장이 질래를 보며 빙긋 웃자 그녀는 어색함을 티 내지 않으려 찻잔에 담긴 새빨간 오미자차를 꿀꺽꿀꺽 삼켰다. 어찌나 차가 뜨거운지 악 소리를 낼 뻔한 걸 겨우겨우 참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본 기 회장이 메이드를 불러 찬물을 주문한 후 그녀 앞으로 살며시 밀어줬다. 속으로 어찌나 부끄럽던지 질래의 얼굴도 오미자와 닮아 버렸다.
부드러운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그녀의 아우라가 너무 세서 그런지, 그 카리스마에 질래는 심장이 눌린 기분이었다.
“나 질래 씨보다 한참 선배니까 말 편히 할게요. 괜찮죠?”
“예, 당연하죠, 말씀 편히 하세요.”
기 회장이 달달한 오미자차로 입술을 축였다. 질래도 동시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저에게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팽팽한 긴장감이 지속되던 그때, 기 회장의 드디어 주름진 입매가 씰룩였다.
“질래야, 은우 할리우드로 진출시킬 예정이다.”
“미국이요?”
“그쪽 에이전시에서 연락 왔다더라.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아마 은우가 너한테 얘기 안 했을 거 같은데, 아무래도 한국 활동은 어렵지 않겠니?”
설마 이런 식으로 저와 은우를 갈라놓으려는 걸까. 사리분별 빠르기로 손에 꼽히는 질래의 이성 회로에도 과부하가 걸렸다.
마치 재판장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피의자로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때때로 은우를 놔 줘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들이닥친 이별은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만 같아서, 어떠한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던 찰나 기 회장의 1심 선고가 떨어졌다.
“은우는 어차피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애야. 평생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게 놔두고 싶은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난이도가 높은 서술형 문제였다. 은우의 삶을 저에게 허락받을 리도 없을 테고 과연 기 회장이 원하는 답안이 무엇일지 질래는 선뜻 답을 써 내려가기가 어려웠다.
일단 시간을 끌기 위해 목청을 가다듬은 후 제 손으로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은우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해 보기로 결정했다.
“제 생각에도 은우는 타고난 배우 같아요. 그렇게 연기를 잘할지 몰랐거든요. 영어도 원어민 수준이라 할리우드 가서도 금방 자리 잡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질래의 대답이 흡족했는지 기 회장이 눈썹을 추켜 뜨며 입가에 웃음을 삼켜내는 게 훤히 보였다.
그 순간에도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진 질래는 두 손을 맞잡았다가도 비비기를 반복하며 조이는 마음을 서서히 이완시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 회장이 최종심을 내릴 것처럼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걷었다. 인자했던 눈빛에 돌연 진중함이 들어찬 것이다.
“질래야, 그래서 내가 너한테 한 가지 일을 제안해보려고 해.”
“어, 어떤 일이요.”
“해줄 수 있니?”
드디어, 은우와 끝인 건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질래가 천천히 기 회장을 응시했다.
“은우 대신 GH 쪽 일 해보면 어떻겠니?”
“네?”
예상하지 못한 판결문이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미지근한 차를 마시다가 사레가 걸려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연신 기침이 쏟아졌다.
“제가 GH 쪽 일을요?”
“어차피 우리 식구 될 거 아니었니?”
“…….”
차가웠던 손발에 온기가 들어차는 듯, 순시에 가슴이 충만해졌다.
눈가가 뜨거워지길래 급히 표정을 숨기고자 기 회장 앞에서 머리를 수그렸다.
식구라니. 세상에 홀로 남겨진 저에게 가족이란 표현은 희망을 증폭시키는 단어였다.
초조함으로 바짝 마른 입술이 오미자차보다 더 빨간 생기로 서서히 물들었다. 숨소리마저 억제하며 바짝 조였던 숨통이 트인 듯 질래의 굳은 얼굴이 점차 투명하게 반짝였다.
“제가 GH 일을 해도 될까요?”
“내가 바라는 바인데. 해줄래?”
“…….”
실은 일이….
하고 싶었다. 강화그룹을 떠나 새로운 직장에 새로운 터전이라니, 좋았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삶이 지루했다. 은우 하나 바라보며 숨 막히는 나날을 인내로 견뎌왔던 질래에게 일터는 산소호흡기와도 같았다.
“우리 기업이 강화그룹에서 추진 중인 전기차와 자율주행 자동차 쪽 사업만 인수해서 공동 프로젝트로 진행해볼 계획이야. 혹시 추진 중이던 프로젝트 없었니? 미국 진출 계획 중에 어그러졌다고 듣긴 했다만. 좋은 기회인데 아깝잖아?”
설마, 그래서 은우도 미국으로 진출시키려는 걸까?
함께 보내려고?
갑자기 질래의 입술에 날개가 달렸다. 밝아진 표정으로 한참 동안 기 회장에게 설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기 회장도 사업 이야기에 말문이 트인 질래를 보니 마음이 놓이는 한편, 악질의 가 회장이 딸 하나는 기막히게 잘 뒀구나 싶었다.
가 회장의 딸이란 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은우가 절대 포기할 리 없는 사람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은우가 제 인생을 건, 제 미래라 말했던 아이.
은우가 지난밤, 파리에서 찍힌 사진에 대해 털어놓으며 도움을 요청해 왔다.
제 아이를 임신했던 여자라며, 울먹이며 그녀와 살고 싶다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을 기 회장이 내칠 수 있을까.
끊어서는 안 되는 걸 억지로 끊어내면 모두가 소중한 걸 잃게 된다는 걸 이미 아들을 통해서 배운 바가 있었다.
질래란 아이는 대화할수록 잘 통했고 사업가 기질이 다분했으며, 현명한 게 기 회장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저 일을 해보자고 제안했을 뿐인데, 아직도 사업 계획을 말하고 있는 아이.
그 총기 어린 눈빛이 젊은 시절 저와 똑 닮아 있었다.
그래서 은우 대신 사람을 보내 프랑스 파파라치를 만나 돈을 주고 둘의 사진을 지웠다. 덕분에 은우에게 할머니 소리 들어서 기분이 좋았고, 아직도 사업 이야기에 신이 난 예비 며느리를 보니 GH그룹의 미래도 보였다.
“회장님, 사실 이번 일만 아니었다면 올 상반기에 도레미 피자와 손잡고 자율주행차를 이용한 피자 배달 서비스를 시범 운행해볼 계획이었습니다. 미국 일부 도시에서는 이미 포드사와 진행 중인 사업이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시기상조라면 저희가 먼저 미국 시장에 무료 시범 운행을 제안해 정면 승부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이쪽 기술력이나 시스템만큼은 앞서갈 자신 있습니다.”
자율주행자동차 이야기가 저리도 즐거울까. 기 회장에게 질래는 거저 굴러온 복덩어리와도 같았다. 귀인. 그녀는 기 회장에게 어느새 그런 존재가 됐다.
질래 역시 강화그룹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제 능력을 냉정하게 펼칠 기회가 왔다는 게 세상 설레는 일이었다.
은우한테 미안하지만, 그와의 첫 경험 때만큼이나 떨렸고, 남자를 통해 처음으로 느꼈던 오르가슴만큼이나 벅차올랐다.
아무 명분 없이 은우와 결혼하는 게 걸려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내내 고민하던 시기에 기 회장의 제안은 제 갈증을 채워주는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그런 질래가 너무 기특해서 기 회장 역시 저 아일 곁에 두고 싶어졌다.
“질래야, 오늘 밤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음… 죄송해요, 저 집에 가서 작년에 추진했던 프로젝트 자료 좀 모아볼게요, 자율주행자동차 동향도 체크해봐야 될 것 같고 또, 최근 데이터가 제 손에 없거든요.”
질래는 기 회장의 일 제안에는 긍정적인 답변을, 미래의 시할머니의 ‘자고 갈래’ 유혹에는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1시간 전 어깨를 움츠린 채 저택에 들어섰던 고개 숙인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질래는 지금 물 만난 인어공주 같았다.
***
예비 시할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설렘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차장에 차를 댄 후 집으로 올라와 따뜻한 물로 반신욕을 하는데 자꾸자꾸 입에서 작사, 작곡 미상의 알 수 없는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말린 후 잠옷을 입기 위해 침실로 이동하는데 죄인처럼 침대 한쪽에서 웅크리고 자던 질래가 웬일로 맨몸으로 벌러덩, 침대 한가운데 쭉 대자로 뻗었다.
은우 없이 그리도 휑한 킹사이즈 침대가 꽉 찬 느낌이랄까.
고개를 돌리자 거울에 비친 제 몸 선이, 새하얀 피부가 아름다웠다. 죄책감에 갇혀 이대로 썩히기엔 충분히 탱탱했으며, 여전히 젊었다.
은우가 빨던 유두가 오랜 안식년 탓인지 쪼그라든 것만 같았다. 제 위에서 땀을 흘리던 남자가 환영으로 갑자기 그려졌다.
그립다, 그의 온기가.
마치 감춰졌던 본능이 각성된 듯 그와의 질펀한 뒤섞임이 간절해지는 이 밤.
처음으로 양손에 차고 넘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검지로 수줍게 도망친 유두를 빙빙 돌린 후 꾹 눌러 발딱 일으켜 세웠다.
다시 고개를 돌려 나신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한 여자를 거울로 훔쳐봤다. 제가 찾아준 성감대에 반응하며 풀린 눈으로 입술을 벌리고 있는 야한 여자.
한 손이 꼿꼿해진 유두를 자극하는 동안 다른 한 손은 오랜 기간 메말랐던 음부를 갈랐다.
“으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