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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래요-76화 (76/84)

76화. 가질래, 갖고 싶다

1년 전 질래가 은우를 선택하면서 윤태윤에게 했던 말이었다.

살고 싶다고.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그래서 왜 은우가 저 말을 하게 됐는지 그 심정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저보다 훨씬 어리고 예쁜 여자도 많이 봤을 것이다. 게다가 저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일 없는 백수 연상녀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저한테 집착하는 걸까.

가끔은 연예계에서 승승장구 중인 유망주 이은우를 놔줘야 하지 않을까하는 몹쓸 생각이 질래를 괴롭혔다.

연인 이은우도 감사했지만, 평생 그의 기사를 보며 스타 이은우를 흠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지금 질래가 은우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에 미안해서,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빛을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런데 희한한 건 은우가 마치 질래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단번에 알아차린다는 점이다.

“또, 또, 또, 눈빛 봐라. ‘왜 날 안 떠나고 이러고 있니?’ 그런 눈빛.”

“아닌데?”

아니라고 말했지만, 정확히 맞췄다. 은우는 이제 스물다섯이었다.

‘너 이 사랑, 후회 안 할 자신 있니? 혹 네 아이를 유산했다는 책임감 때문에 이러는 거니?’

TV 속 만인의 연인인 은우가 저를 사랑한다는 게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점점 더 벌어지는 그와의 격차가 힘들어서. 질래는 그를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묻고 또 물었다.

이를 짐작한 은우가 그래서 오늘만큼은 둘 사이에 금기와도 같은 이야기를 꺼내 보려 했다.

저를 등지고 있는 여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뒤에서 꽉 안았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정수리와 머리칼에 코를 넣은 후 들숨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를 마음껏 흡수했다.

새우처럼 몸을 구부려 동글게 말린 제 곡선에 그녀를 가둔 후 귓가로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진중하게 속삭였다.

“내가 말했었나? 태어나서 가장 많이 운 날이 있었어.”

“…언젠데?”

질래는 은우가 연예계 일을 하면서 혹 말 못 할 사정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 그의 매니저로부터 은우가 요즘 키스신이 즐비한 달달한 로맨스 주인공 역을 죄다 반려하고 있다는 투정을 들었다. 아마도 질래에게 도와 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은우가 다른 사람 말은 다 무시해도 그녀 말이라면 뭐든 잘 듣는 사람이란 걸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던 까닭이었다.

다만 질래가 제 정체가 밝혀지는 걸 원치 않아서 은우의 애인이란 사실을 쉬쉬하고 있을 뿐.

은우는 그동안 어떤 자리에서도 제게 여자 친구가 있음을 당당히 밝혀왔다.

그래서 은우한테 고맙고, 그래서 미안했다.

“가장 많이 운 날, 언제일 것 같아?”

은우가 질래에게 어려운 질문을 꺼냈다. 질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가장 보편적인 답을 생각해 냈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은우가 여자의 목덜미에서 머리칼이 쓸려 살결이 닿을 만큼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보이진 않아도 뒤에서 저를 안고 있는 남자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질래는 그의 따스한 숨결과 촉감을 통해 고스란히 느꼈다.

은우가 이번엔 질래를 바짝 끌어와 그녀의 부드러운 볼에 제 데워진 볼을 뜨끈하게 밀착시켰다.

“우리 아이, 떠난 날.”

“…….”

질래가 유산한 이후 은우는 단 한 번도 아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 단어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질래가 싫어했기에 은우도 마음 깊이 묻었었다.

아파도 아픈 티도 못 내고 늘 환하게 웃으며 질래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들만 나열해 온 은우였다.

“물론 아이한테도 미안해, 하지만 그보다도 가질래가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고, 속상하고….

줄래가 떠난 후 은우는 연기할 때 외엔 단 한 번도 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볼과 볼 사이에서 느껴지는 잔 떨림. 항상 헤헤거리며 바보처럼 웃기만 하던 남자가 제 뺨을 눈물로 적셨다.

이내 은우는 질래의 얼굴에도 눈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슬픔을 토해냈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몰라주니까, 자꾸 밀어내니까… 그게 제일 힘들어.”

어깨를 들썩이는 은우의 입에서 처음으로 듣게 된 말.

‘힘들어.’

철렁, 심장이 출렁였다. 단 한 번도 질래와의 관계에 있어서 부정적인 언어를 꺼내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남자의 눈물과 함께 질래의 마음에 박힌 ‘힘들어’. 그 한 마디가가 줄래의 ‘부럽다’라는 말 이후 처음으로 질래를 참수시켰다.

아프다…. 은우한테 미안했다.

“나 좀 도와주라. 응?”

도와달라며, 제 위에서 울고 있는 한 남자. 그의 진솔함이 오히려 그간 피폐해진 질래의 정신을 번뜩이게 했다.

“어떻게 해야 널 돕는 건데? 왜, 들어오는 배역을 다 마다해?”

“들었어?”

이번에는 질래가 아무 대답 없이 남자의 가슴팍에서 뒤통수를 부비며 고개를 주억였다.

“혹시 나 때문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상처 안 받게 내가 다, 감당할 테니까.”

은우가 뒷말을 못 이을 만큼 훌쩍인다. 뭔가가 있구나, 질래는 직감적으로 불길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남자, 단순히 힘들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가질래….”

“응?”

“갖고 싶다….”

“가졌잖아.”

은우가 깊은 한숨으로 질래의 차가운 머리를 식혀낸 후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내 아내가 돼 줬으면 좋겠어.”

“일은 어쩌려고 그래. 연예계가 쉽니?”

“이은우 아내, 어때?”

“인기 떨어질 텐데….”

“가질래가 영원히… 내 팬 해주면 안 돼? 그럼 뭐든,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

선뜻 대답하진 못했지만 질래는 저를 뒤에서 안고 있는 남자의 가슴 쪽으로 몸통을 돌려 콕 안겼다. 늘 안기기만 하다가 오랜만에 제 가녀린 팔을 뻗어 그의 등을 따스하게 토닥였다. 그 용기 낸 손길이 은우의 고뇌를 녹였다.

그리곤 나날이 볼록해지는 그의 가슴 근육 사이에 얼굴을 박은 채로 천천히 긍정의 끄덕임을 전했다.

오케이 사인이었다.

“너한테 나, 왜 이렇게 못난이니?”

“이렇게 예쁜 못난이가 다 있어?”

콧물을 훌쩍이는 은우가 질래의 머리를 아기 다루듯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제게 다가와 동그란 가슴을 스스로 꾹 뭉그러뜨린 여자가 고마웠다.

“웬만한 사람은 그 시간 못 견뎌내. 이렇게 내 옆에서 버텨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알아? 나는 가질래가 너무너무 자랑스러워.”

“…느끼해. 너.”

“사랑스러워 그래, 어쩔 수 없어, 이건.”

배우를 하고 난 후 말투가 더더욱 드라마 속 대사처럼 달콤해졌다. 실은 여자들이 열광하던 그 연하남 캐릭터의 말투와 비슷해졌다.

그런데도 신기한 건 그 뻔하고도 낯간지러운 말에 사람이 감동한다.

살아갈 힘을 얻고, 희미해진 희망이 선명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질래도 드라마틱한 대사가 내뱉어지진 않았다. 저는 일반인이니까. 둘의 관계에서 오글거림은 온전히 은우의 몫이니까.

“또 꼬시는 거야? 안 넘어갈 텐데.”

“좀 넘어와 줄래? 나 유럽 팬미팅 갔다 와서, 당장 준비할 건데.”

“뭐를?”

“아까 분명히 고개 끄덕인 거 다 느꼈으니까, 따라만 와줘.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때였다.

땡, 땡, 땡. 땡….

눈치 없는 벽시계가 속절없이 울려댔다.

자정 12시.

질래가 맞춰 놓은 알람이 은우에게 돌아갈 시간을 알려왔다.

눈동자에 아쉬움을 그득 담은 남자가 질래의 머리에서 팔뚝을 빼낸 후 폭신한 베개를, 제 따스한 체온 대신 포근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은데렐라는 이만 갈게, 설마 이걸 프러포즈라고 착각하진 마. 그 정도로 시시한 남잔 아니니까.”

훗, 질래가 웃는다. 남자는 여자의 그런 작은 표정 변화에도 마음이 설레고 좋았다. 더 많이 사랑해주고 싶어지는 미소였다.

“한 번쯤은 좀 시시해지지?”

늘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저를 놀라게 하는 과한 이은우를 잘 알고 있기에 질래는 지금도 충분했다. 은데렐라의 진심 어린 눈물의 프러포즈만으로도 닫혀있던 마음의 도로가 그에게로 뻥 뚫렸다.

“막상 시시하면 실망할 거면서.”

“아닌데.”

“내가 시시해지기 싫어서 그래.”

그나마 다행인 건 눈시울을 붉힌 남자의 입가에도 호선이 찾아 왔다는 거였다. 제가 양쪽으로 치켜올린 입매 때문에 웃는지도 모르고, 그의 미소를 반갑게 맞이하는 질래였다.

그러자 은우가 분홍빛으로 물든 말랑말랑한 여자의 볼을 꼬집은 후 이마에 굿나잇 키스를 내렸다.

“감동을 깎아 먹는 재주가 있어, 그 재능 사고 싶다. 절대로 아무도 못 줘. 가질래는.”

너무 진지하게 결의를 다지듯 말하길래 질래는 또 실소가 터졌다. 입술이 잔즐거렸다.

그렇게 매일 밤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 주는 은우 덕분에 질래는 꿀잠을 잘 수 있었다.

오늘도 무사히 잠든 그녀를 지켜본 은데렐라는 그제야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

질래가 어느 날보다도 깊은 수면에 빠진 그 시간 은우는 서재에 앉아서 컴퓨터 화면에 뜬 수많은 메일 중 이미 읽어본 메일을 또다시 클릭했다.

메일을 보자마자 눈동자에 담긴 근심이 입에서 뜨끈한 호흡으로 내뱉어졌다.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은 후 은우는 양손을 머리에 기댄 채 서재 의자를 뒤로 푹 젖혔다.

괴로운 듯 입술을 옥 깨물더니 머리의 얹은 손을 관자놀이로 데려와 꾹꾹 눌렀다.

그의 시선이 떨어진 모니터 속에는 프랑스어로 적힌 메시지와 함께 몽마르뜨 언덕 골목길에서 질래의 원피스를 허리까지 내릴 채 유두를 빨고 있는 모습이 찍혔다.

큰 키로 그녀를 완전히 가렸다고 생각했건만, 질래가 상반신을 탈의한 채 흥분해서 고개를 치켜든 모습이 19금 화보처럼 실려 있었다.

소장용으로는 더없이 예쁜 추억이었으나 생판 모르는 누군가가 이 사진으로 협박해 오고 있으니 은우는 그 해결책을 찾아내야만 했다.

아니, 오히려 이 메일을 받은 후 그의 마음이 더욱더 확고해졌다.

한시가 급해졌다.

입술을 앙다문 은우는 파리 팬미팅 이후 메일을 보낸 사람을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지 수십 번은 더 질문한 후 책상에 놓인 휴대폰을 손안에 쥐었다.

그의 긴 검지가 휴대폰 액정으로 왔다 갔다, 몇 번이고 터치하기를 망설인 끝에 누군가의 이름 옆에 있는 통화 버튼을 꾹 누르는 은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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