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은데렐라의 은밀한 밤
약 1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윤태윤은 수차례 경찰 조사에도 불구하고 구속영장 심사가 미뤄졌다. 차고 넘치는 증거 제출에도 증거 불충분, 도주 우려가 낮다는 등의 이유로 불구속 수사만 계속 이어지자 도리어 역풍을 맞고 말았다. 끝끝내 여론이 들끓은 것이다. 대기업과 검·경찰과의 유착 관계가 여실히 드러나면서 재벌 봐주기식 수사 아니냐, 검·경찰 뇌물 의혹부터 명명백백하게 밝히라며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윤태윤의 엄중 수사를 촉구하는 게시물의 동의자만 200만 명이 넘어섰다.
이는 역대 최고 기록으로, 역시나 성난 민심을 피해 갈 권력은 없었다.
결국, 국민의 염원대로 TY그룹 윤태윤에 대한 구속 영장심사가 이뤄졌고, 한차례 기각 후 사하라 여사에 대한 살인 교사 혐의까지 추가되면서 현재 구속기소 된 상태다.
억지로 정의가 반쯤 실현된 상태랄까.
질래 측에선 고민 끝에 단순 사고처리로 끝난 사하라 여사의 사망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의뢰했고 이를 실행한 공범자들 역시 일망타진됐다.
어쩌다 보니 그토록 싫어했던 사 여사의 억울한 죽음도 풀어준 셈이었다.
재미있는 건 윤태윤이 구속되기 전까지 그 몇 달간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됐다는 거였다.
TY그룹에서는 저들에게 돌려진 화살을 막으려 그간 쥐고 있던 수많은 엠바고를 세상에 공개했다.
악을 악으로 덮겠다는 발악에, 혹 TY그룹의 대표 격인 윤태윤 본부장이 들어갈 경우, 혼자 죽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톱스타 지나로부터 시작된 폭로전은 나비효과처럼 서로가 서로를 물고 할퀴며 절정을 맞이했다.
매일 새로운 뉴스가 쏟아졌다.
-줄곧 결백을 주장하던 배우 겸 가수인 한류스타 백류천 씨가 헤어진 연인의 오피스텔에서 마약을 투약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수차례 불화설을 부인해 왔던 톱스타 손혜미 씨와 손중구 씨가 이혼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는데요.
-성관계 몰카 촬영·유포 혐의로 받고 있는 가수 장준용 씨가 결국 구속됐습니다.
-청렴한 이미지로 평소 정평이 나 있던 방송인 하리 씨가 필로폰 투약 혐의를 인정하면서 루머가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톱스타들의 열애설부터 유명 연예인과 재벌 2?3세들의 마약 스캔들, 지나와 성관계를 맺은 국회의원들의 명단까지, 세간의 충격이 말도 아니었다.
대기업 회장과 재벌 2세들과의 스폰서 관계가 모두 까발려지면서 개망신을 당하니, 대한민국 상위 1%가 그야말로 발칵 뒤집히는 영화 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지나의 성 접대 명단이 공개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는 몇 달간 그렇게 많은 변호사들이 일자리를 얻었다는 후문이었다.
어쨌든 지나 덕분에 태윤에 대한 이슈는 끝없이 떠밀려갔고, 지나와 남 실장도 성매매 알선 혐의와 시신을 훼손, 유기한 혐의 등으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나가 한국 성형외과의 도움으로 예전 얼굴을 거의 회복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대중도 한때는 CF 퀸이었던 그녀의 죄는 미워하되 모든 일을 자백한 용기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자는 쪽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물론 그녀가 지은 죗값은 모두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럼 은우는 어떻게 지내냐고?
말도 마라. 파리에서 먼저 알아본 남자 아니었던가. 떠오르는 신예 스타로 지금 대한민국은 가히 은우 앓이에 놓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 데뷔 1년 만에 광고는 물론, 각종 예능 섭외 1순위에, 모델로서의 입지는 이미 탑을 찍었으니 은우는 천생 연예인 하려고 태어난 팔자 같았다.
사실 온라인 기사 연예 면에 딱히 흥미가 없던 질래였지만 요즘 눈 뜨자마자 은우 기사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은우에겐 비밀이지만 질래는 은우 덕질 중이었다.
어쩜, 어떤 각도에서 찍어도 굴욕 사진 하나 없는지. 그의 기사를 클릭하면 네티즌 모두가 일심동체가 된 듯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칭찬 일색이었다.
<남잔데 사귀고 싶다.>
<얼굴 천재인 줄 알았더니 연기도 천재인 듯.>
<연예인도 쳐다보는 실물 깡패라던데,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나요?>
<얼굴이며 기럭지 봐라, 세상 혼자 사는 듯.>
그도 그럴 것이 주말드라마 ‘그 남자의 불시착’에서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대학 후배로 출연하면서 은우는 현재 국민 연하남으로 브라운관을 접수했다.
조연이었음에도 은우만 나오면 시청률이 상승한다나, 어쨌다나. 실제로 출연 분량도 세 배나 늘었다고 하니 질래는 괜히 죄짓는 기분이었다.
여러 사람을 설레게 하는 이 남자를 그녀는 거의 매일 밤 만나다시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공공재여야만 할 것 같은 은우를 독점 소유한 기분이랄까.
***
밤 11시.
띵동, 띵동. 거실 벨 소리가 울리면 어김없이 TV에서 보던 그 남자가 집으로 들어온다.
드라마 ‘종방연’에 갔다 온다던 은우가 벌써 돌아온 것이다.
“너네 집 두고 왜 일로와?”
“이곳이 내 자리니까.”
그러면서 질래를 끌어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포개며 진심을 담아 꼭 안아 주는 은우 때문에 질래는 매일을 드라마 속 여주인공으로 살고 있었다.
“종방연은 처음 아냐? 좀 더 즐기다 오지 그랬어.”
“누가 날 은데렐라로 만들었는데,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실은 우린 두 집 살림 중이었다. 은우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함께 살 것을 제안했지만 질래는 결혼 전까지 따로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천하의 이은우를 누가 말리랴.
기어이 질래네 옆집으로 이사 와 연예인 이웃사촌을 자처했다.
그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해외, 지방 출장이 아니면 꼭 퇴근 도장을 질래네 집에서 찍으니, 일 년이 넘도록 그의 한결같음에 질래 역시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꿈만 같아.”
누가 보면, 은우 품에 안긴 질래의 멘트 같겠지만 사실상 반백수로 살고 있는 여자를 보고 좋아 죽겠다며, 이곳저곳에 초옥, 초옥 뽀뽀를 내리고 있는 은우의 고백이었다.
“너는 내가 그렇게 좋니?”
“오죽 보고 싶으면 11시까지 달려왔을까. 안 그래?”
동거를 거절했던 질래는 은우가 매일 제집에 드나들자 머물 수 있는 시간을 자정 12시로 제한했다.
12시가 땡 하고 넘어가면 아무리 애원해도 단호하게 그를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그 덕분에 은우는 본의 아니게 제 자신은 은데렐라라고 부르고 있었다.
“가질래 안엔 분명히 계모가 있어, 은데렐라랑 자꾸 갈라놓잖아.”
“다른 공주 찾든가, 그럼.”
단호한 여자의 반응에 은우는 손사래를 치며 다시금 그녀를 꼭 품는다. 킁킁, 킁킁 제가 좋아하는 질래의 체향을 맘껏 음미한 후 동그랗게 말아 올린 여자의 머리 뭉치에 얼굴을 살포시 얹었다.
“그게 아니라, 내일 파리 가니까 그냥 안고 자고 싶어서 그러지. 이제 윤태윤도 구속됐는데, 오랜만에 파리 어때, 같이 갈래?”
톱스타 은우가 나름 고심해서 한 데이트 신청이었지만 마음이 딱딱해진 여자는 고개부터 내저었다.
물론 태윤과의 관계는 깔끔하게 해결됐지만 질래에겐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강화그룹의 모든 지분과 경영권을 내려놓은 지금, 가장 찬란할 줄 알았던 서른넷 인생에 반강제적으로 안식년을 취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와 파리 데이트라니, 싫다.
물론 은우도 질래의 속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매일 밤 남모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자정 12시가 넘어가기 전 매일 밤 질래네 집으로 찾아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지분거리며 사랑을 노래했지만, 질래는 어느 순간만 되면 선을 딱 그었다.
“그만해, 약속 잊었어?”
백만 여심을 흔들면 뭐 하랴. 질래의 한 마디에 천하의 이은우도 깨갱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거늘. 질래와 결혼하기 전까진 절대로 성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서약한 까닭이었다.
함께 씻는 것도 안 되거니와 그토록 예뻐하던 풍만한 가슴도 옷 위로만 만질 수 있었다. 벗겨서 맛본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돼 버렸다.
이미, 다 알아버린 쾌락이어서 그런가, 참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룹 경영에서 물러난 질래는 그야말로 은우를 쥐락펴락, 그를 경영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은우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스킨십인 질래 안기에 충실했다.
물론 그녀를 제 품에 쏙 넣은 채로 소파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은우의 몸은 뜨겁게 반응했다. 늘 잔망스럽게 질래의 몸 어딘가를 푹푹 찌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질래가 원치 않으면 무조건 참는다.
질래가 왜 이런 선택을 내렸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줄래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이후 질래는 겉으로만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갈 뿐, 한동안은 계속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호소했다.
게다가 줄래의 장례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차례의 유산도 겪었다.
아무래도 파리에서 은우의 아이를 임신했던 모양이다.
줄래의 자살 목격, 하루아침에 돌변해 버린 제 위치, 달라진 생활환경까지 이 모든 변화를 한꺼번에 겪은 탓에 극도의 우울증으로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고 넘나들 뻔한 질래였다. 그걸 지켜보는 남자의 마음도 함께 찢어졌다.
그래서 질래는 가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줄래의 빈소에서 본능에 휩쓸려 은우와 키스한 죄.
그것이 혹 우리의 아이를 빼앗아 간 것은 아닐까. 줄래를 기만한 죄로 하늘에서 노한 건 아닌지. 유산의 아픔은 질래에게 크나큰 죄책감이 되어 오랜 기간 그녀의 마음을 옭아맸다.
욕정은 순간이지만 대가는 길었다.
몇 날 며칠, 1년이 넘도록 은우와의 깊은 스킨십을 피하는 이 상황이 지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저를 위해 참고 견디는 이은우. 스타가 된 이후에도 한결같이 제 곁에서 잡아주는 은우를 보며 질래는 죽을힘을 다해 살았다.
은우 역시 질래를 위해 욕구가 팽창해지는 밤이면 제집 방 한 칸에 차린 헬스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한 덕에 몸이 날로, 날로 좋아지고 있으니 배우를 하기엔 더없이 멋진 몸이나 모델로서 런웨이에 서기엔 거대해진 역삼각형 몸매가 슬슬 걱정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죽도록 운동하고도 못 참겠는 날에는 질래를 재운 후 집으로 돌아와 그녀를 떠올리며 혼자 해결한 날도 종종 있었으니, 이건 저만의 은밀한 비밀.
수많은 여자들의 이상형이면 뭐하랴. 결국, 사랑하는 이를 위해 홀로 변기 앞에 무릎 꿇는 톱스타의 초라한 밤 생활이란…. 어쩔 수 없는 은우만의 말 못 할 고난이었다.
그래도 지방이나 해외 스케줄이 아닌 이상 매일 밤 질래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은우에겐 삶의 원동력이자 크나큰 행복이었다.
그녀와의 섹스는 그가 설계한 미래의 사소한 부분에 불과했을 뿐, 은우는 이제 질래와 결혼해서 한 집에서 살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한창 달아올랐던 종방연 현장을 빠져나와 질래를 안기 위해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온 것이다.
주어진 시간은 이제 단 30분.
사랑하는 이를 끌어안은 채로 몸과 마음을 나누는 일. 그게 연예계라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은우의 고된 하루 끝에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낙이기도 했다.
“충전 완료.”
“힘들지 않아?”
“이제 사리가 나오고 있어, 괜찮아.”
“은우야….”
은우는 질래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만 같아서 그녀의 입술에 제 것을 뜨끈하게 채웠다. 윗입술을 진득하게 빨아낸 후 벌어진 틈새로 저를 넣으려 하자 질래가 또 밀어냈다.
그러자 남자는 키스를 포기한 채 여자의 콧등에 제 콧날을 비비어 변치 않는 마음을 전했다.
“나는 가질래밖에 없어, 그니까 이상한 생각도, 이상한 소리도 하지 마.”
“왜 그래야 해? 왜 네가 그렇게 살아야 하냐고.”
“몰라서 물어? 나도….”
“…….”
“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