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담배 피우세요?
뭐? 줄래라고?
왜?
순간 허리가 아니라 다리가 꺾일 뻔했다. 휘청휘청, 세상이 빙빙 돌았다.
안 돼. 지금 쓰러지면 안 돼.
소신이고 나발이고 질래는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인파를 뚫고 창가 쪽으로 주춤주춤 걸어갔다.
경호팀이 다급하게 질래 주변으로 따라붙은 것도 있지만 사람들이 하얗게 질린 질래의 얼굴을 보고 알아서 길을 내주었다.
그토록 싫어하던 동정 어린 시선. 뜨거웠다.
사람들의 눈이 하나같이 저를 보며 ‘불쌍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질래는 지금 그런 실패감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창가에 서서 좁은 창문 사이로 제 작은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동시에 창문을 잡고 있던 한 손이 툭, 허벅지를 스치듯 흘러내렸다.
다리도 결국은 와르르 무너졌다. 잠시 동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땅에 두 무릎을 댄 채로 창가에 기대어 멍하니 있었다.
찰칵, 찰칵. 이 와중에도 제 모습을 찍겠다고 카메라 기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질래. 정신 차려. 내 동생 줄래가 아닐 수도 있어.
질래는 다시금 창틀을 잡고 일어나 경찰차 위에 팔다리가 꼬인 채로 피 흘리고 있는 처참한 여자의 얼굴을 주시했다.
방금 전 원장실에서 본 그 원피스. 겁에 질린 여자의 얼굴. 하나뿐인 나의 동생 줄래야, 너는 왜 거기서 그러고 있니. 응. 줄래야.
그제야 질래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안 돼. 안 돼. 줄래야. 이건 아니야. 안 돼.”
창틀에 힘없이 매달린 손. 무릎을 꿇은 채로 고래고래 울부짖는 질래를 기자들은 그저 찍어댈 뿐이었다.
그래, 이게 조간신문 1면 감이겠구나. 빌어먹을.
이 사진의 타이틀은 뭐라고 박아놓을까.
<강화그룹 장녀, 떨어진 동생 앞에서 오열.>
<한강의 기적을 이룬 강화그룹 오너 일가의 씁쓸한 말로.>
<누가 그녀를 울부짖게 했는가.>
<강화그룹 차녀, 끝내 극단적 선택.>
그들의 머릿속에 이러한 워딩들이 적히는 순간에도 피 흘리는 줄래는 죽어가고 있었다.
왜?
내가 상의도 없이 회사를 통으로 넘겨 버려서.
어차피 줄래가 가진 개인적인 재산은 건드릴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줄래에겐 강화그룹 지분도 없었다.
그런데 왜?
생중계가 되든 말든 질래는 다급히 대기실로 향했다. 휴대폰과 가방을 챙긴 후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흔들리는 손이 정신없이 1층 버튼을 몇 번이고 눌렀지만 어째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질 않았다.
미쳤구나. 문 열림 표시를 누르고 있다니.
뒤늦게 질래를 보좌해 온 법무팀 변호사가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라탔다. 그가 그녀의 떨고 있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내려간다. 문이 열리자마자 눈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들끓었다. 플래시 세례는 이제 아버지의 업보처럼 졸졸 따라왔다.
줄래에게 가는 길이 왜 이토록 멀기만 한 걸까.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언젠간 이 모진 풍파가 지나가면, 식탁에 마주 앉아 이 모든 오해의 성벽을 허물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모든 건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이 안일한 생각일 뿐. 오만이었다.
줄래는 내가 언니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았다.
살아생전에도 마주 앉아 밥 한번 먹기가 그렇게 힘들더니.
드디어 15층에서 내려 보았던 사지가 꺾인, 얼굴 구석구석에서 피를 토해내는 여자를 눈앞에서 마주했다.
경찰차를 산산이 부순 사람, 제가 아는 줄래가 맞았다.
눈이 스르르, 절로 감겼다. 정신을 잃은 듯 눈을 떴을 땐 서울아신병원 VIP 입원실이었다.
“줄래, 줄래는요?”
저를 지키고 있는 법무팀 변호사에게 따지듯 물어봤다.
“돌아가셨습니다. 현재 강북GH병원에서 서울아신병원 영안실로 오고 계십니다.”
질래가 고개를 돌려 베게 쪽으로 얼굴을 묻었다. 축축해진 흰 천이 제 코를 적셔왔다. 들썩이는 어깨를 안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렴 저보다 3살 많은 법무팀 변호사에게 저를 품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들은 줄래가 제 아버지의 만행에 충격받았구나. 집안의 몰락에 극단적 선택까지 했구나. 그리 생각하겠지만 질래는 그 진실을 휴대폰을 꺼낸 후에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죽음 직전에 줄래가 보내온 온 메시지.
[태윤 오빠가 불쌍해. 나도 불쌍해. 절대로 말하지 말아줘. 나는….]
‘나는….’
이 뒤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어째서 죽기 직전에 이런 메시지를 남겼을까. 쓰라린 가슴을 두드리며 줄래의 입장이 되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정답을 모르겠는 그때, 질래의 머릿속에 권 원장이 넘겨준 파일이 떠올랐다.
“제 가방 좀 주시겠어요?”
변호사가 간이 소파에 둔 질래의 가방을 그녀 앞으로 배달해 줬다. 그제야 제 가방 속에 말려 있던 빨란 라벨의 파일을 열어볼 수 있었다.
질래는 그 파일을 확인한 순간.
휘리릭.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변호사가 그 종이를 주우려 하자 질래는 링거가 뽑히든 말든, 냉큼 일어나 그 종이를 먼저 집었다.
질래의 작은 손아귀에서 오랫동안 가정만 회장이 숨겨왔던 진실이 거침없이 구겨졌다.
“혹시 담배 피우세요?”
질래가 법무팀 변호사에게 물었다. 그가 흡연자란 사실을 알고 물은 거였다. 당황한 듯 변호사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평소 술도 잘 안 하던 사람이 담배라니. 얼마나 힘들면 담배 생각이 날까 싶어 그가 제 옷에서 담뱃갑을 꺼내 그녀 앞으로 내미는데 질래가 고개를 힘없이 젓는다.
“아.”
변호사는 자신이 뭔가를 깜빡했다는 듯 그제야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질래의 손바닥에 올려놨다.
“이것만 좀 빌릴게요.”
질래가 구긴 종이와 라이터를 들고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 VIP 전용 흡연실이라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곳에 하필 권 원장이 담배를 피웠다.
“깨어났니? 미안하다. 내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말렸는데.”
질래를 보자마자 권 원장은 사색이 되어 해명부터 늘어놓았다.
“원장님, 금연 한지 꽤 됐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게, 10년 만이네.”
더 이상 어떠한 질문도 필요 없었다. 그 역시 담배를 다시 물만큼 지금의 상황이 괴로우리라.
“저도 한 대만 주시겠어요?”
“질래야! 그러지 마라.”
“아니요, 저 말고 이것 좀 지지게요. 혹시 이거 말고 또 있나요?”
질래가 제 손에 구겨진 종이를 펴서 권 원장에게 보여주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타닥타닥. 돌연 쥐불놀이가 시작됐다.
질래가 종이 끝머리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래, 줄래야 네 유언대로 평생 비밀로 묻을게.’
줄래를 죽인 종이 쪼가리가 서서히 불타올랐다.
그 안에 있던 글씨들도 재가 되어 멀리멀리 날아갔다.
<부 윤태구, 녀 가줄래. >
시험결과 99.999999%.>
쓸데없는 몹쓸 글씨들이 세상에서 사라져 갔다.
질래와 권 원장은 타들어 가는 종이를 말없이 지켜봤다. 마치 지옥 불 같았다.
질래는 하루빨리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정말이지 은우가 보고 싶은 하루였다.
파리에서의 화려한 밤이 그리워지는 초라한 현재였다.
그가 최대한 빨리 날아와 주기만을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원장님, 혼자 있고 싶어서요. 곧 줄래한테 내려가겠습니다.”
“그래, 넌 심호흡부터 하고, 맘 좀 추슬러.”
어깨를 토닥이던 권 원장이 서둘러 문밖으로 발걸음을 틀자 질래는 흡연실 복도 앞에 보이는 장애인 화장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철컥. 문을 잠갔다.
후, 깊은 한숨 끝에 결국 울음이 터졌다.
세면대 물을 틀고 변기 물도 내린 후 꺼이꺼이 세상 서럽게 울고 말았다.
상상도 못 한 그림이었다. 기자 회견 후 병원 화장실에 숨어 홀로 울다니.
환자복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린다. 대체 번호는 어떻게 퍼진 건지 여기저기서 모르는 연락들이 폭주했다.
질래는 전화기를 끄기 직전, 줄래의 흔적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죽기 전 동생이 왜 이런 말을 남겼을까, 싶어.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 떠났을까, 싶어.
메시지 창을 다시 한 번 열어보는데….
[태윤 오빠가 불쌍해. 나도 불쌍해. 절대로 말하지 말아줘. 나는….]
그런데 ‘나는….’이란 글씨 한 참 밑에 그녀가 보내온 메시지가 한 줄이 더 있었다.
커서를 내린 후 질래는 눈을 지그시 감아 버렸다. 어쩌면 이게 줄래가 마지막으로 하고픈 진심인 것만 같아서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두근두근, 심장이 요동쳤다. 크게 숨을 들이켠 후 살며시 눈을 떴다.
타다닥. 손에 들린 휴대폰이 그만 타일 바닥으로 떨어졌다. 액정이 그대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질래는 닫힌 변기 뚜껑 위에 그대로 주저앉아 세면대 거울을 피해 일부러 흰 벽을 응시했다.
가만히 있어도 눈가로 찡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마치 동생 줄래의 영혼을 기리는 참회의 눈물인 듯, 속절없이 울고 있는 질래였다.
***
‘언니가… 부러워.’
줄래가 남긴 이 마지막 메시지가 뇌리에 갇힌 듯 시도 때도 없이 들락날락 방문을 열고 나와 질래를 들쑤셨다. 말이 촉수가 되어 마음에 감긴 듯 쥐어짜는 고통이 질래의 숨통을 졸라맸다.
마음이 모래성 위에 위태위태하게 지어졌나 보다. 스치듯 찰랑대는 작은 바람에도 한도 끝도 없이 휘청휘청 흔들렸다.
화가 났다.
세간의 이목이 뭐라고. 고작 눈치 보느라 장례식장 VIP 홀도 접수하지 못했다. 대신 아무도 안 쓰는 텅 빈 3층에서 제일 큰 빈소를 잡아 줄래의 영정사진을 안치했다.
화려한 걸 참 좋아했던 줄래였는데….
가는 길이 망하기 직전의 가게처럼 파리만 날렸다.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해 사하라 여사만 해도 새빨간 장미꽃으로 도배해서 보내줬건만, 어째서 줄래 넌 저승길마저도 이렇게 운이 없니.
더욱이 가시처럼 쿡쿡 찌르는 현실은 상주는 저 하나.
홀로 장례 절차를 다 밟으려니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다행히도 권 원장님의 도움으로 각종 계약서와 사망 증명서 발급은 수월하게 진행했다.
그러면 뭐하리.
하루가 지나도록 빈소가 텅텅 비다 못해 새집처럼 깔끔했다.
질래, 줄래가 아는 사람은 모두 전장에라도 나간 건지 둘째 날 끝자락에 다다를 때까지 조문객이 거의 전멸 수준이었다.
우리 자매가 인생을 잘못 산 건지, 혹은 테러범 가족과는 숨결조차 섞지 않겠단 건지 빈소는 시베리아 벌판처럼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윤태윤이 비서를 통해 상주를 자처했지만, 당연히 거절했다. 테러 조직 일원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그 역시 언론 앞에 나설 정신이 없을 텐데, 끝까지 가짜 남편 노릇이라도 하겠단다.
거절당할 걸 알면서도 연락해 온 그 용기만큼은 기특했다.
다만 줄래 오빠라는 점. 그 한 가지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질래를 찔러댔다.
동생이 왠지 태윤이를 기다릴 것만 같아서, 차마 오지 말란 소리는 못 한 채 인적이 드문 시간대에 조문 와달라는 메시지만 전달했다.
낮에만 해도 허전한 빈소 밖으로 오지랖 넓은 몇몇 기자들이 죽치고 있었다.
빈집 신세가 된 강화그룹 오너 일가 차녀 빈소에 누가 올까 싶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더니, 이틀째 밤에는 이마저도 사라졌다.
질래는 관계라는 레이스가 참 우스웠다.
오르막길에선 알지도 못하는 사람까지 나와서 그렇게도 열렬히 환영해 주더니 내리막길에선 싹 다 사라졌다.
아직 결승선까지 천 리 길도 더 남았건만, 그 흔하던 날 파리들조차 쳐다보지도 않는 삶이 돼버렸다니.
‘줄래야, 넌 이런 내가 정말로 부럽니? 부러워서 벌준 거야?’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사진 속 줄래를 보며 질래는 또 물었다. 별의별 잡념이 뒤섞여 그녀를 괴롭히던 밤.
어느새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눈꺼풀이 닫힐락 말락 질래의 희미해진 시선 속에도 여전히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장례식장의 풍경. 화환도 별로 없었다.
강화그룹 법무팀, TY그룹 윤태윤, 서울아신병원의 권 원장, 그리고 조문을 못 가서 미안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보내온 GH그룹의 기 회장 화환까지.
그 외에는 일절 없구나 싶던 찰나, 무슨 일인지 이 새벽에 트럭에서 3층 빈소로 근조 화환이 줄줄이 들어왔다.
왜지. 질래가 미간을 구깃구깃 접은 채로 고개를 돌려 갑자기 진열된 꽃길을 주시했다.
얼마나 고퀄리티의 싱싱한 꽃을 쓴 건지, 향긋한 꽃내음이 질래의 후진 생각을 향기롭게 녹였다. 근조화환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웨딩홀에서나 쓸법한 로맨틱한 꽃들이 잔뜩 섞여 누가 누가 더 예쁘나, 화사한 미모를 자랑했다.
질래는 마치 옛 명성이 살아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대체 이 환상 같은 현실을 선물한 사람이 누군가 싶어 보내온 사람의 이름이 확인해 보니 공란이었다.
다만 맨 마지막에 들어온 화환에 조그마한 글씨로 ‘이길래’.
세상에서 사라진 이름, 그 석 자가 질래의 시각에 포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