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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래요-70화 (70/84)

70화. 이은우 종신 보험

이은우 너. 자꾸자꾸 맘 약해지게 흔들래? 은우의 고백에 겨우겨우 거둬낸 눈가가 다시금 습해졌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해지자. 실은 그에게 말하고 싶은 속마음이 있긴 했다.

“네가, 나 때문에 이러면… 음.”

-괜찮으니까 말해봐.

“기 회장님이 날 미워할까 봐 겁나.”

-보고 싶은 거잖아. 안 그래?

“나 때문에 쇼에 못 선 걸 후회할까 봐 겁나.”

-그냥 보고 싶다고 해주라, 응?

‘보고 싶지, 얼마나 보고 싶은데. 혼자 모든 걸 감당할 자신? 없진 않은데…. 두려워.’

그런데 이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은우에게 엄청난 손해가 갈 거란 걸 알기에 질래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이은우라면 당장이고 달려오고도 남을 사람이란 걸 알기에 홀로 고민하고 있던 그때, 은우가 질래 마음 굳히기에 나섰다.

-일 미루는 남자 좀 매력 없는 거 알아. 파리에서 이번 한 번만 무책임한 놈 돼도 좀 봐주라, 이번엔 가질래 책임지게 해 줘.

“내 인생은 내가….”

-같이 책임지자, 우리!

“…….”

그래! 우리.

아니, 실은 나 때문에.

지금 나는 이은우라는 도피처가 필요하니까.

기자 회견 후 홀로 울고 있기보단 차라리 은우와 발가벗고 섹스를 즐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외로운 한숨보다는 차라리 쾌락의 신음을 토하리라.

다 잃어도 한 침대에서 뒹굴 수 있는 은우 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질래는 불현듯 없던 힘이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질래는 테이블 위에 접어둔 기자 회견문을 조심스레 펼쳐봤다.

가방 속에 줄래의 비밀이 담긴 빨간 라벨의 파일이 보였지만 지금은 잠시 외면하고 싶었다.

“은우야 이제 준비할게…. 봐야겠어.”

이 맥락 없는 말까지도 은우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달큼한 남자의 당 충전이 99%에 이른 것이다. 이젠 충전기에서 분리될 시간이었다.

-그래 잘 할 수 있어. 우리 질래. 사랑해!

“고마워 은우야. 끊을게.”

질래는 휴대폰의 통화 종료 버튼을 검지로 재빨리 터치했다. 더 이상 은우와 대화했다간 감정에 휩쓸려 또 눈물샘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파운데이션을 열었다. 퍼프로 눈물 자국을 톡톡 찍어냈다.

제 과거도 이렇게 감쪽같이 덧입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떨리는 손으로 기자 회견문에 쓰여 있는 까마득한 글자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래! 이 흐름대로만 하면 돼. 절대로,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

절망을 말하기엔 든든한 은우 종신 보험이 있잖아?

하지만 그럼에도 한없이 누려온 것을 한순간에 내려놓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아버지 죄로….

생각할수록 억울한 일이긴 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쳐다도 못 볼 재벌가의 삶을 살아봐 놓고도 이런다.

그런 미련 같은 잡념들을 밀어낸 채 사죄의 메시지를 머릿속에 심고 또 심는 질래였다.

***

살아 돌아온 톱스타가 한반도에 떨어뜨린 핵폭탄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정·재계 성 로비 리스트 파문에,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재벌 일가가 테러 사건의 배후였다니. 이제는 지나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터전에 질래가 홀로 서야 할 시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렇게까지 뜨거울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껴봤다.

곳곳에서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마치 채찍질처럼 따가웠다.

질의응답 시간도 아닌데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방금 지나 씨가 밝힌 이야기가 전부 사실입니까?”

“아버지인 가정만 회장이 테러의 주축 세력이었다는 점, 인정하십니까?”

“지나 씨는 가족들은 테러에 관해선 전혀 몰랐다는 입장인데, 정말 몰랐습니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겁니까?”

“그렇게 짜 맞춘 건 아니고요?”

모든 질문들이 어쩜 그리도 날카로운지, 질래의 뼈를 썰었다.

그녀의 입술만 바라보는 수많은 카메라들이 반짝반짝, 그녀에게 귀 기울이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눈앞에 있는 기자들과의 기 싸움이 관건이다.

기자들에게 밀리거나, 혹은 지나처럼 제 페이스대로 리드하거나.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외웠던 내용이 백지처럼 새하얗게 잊혀져 갈 즈음 질래는 은우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흐리멍덩해지는 의식을 붙잡았다.

미지근한 생수로 마른입을 축인 후 꼬들꼬들해진 입매를 쭉 찢어 근육을 풀었다.

덕분에 저를 조롱하듯 쳐다보는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당당한 눈빛을 되찾았다.

‘나는 가질래다. 강화그룹의 가질래… 환난 때에 용기를, 위기 때엔 침착함을.’

주문을 외우듯 제 정체성을 마음속으로 확인한 후 드디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변명 아닌 변명을 시작했다.

“무지도 죕니다. 몰랐다고 누군가가 지은 죄까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먼저 테러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며 큰 충격에 빠져 있을 유가족분들과 부상자분들께 아버지를 대신해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질래가 직각으로 허리를 꺾자 제 앞에 포진된 수많은 카메라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포착했다.

기사에 실릴 만한 사진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천천히 움직여 준 것도 맞지만 질래는 진심을 담아 겸손한 자세로 유족들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사람들 앞에 숙인 상체는 공손했지만, 저를 지탱하고 있는 다리는 한 없이 떨고 있었다.

질래는 다시 정면을 응시한 후 다음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생수로 잔 떨림을 꿀꺽꿀꺽 쓸어냈다.

“저희 강화그룹의 가정만 회장과 TY그룹의 윤태윤 본부장이 함께 연쇄 테러를 자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만큼 저희 일가는 이와 관련된 수사를 철저히 받겠습니다. 또한, 이를 밝힐 증거 자료들 역시 빠짐없이 경찰에 제출하겠습니다. 수사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죄를 밝히겠으며 저 역시 잘못한 점이 있다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겠습니다.”

질래의 긴 이야기 끝에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결국 몰랐다는 겁니까?”

“이제 와 한 발 빼겠다는 겁니까?”

“법에 접촉되는 부분이 없으면 결국 강화그룹 오너 일가 내에선 아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 아닙니까? 모든 책임은 TY그룹 윤태윤 본부장이 지고요.”

결정적인 피의자가 사망한 상황에서 질래와 줄래 자매, 즉 가정만 회장의 측근들은 모두 참고인 조사를 통해 테러 가담 여부를 조사받게 될 것이다.

다만 어떠한 연결고리도 찾아내지 못할 경우, 이 사건은 피의자가 사망함에 따라 강화그룹 오너 일가 내에선 법적으로 책임질 사람이 없는 셈이기도 했다.

물론 윤태윤이 질래의 공식 남편인 만큼 사람들은 강화그룹과 TY그룹을 이미 하나로 엮어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질래가 알고 있는 데이터로는 테러 조직 본체는 터키에 있었고, 그 일에 가담한 한국인은 강화그룹과 TY그룹의 일원과는 무관했다.

다만 기업 자금이 테러에 쓰였는지 여부가 관건이긴 했으나 이 점은 정식 수사를 통해 밝혀낼 부분이기도 했다.

분명한 건 그룹 수장들의 일방적인 범죄였을 뿐 기업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질래는 이조차도 짊어진다.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알았으니 어떠한 방식으로든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번 사안을 몰랐다는 이유로 그 죄를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저희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저를 비롯해 저희 자매는 앞으로 강화그룹 경영에서 일절 물러날 것을 밝힙니다.”

표정은 단호했지만 질래의 눈썹이 한두 번 크게 꿈틀댔다. 타이핑을 하는 기자들의 손이 정신없이 빨라졌다. 일부는 휴대폰을 들어 속보를 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수백 대의 카메라는 단 1분 1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질래의 작은 손동작, 에어컨 바람 따라 흔들리는 머리칼의 방향, 미세한 시선 처리까지도 사정없이 찍어댔다.

번쩍이는 플래시 세례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지만 아직 기자 회견문의 내용이 남아 있었다. 주먹을 꽉 쥔 채로 혼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하이라이트는 지금부터니까.

“저와 제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회사 지분은 넘기겠습니다. 강화그룹은 전문 경영인이 맡을 것이며 회사를 인수인계할 때까지만 저 가질래가 전면에 서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테러 사건은 온전히 저희 아버지 가정만 회장의 개인적인 탐욕에서 시작된 일일 뿐 강화그룹과는 무관한 사건임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피해자분들껜 모두 속죄하는 심정으로 보상하겠습니다.”

강화그룹 장녀 가질래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을 몰랐나 보다. 기자들은 속보 기사를 치면서도 내심 놀라는 눈치였다.

질래의 진심이 적어도 이 현장에선 통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말투에 더욱더 자신감이 붙었다.

“테러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로서,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를 비롯한 강화그룹의 공식 입장이기도 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테러 조직이 모두 척결되길 바라며, 평생에 걸쳐 저희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며 살겠습니다.”

작성해 온 기자 회견문 마지막 문장까지 다 말했다. 손발이 떨려 일부러 깍지도 끼며 굳어가는 몸을 풀었지만, 온몸엔 알 수 없는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이로써 몇 대는 족히 아무 일도 안 해도 먹고살 거라던 대한민국의 재벌계의 한 축. 강화그룹 오너 일가가 오늘을 기점으로 역사 속에 사라질 것이다.

코끝이 찡하고 울컥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밀어내느라 질래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뜨고만 싶었다. 순간이동이 가능하다면 은우 옆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이상입니다. 혹 질문 있으면 강화그룹 법무팀을 통해 서면으로 답하겠습니다.”

질래는 또다시 대중 앞에서 꼿꼿하게 세운 허리를 숙였다. 이제 경호원들의 보호 아래 저 문 끝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여기까지 참 잘했다고 스스로에게 칭찬해주고 싶던 그때였다.

“TY그룹의 윤태윤 본부장이 남편 아닙니까. 그런데 정말 전혀 모르셨다고요?”

예상한 질문이었다. 어떠한 질문도 받지 않기로 했지만 질래는 이 질문만큼은 피해가지 않기로 했다. 문 쪽으로 향해 있던 몸을 틀어 질문한 기자 쪽을 바라봤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저와 TY그룹 윤태윤 본부장은 법적으로 남남입니다. 혼인 신고를 한 적도 없습니다. 과거 집안끼리 약혼식을 올린 적은 있지만, 이번 사태가 불거지기 훨씬 전부터 이미 깨진 사이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윤태윤 본부장도 지은 죗값을 달게 받길 바라며 테러로 인해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번만큼은 법 아래서 진실이 밝히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을 촉구합니다.”

그래. 이제 정말 끝이다. 강화그룹도, 윤태윤과의 악연도 끝.

가서 줄래에게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한 후 가능하다면 집에 돌아가 수면제라도 먹고 몇 시간만 푹 자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후 뒤돌아 기자 회견장을 빠져나가려 했던 찰나였다. 뭐지? 분명히 창밖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는데.

순시에 저만 바라보던 기자들이 창가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웅성대는 소리가 왠지 심상치 않았다.

왜지? 왜 이렇게 내 심장이 뛰는 거지?

불길했다. 희한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자 회견장에 어정쩡하게 서 있기도 뭐했다. 질래는 용기를 내어 대기실 쪽으로 한 발 내딛으려던 순간. 서울 프레스센터 1층에서 지나의 차량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기자들이 이곳에 있는 기자들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다.

가장 먼저 메시지를 확인한 한 기자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강화그룹 차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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