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현재가 미래다
권 원장을 노려보는 줄래의 눈매가 찌를 듯이 날카로워졌다. 벼랑 끝에 몰린 맹수의 포효와도 같은 구슬픈 울부짖음이었다.
덜덜, 덜덜 떨리는 손에서 또다시 파일이 뚝 떨어졌다.
이번에는 질래가 파일을 주워 확인하려던 그때, 질래의 휴대폰이 다급하게 그녀를 찾았다.
지나? 대체 무슨 일이지?
이 또한 왠지 불길했다.
“잠시만요.”
파일을 손에 움켜쥔 질래가 먼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시죠?”
-미안해요! 30분 뒤에 기자 회견 시작합니다. 윤태윤 측이 눈치챈 거 같아서 불시에 선수 치려고요.
젠장. 질래 입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안 되는데. 지나가 먼저 치고 들어가면 안 되는데.
이렇게 되면 지나가 기자 회견을 한 후 바로 강화그룹의 입장을 밝히려 했던 계획이 틀어지는 거였다.
어떡하지.
모든 건 타이밍 싸움이다.
오전에 작성한 입장 발표문이 질래에겐 있긴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줄래에게 아직 이 모든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접견실 천장을 영혼 없이 바라보는, 눈시울이 붉어진 줄래에게 질래가 다가갔다.
“줄래야, 앞으로 우리 앞에 엄청난 변화가 생길 거야. 내가 지금 급히 기자 회견장으로 가야 하거든? 우린 어차피 다 내려놔야 해. 끝나고 다 설명해 줄 테니까 권 원장님이랑 같이 있어. 응? 언니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지?”
줄래는 자신이 가정만 회장의 딸이 아니란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 눈동자의 초점이 아웃된 상태였다. 어차피 강화그룹 지분을 물려받지 못했기에 그녀가 이 사안에 대해 주장할 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줄래는 태윤을 살리기 위해 강화그룹의 정보를 빼돌리려 했다. 더불어서 앞으로 태윤과 제 미래에 대해 가질래에게 선전포고하려 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진실은 뭘까. 종이 쪼가리 하나로 신분이 재정비되는 것일까.
마치 저에게 떨어진 이 모든 저주가 가질래 때문인 것만 같아서 저를 걱정스레 쳐다보는 눈빛도, 언니의 숨소리마저도 정나미가 뚝뚝 떨어질 만큼 가질래의 모든 게 싫었다. 수없이 뒤통수 쳤음에도 여전히 언니 노릇을 하는 가질래가 줄래는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그럼에도 질래는 줄래의 어깨를 단단히 붙든 채로 애원하듯 이야기했다.
“줄래야! 넌 내 동생이야. 아빠가 다르다고 엄마까지 다른 건 아니잖아. 나한테 가족은 너밖에 없어.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꼭 기다려. 언닌 절대로, 네가 잘못되게 내버려 두지 않아.”
“…싫다면?”
“믿어줘…. 믿을게.”
마지막으로 질래는 줄래의 눈을 바라보며 절대로 파기할 수 없는 눈도장을 쾅쾅 찍었다. 그리고선 얼른 기자 회견장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빨간 라벨의 파일을 가방 속에 말아 넣은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원장님, 줄래 좀 부탁할게요.”
“…….”
권 원장은 시선을 외면한 채 깊은 한숨만을 토해냈다.
마음이 찜찜했지만, 상황이 급박한지라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뛰쳐나온 질래였다.
다시 도로 위.
운전 중인 질래가 처음으로 속도위반을 했다.
또다시 낯선 운전대를 잡고 더 낯선 현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기 때문일까. 마치 최후의 심판이라도 기다리는 듯 모든 건 비극을 향해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웬일인지 기자 회견장으로 달려가는 내내 초록불이길래,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마치 운수 좋은 날처럼 말이다.
***
서울 프레스센터 기자 회견장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하긴, 죽은 사람이 돌아왔다.
그것도 얼마 전 의문의 죽음으로 백골화된 시신 아니었던가.
한때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CF를 섭렵하며 톱스타 자리를 지켜왔던 사람이었다.
그 곱디고운 얼굴에 스크래치가 났다는 것만으로도 대중은 술렁였다. 여러 사람의 뮤즈였던 사람의 얼굴에 흉이 졌다는 것만으로도 기자 회견장엔 보이지 않는 묵직한 충격이 넘실댔다.
이를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는 대중은 SNS상에서 지나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됐는지 저들끼리 각종 추측을 쏟아내며 그녀의 입에 주목했다.
늘 대중에게 강렬한 연기를 선사했던 지나답게 기자 회견 첫 포문부터 강렬했다.
스폰서 고백이라니.
지나는 자신에게 성매매를 은근하게 요구하거나 바랐던 정·재계 인사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를 지켜보는 누군가는 벌써부터 벌벌 떨고 있겠지.
무엇이 더 두려울까? 수치스러운 죄로 가정이 깨지는 것? 혹은 이 일로 그간 쌓아왔던 명예를 모두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
경호팀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프레스센터 안으로 진입한 질래 역시 대기실에서 지나의 기자 회견 장면을 지켜봤다.
이 안에서 질래를 보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부러 다 내보냈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사형대에 오르는 순간은 누구의 배웅도 받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조언도, 위로도 구차했다.
질래는 강화그룹 홍보팀에 연락해 미리 작성해둔 보도 자료를 각 언론사에 뿌렸다. 지나의 기자 회견이 끝난 후 서울 프레스센터, 그러니까 같은 장소에서 강화그룹의 입장 발표가 바로 이어진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쯤이면 모든 매체에서 속보 자막을 띄웠으리라.
이제 다시 화면 속의 지나와 마주했다. 그녀는 어떤 표정으로 이 엄청난 비밀을 꺼내놓을까.
역시나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호흡마저도 흡입력이 장난 아니다.
메이크업으로 가리긴 했으나 선명히 보이는 얼굴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마치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호소처럼 지나의 기자 회견은 남달랐다.
마치 눈물을 예상한 듯 그녀 앞에는 갑 티슈가 잔뜩 준비돼 있었다.
질래는 문득 사람들이 화면 속 저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 궁금했다. 분명한 건 지나와는 다른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더 대역 죄인인 것 같을까.
슬슬 질래의 발이 위태롭게 움직였다. 어릴 때부터 하도 복 나간다길래 늘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던 다리였지만, 까닥까닥 박자를 맞추다 못해 덜덜 떨고 있었다. 발밑이 아주 요란했다.
얼굴은 목석처럼 굳었는데 심장은 달달거렸다. 이러다 혹 기자 회견 도중에 실신으로 쓰러지는 건 아닌지, 앞선 우려가 질래를 두렵게 만들었다.
사실 대중에게 감정을 호소하기에 나쁜 그림은 아니었지만 질래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병세로 값싼 동정 따위를 얻고 싶진 않았다.
손에 땀이 차올랐다. 이러한 증세가 시작된 건, 지나가 강화그룹 가정만 회장과 TY그룹 윤태윤 본부장 사이에서 벌어진 테러 정황들을 늘어놓기 시작한 시점 즈음이었던 것 같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감 없는 이야기에 술렁이던 장내는 어느새 고요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강남의 한 클럽에서 시작된 연예계 마약, 성매매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상황에서 지나가 정·재계를 뒤흔들 만한 더 큰 이슈를 갖고 나타났으니 최루탄이라도 터진 듯 사람들의 얼굴도 진실의 깊이만큼이나 일그러져 버렸다.
후,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려 봐도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식은땀이 주르륵, 주르륵, 얼굴이 울긋불긋한 게 난리도 아니었다.
전형적인 교감 신경계가 자극받았을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었다. 그만큼 긴장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럴 땐 어찌해야 좋을까.
이은우, 은우 안정제가 떠올랐다.
질래가 얼른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무음으로 해둔 덕에 전화기가 고요했을 뿐 수십 통의 부재 전화가 질래의 통화목록에 가득 채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중에는 반가운 이름, 이은우도 섞여 있었다. 전화를 못 받았으니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을까?
질래가 이번에는 문자 메시지를 뒤졌다.
역시나 통했다.
진흙 속 진주와도 같은 존재. 은우 이름을 보자마자 질래는 손끝으로 그의 이름을 클릭했다.
[전화 안 받네. 나 무대 끝났어. 언제라도 전화해! 사랑해, 내 새끼.]
풋. 내 새끼란다. 실소와 미소의 중간쯤 되는 웃음이 빳빳해진 잇새로 뜨거운 숨결을 쏟아냈다. 덕분에 굳어 있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30초 전까지만 해도 말 한마디도 못 할 것만 같았던 숨 막히는 공포감이 서서히 사라졌다.
질래는 얼른 은우 이름 옆에 있는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저를 살게 하는 목소리. 당 떨어졌을 땐 스위트한 이은우와의 통화만큼 좋은 충전기가 없었다. 얼른 그가 주는 긍정의 에너지를 받고 싶은 질래였다.
통화연결음마저도 그녀를 다독이는 은우의 잔잔한 위로처럼 들려왔다.
-괜찮아?
은우다.
-남 실장님한테 들었어. 지나, 시작했다고.
“누구 새낀데, 당연히 괜찮지.”
부러, 밝은 톤을 유지했다. 은우에게 제 불완전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역시 가질래야! 내가 존경하는 가질래.
긴장감에 날 서 있던 눈매가 서글서글해졌다. 바닥 저 끝까지 추락한 사람에게 ‘존경’이라니. 단어선정은 매우 부적절했으나 질래를 일으켜 세우는 한마디이기도 했다.
여전히 누군가가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 믿고 지지해 주는 것만으로도 살 이유가 생겼다.
-질래야. 나는 사는 게 좆 같을 때마다 너가 알려준 메시지 덕분에 힘이 났어.
“내가 알려준 메시지?”
고개를 기울인 질래가 눈동자를 위로 굴렀다. 대체 무슨 메시지를 말하는 거지.
-그런 가질래를 닮고 싶었어. 천성이 못돼 처먹었거든, 내가. 가질래랑은 질이 달라.
가질래를 높여 주기 위해서 저를 끌어내리는 남자.
“보고 싶다.”
이런, 질래는 저도 모르게 금기어를 내뱉고 말았다. 스케줄 몇 건이 남아 있는 은우에게 보고 싶다니. 질래가 작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갈게!
“아직 쇼 남았잖아. 그러지 마! 그냥 한 말이야.”
-내가 보고 싶다며. 필요하단 거잖아. 혼자 두고 싶지 않아.
‘맞아, 네가 필요해. 기댈 곳이 필요해. 정말이지 숨이 안 쉬어져. 너한테 안기고 싶어.’
마음은 은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입술은 거짓말로 둘 사이를 유린했다.
“네가 그렇게 오면 내가 불편해. 다 마치고 와. 나는….”
-환난 때 용기를, 따분할 때는 인내를. 위기 때엔 침착함을… 기억나?
“…….”
눈앞에서 저를 지켜보던 거울 속의 가질래가 사라졌다. 기껏 건조시킨 얼굴이 다시 축축하게 젖고 말았다. 기자 회견 전에 절대로 울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이은우, 어떻게 그걸 기억하고 있지.
질래가 어릴 때부터 강화그룹을 짊어지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들어왔던 말이었다.
철의 여인 가질래를 세뇌 시켜왔던 그 메시지.
제 책상에 붙어 있던 명언 쪽지를 은우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눈엔 한없이 여린 소녀였던 가질래가 정말 그렇게 사는 거야.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안 우러러 봐. 생각보다 가질래는….
“은우야, 나는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 아니야.
은우의 뒷말을 가로막은 질래의 정장 바지 위로 뜨끈한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검은 바지에 더 짙은 무늬가 하나둘씩 꽃피웠다.
은우는 저를 대단한 사람으로 포장해 주고 있었지만, 눈가를 훔친 후 대면하게 된 거울 속 제 모습을 질래는 알았다.
전화기에 대고 차마 말하진 못했지만 훌쩍이는 내내 독백처럼 그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이은우….”
-응?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겁쟁이.
생각보다 비겁했어. 고상한 척 남을 속으로 멸시했어. 분에 가득 찬, 가식 덩어리.
나는 봤어. 진짜 내 모습을. 네 덕분에. 포장투성이인 나를 봤어.
전화기 너머로 조용히 울고 있는 여자의 소리가 남자의 가슴을 아리게 했나 보다.
-질래야, 뭐해? 괜찮아? 금방 갈 테니까 우는 모습은 나한테만 보여줘. 그거 나만 알고 싶어.
콧물을 훌쩍이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빨리 눈가를 적신 눈물을 닦아냈다. 휴대폰을 스피커폰으로 켜 둔 후 가방에서 파운데이션을 꺼내 들었다.
“은우야, 쇼는 마치고 와. 너한텐 중요한 기회잖아.”
-아니, 나한테 다른 기회가 왔어.
“다른 기회?”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순간, 안을 수 있는 기회.
“…….”
-그거 놓치고 싶지 않아.
“…….”
멋진 말이긴 했다. 하지만 거사를 앞두고 여자 하나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겠다는 은우가 어리숙하게 느껴졌다.
“네 미래가 달린 일이야.”
-현재가 있어야 미래도 있지, 안 그래?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그렇게….”
-지금 내 현재는 가질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