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판도라의 몹쓸 호기심
가정만 회장 주변으로는 쭉정이 같은 사람밖에 없었다.
쌓아온 부와 명예에 비해 인간관계가 초라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알곡 같은 친구가 되어준 사람. 바로 서울아신병원의 권 원장이었다.
질래가 아버지의 하나뿐인 친구였던 권 원장을 만나러 가는 길.
줄래는 언니가 권 원장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했다.
태윤을 통해서 강화그룹에 지각변동이 생길 거란 건 얼추 짐작했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호기심. 몹쓸 호기심이 발동했다.
권 원장과 언니의 대화를 몰래 엿듣기로 한 것이다.
질래보다 앞서 병원 근처에 있던 줄래는 원장실이 있는 복도 코너에서 질래가 들어가기만을 기다렸다.
분명 둘이 만나면 원장실 안쪽에 있는 접견실로 들어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랬다. 모든 비극은 고약한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질래가 원장실로 들어간 후 권 원장과 함께 접견실로 이동한 사이 줄래 역시 권 원장의 방에 슬금슬금 들어왔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집무실 책상에 앉아 의자를 빙빙 돌려가며 듣고 있음에도 무딘 둘은 도통 눈치채지 못한 채 접견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방문이 열린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대문 격인 집무실 문은 닫혀 있는 상태였고 딱히 누군가가 원장실에 갑자기 들어올 리 없었다.
설마하니 줄래가 들어와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방심한 죄. 그 안일함에 대한 대가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당시에는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그저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질래가 먼저 이야기를 리드해 갔을 뿐, 처음에는 안부 정도 오가는 내용에 불과했다.
“원장님 도움으로 병원에서 잘 나왔습니다.”
“그때는 네가 하도 부탁해서 들어줬다만, 태윤이랑 정말 끝낼 셈이냐?”
“원장님. 내일이면 아시겠지만….”
“네가 그 친구를 오해하는 것 같은데….”
윤태윤, 그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상황은 달라졌다. 그리도 잘 통하던 두 사람 사이에 첨예한 갈등의 골이 깊어지더니 급기야 뾰족뾰족한 말로 서로를 찔렀다.
“저는 경영에서 물러날 생각입니다. 병원은….”
질래의 그 한마디에 권 원장과 줄래의 눈이 동시에 전용면적을 늘렸다. 당황한 권 원장이 질래를 달래듯 다음 말을 이었다.
“내가 너한테 한 번도 잔소리 엇비슷하게도 한 적이 없잖니. 안 그래? 너희 아버지도 그랬고. 넌 항상 잘해왔으니까.”
“…죄송합니다. 이게 최선이라서요.”
역시나 단호했다. 고집 하나는 지독하게도 가정만 회장과 꼭 빼닮았다. 그 점이 질래의 강점이자 약점이기도 했다.
질래는 권 원장의 다음 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시선을 내리깐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그는 탄식 섞인 목소리로 질래를 설득하기에 나섰다.
“이번에 병원에 테러 사건 터졌을 때도 태윤이가 나서서 다 처리해 주더라. 네 남편이잖니!”
“애초에 혼인 신고도 안 해놓고 남편 행세를 했더군요.”
“그건, 널 배려해서지. 솔직히 지금 너한테 가장 필요한 사람은 태윤이다.”
“그 관계 유지할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너는 어쩜, 하!”
마른 찰흙이 갈라지듯 권 원장의 얼굴에 실금이 그득해졌다. 미간에도, 이맛살에도, 팔자주름에도, 제각각 깊이깊이 구불구불한 길을 냈다.
“누가 생겼다더니 정말인 게냐? 회사고 가정이고 다 놓고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더니만, 사실인 게야?”
“윤태윤이 그래요?”
“그러면 안 된다. 질래야. 대체 어떤 놈이 널 이렇게 만든 거니?”
“아니면 줄래인가요?”
웬일인지 권 원장의 눈빛에 실렸던 총기가 점점 옅어졌다. 잠시 고민한 후 입술을 벌려 질래의 물음에 응하는 그였다.
“…태윤이는 너랑 계속, 잘 지내고 싶다고만 얘기하더라.”
“다른 얘기는요?”
“태윤이는 너에 대해선 경솔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어.”
그렇다면 줄래구나.
어느 순간부터 유일한 혈육인 줄래가 제 적군이 되고 만 걸까. 그렇다고 집안의 수치까지 까발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권 원장은 태윤과 줄래의 속 깊은 사정을 모르고 한 소리일 테니 말이다.
그저 줄래를 건드려 놓고 저와 결혼하겠다는 윤태윤의 뻔뻔한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토사물
같은 더러운 기운이 신물처럼 올라왔다. 이 풀리지 않는 시름은 질래를 더더욱 옥죌 뿐이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실 중에 선별하고 선별해서 진실을 고백한다.
“원장님, 저 남자 생긴 거 맞아요. 많이 사랑합니다.”
“…설마 했더니.”
순간 희비가 엇갈렸다. 집무실에 앉아 있던 줄래의 얼굴에 광명이 떠올랐다면 질래와 마주 앉은 권 원장의 얼굴엔 암흑이 번졌다.
“질래야!”
“원장님이 병원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난 그럴 만한….”
“아니요. 지금은 누구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권 원장의 입에서 거센 한숨이 토악질하듯 세어 나왔다. 질래도 제 말이 권 원장을 힘들게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보다 더 좋은 대안도, 최선도 없었다.
“원장님, 이번 한 번만 제 말 좀 들어주시죠.”
“어쩜 너는 네 아비랑, 후….”
“죄송해요. 그런데 몇 가지만 더 여쭤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래! 뭐가 그렇게 궁금하니?”
질래는 먼저 아버지가 몸담고 있던 테러 조직에 대해 떠보았다.
예상과는 달리 권 원장의 눈썹이 고요했다. 아무리 봐도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하나뿐인 친구에게 제 더러운 범죄를 숨겨왔던 것일까.
서울아신병원에 일어난 테러도 가 회장을 죽인 세력들의 경고로만 알고 있을 뿐, 그는 아버지의 절친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생각보다 가정만 회장에 대해 무지했다.
그래서 병원 일을 맡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혹 가 회장처럼 목숨을 잃는 건 아닌지, 노후엔 아내와 봉사활동을 다니며 세계 곳곳을 누비고 싶다는 말만 반복해서 어필했다.
윤태윤이구나. 그 더러운 세 치 혀가 원장님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이젠 어쩌지.
질래도 권 원장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이럴 땐 차라리 화제를 돌려 다른 질문부터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오늘은 은우 엄마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서도 물어볼 작정이었기 때문에 예비 질문은 얼마든지 있었다.
솔직히 단순히 두 번째 부인이라고 하기엔 둘 사이에는 의문점들이 많았다. 재혼해 놓고도 사실상 같이 산 날은 1년 남짓,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사실 정만이가 어릴 때부터 지수를 많이 좋아했어. 지수는 인기가 많았지. 저보다 한참 어린 은철이랑 눈이 맞을지 누가 알았겠어. 어쨌든 지수도 남편 잃고 많이 힘들어하던 중 난소암이란 사실을 알게 된 거야. 그때 정만이가 지수한테 손을 내민 거지.”
사실 질래에게 그리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엄마가 사고로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순간에도 제 어미를 방치했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은우 엄마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니.
하긴, 어린 질래 눈에도 은우 엄마는 청초하면서도 품위 있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은우의 미모 역시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게 분명했다.
그렇게 잠시 질래가 딴생각을 할 동안에도 권 원장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둘은 혼인 신고는 하지 않았어. 다만 그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자기 곁에 있으라고 했겠지. 치료비 지원은 물론 아들 공부까지 다 책임져 준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아들 때문에라도 지수가 정만이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같았어. 은철이랑 가출했을 때부터 사실상 거의 빈털터리로 살았으니까.”
“왜요? GH 쪽을 찾아가야 하는 게 더 상식적이지 않나요?”
“당시 기 회장이 지수를 끔찍이도 싫어했지. 반대하는 결혼, 기어코 하더니 끝내 아들이 죽었잖아.”
질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자 권 원장이 이면에 감춰뒀던 이야기를 끝내 질래에게 털어놨다.
“사실상 손자가 있는지도 몰랐을 거야. 혹 말했어도 당시엔 안 믿었을 거고. 은철이가 죽은 게 정만이랑 지수의 불륜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모든 건 오해라고 했다. 은우 아버지가 죽은 건 불운에 의한 사고였을 뿐, 아버지와는 무관한 일이라며 권 원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기 회장은 철저하게 은우 엄마를 배척했다고 했다.
훗날 꼬여버린 오해의 실타래는 풀었지만, 그때는 이미 은우 엄마가 GH 쪽에 완벽히 돌아선 상태라고 했다.
살아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며…. 이름까지 최윤하로 개명했다고 들었다.
은우 엄마는 난소암 완치 판정을 받은 이후 은우와 함께 질래네 본가에서 나왔지만 결국 암이 재발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저 모든 건 기구한 인연이었다.
제가 지금 그녀의 아들과 사랑에 빠져 있으니 말이다.
다만 권 원장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기막혀할까. 혹 더 깊은 질문을 되로 받을까 봐 질래는 자리를 뜨고 싶어졌다.
냉큼 휴대폰 시계를 확인한 후 권 원장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원장님, 저는 줄래하고 약속이 있어서요, 이만 일어나야 될 것 같은데, 혹시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컵 안에 가득 찬 차 한 모금을 들이킨 후 자리에서 일어서는 질래를 권 원장이 말로 붙들었다.
“질래야. 회사 꼭 지켜야 한다. 가 회장이 왜 줄래한테 회사를 안 주려 했는지 넌 몰라서 그래.”
“왜요? 줄래도 뭐든 야무지게 잘하는 앤데, 자꾸 집에서 애를 억누르니까….”
권 원장이 질래의 말을 부정하듯 축 처진 볼살이 흔들릴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질래보다 먼저 일어나 캐비닛 안에 꼭꼭 숨겨둔 금고에서 두 개의 파일을 꺼내 왔다.
어느새 그 파일이 질래의 손에 들려 있었다. 빨간 라벨과 파란 라벨이 붙어 있는 두 개의 파일. 생각보다 가벼운 게 왠지 더 불안했다.
“이거, 너랑 네 아버지 사이에 평생 비밀인데… 네가 보고 알아서 판단해라. 어차피 때 되면 알려주려고 했어.”
빨간 손, 파란 손도 아니고. 어떠한 파일을 먼저 펼쳐보는 게 저에게 좀 덜 충격적일까.
분명 감당하기 힘든 진실이 이 안에 숨겨 있을 거란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한 권 원장의 얼굴을 응시하자 그가 질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선에 떠밀려 질래는 파란색 라벨이 붙어 있는 첫 번째 파일을 억지로 열어 봤다.
“…….”
대체 이 콩가루 집안의 바닥을 어디까지일까.
질래의 고운 손이 심각할 정도로 달달 떨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지?
<부, 가정만 >
녀, 가줄래.>
아버지와 줄래 사이의 유전자 시험성적서였다. 종이 맨 아래쪽에 기재된 친자 확률은 ‘N’. 즉, 줄래는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란 소리였다.
“줄래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의뢰한 내용이었어. 이게 그 결과였고.”
혹시 이것 때문에 엄마의 죽음을 방치한 걸까? 이 사실을 들켜버려서? 그래서 둘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졌던 거라고?
여러 가능성이 머릿속에 스칠 즈음, 권 원장이 질래의 아득해진 정신을 깨웠다.
“줄래 이름이 왜 가줄래인지 이해가 가니? 어쩌면 이미 알고, 그렇게 지었겠지, 정만이가.”
뭐라고요? 질래는 헛웃음이 터졌다.
“…아버지도 참 유치하시네요. 그럼 이건 뭔가요.”
좀 전에 파란색 라벨의 파일을 열어 봤다면 이제 선택하지 않은 나머지 파일. 빨간색 라벨이 붙어 있는 파일을 제 눈앞에서 흔들었다.
사실 선뜻 열어보기가 겁이 났다. 줄래가 이복동생이라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보든지 말든지, 그건 네 자유다. 정만이가 술자리에서 가끔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너한테 알려주라고는 했어. 마치 언제든 죽을 수 있단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아버지가요?”
질래의 손목에서 맥이 콩콩콩콩, 빠르게 뛰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 듯 그 파일을 조심스레 펼쳐보려던 찰나.
“그건 내가 확인해 볼게.”
가줄래?
열린 문틈 사이로 줄래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접견실 문이 활짝 열렸다.
설마 지금까지의 대화를 모두 엿들은 건가? 질래의 동공과 입술이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퍼졌다. 동시에 힘을 잃은 손끝에선 파일이 펄럭이며 날갯짓하듯 바닥으로 추락했다.
줄래의 등장으로 얼음기둥이 된 권 원장이 얼른 바닥에 떨어진 파일을 주우려는 순간, 줄래의 손이 파일에 먼저 닿았다. 잽싸게 파일을 낚아채더니 주저 없이 열어보는데, 이런. 뭔가 예감이 좋지 않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줄래의 온몸이 파일의 담긴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절대로 봐서는 안 될 내용이라고.
“사실이에요? 원장님, 이거 사실이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