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질래요-67화 (67/84)

67화. 초록불을 기다려

대한민국으로 향하는 길.

긴긴 비행시간 동안 질래는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이 선택이 맞을까 수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았다.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었던 사건의 주인공 지나와의 조우도 황당했지만,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는 더더욱 질래의 마음을 짓뭉개버렸다. 사지가 찢기는 아픔이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난관이었다.

아비의 죄를 몰랐다고 해서 면죄부를 얻을 수 있을까. 혹 연좌제로 훅 묻힐까.

죄지은 오너 일가가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화그룹에서 일하고 있는 죄 없는 수많은 직원들의 생계까지 위협하는 건 안 된다는 게 질래가 내린 결론이었다. 모든 결정에 있어서 최우선시되는 사항이기도 했다.

적어도 질래는 아버지 가정만 회장과는 다른 삶을 선택하고 싶었다.

입국장에 들어서는 길. 질래의 발걸음이 무겁다.

내일 저녁이면 대한민국은 또 한 번 떠들썩해질 것이다. 각 언론사 뉴스 1면엔 무슨 내용이 톱으로 실릴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지나가 폭로한 수많은 비리 중에서 각 언론사들이 알아서 프레임을 정한 후 재편집될 이야기들일 테니 말이다.

다만 한 평생을 강화그룹의 후계자로 알고 살았던 제 정체성이 뿌리째 뽑혀 나갈 미래가 두려울 뿐이었다.

그래서 질래는 전화기를 켰다. 시간을 보니 은우는 쇼 준비에 한창일 시간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애써 전화기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띠링, 띠링, 띠링.

문자가 쏟아졌다. 확인해 보니 캐치콜이었다. 하나같이 입국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건 은우의 흔적들이었다.

바보, 나 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당장이라도 통화 버튼을 누르고 싶었지만 혹 무대를 준비 중인 그가 곤란해질까 봐 또다시 휴대폰 액정의 불빛을 담담하게 끄던 그때, 기적처럼 전화기가 울렸다.

나의 은우. 발신자는 하나뿐인 내 사랑 이은우였다.

분명히 이 시간쯤에 피날레를 장식하는 중요한 무대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 시간에 전화를 건 거지? 질래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드디어 받았네. 잘 내렸어?

“너 무대에 설 시간 아니야?”

-사랑해.

“응?”

-사랑한다고.

전화기 너머로 음악 소리와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백스테이지구나. 순간 요동치는 마음에 울컥, 눈가가 시큰시큰해졌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이러한 위로보다도 그의 사랑 고백이 질래에게 더 큰 힘이 돼 주었다. 그 한 마디가 질래에게 더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은우야 나도 널….”

-가질래, 듣기만 해. 나 곧 무대 들어가야 해.

“…….”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네 옆에 있어. 사랑한다. 가질래.

“…….”

-초옥.

띠띠띠띠.

진한 뽀뽀 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망망대해를 헤쳐 갈 보험 하나를 든 것 같았다.

이은우 종신 보험. 보장 내용은 보나 마나 든든했다. 은우와의 통화 후 질래는 ‘절대로 은우 보험 하나만은 해지하지 않으리’라며 다시금 결심했다.

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가정만 회장이 남긴 한남동 저택으로 가는 길. 오랜만에 찾은 본가였다.

가정만 회장 혼자 살기엔 터무니없이 큰 저택이었다. 독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저택 3층은 사실상 질래만의 공간이었다.

미니 사우나에, 큰 테라스. 영화관까지 혼자 지내기에 부족함 없던, 차고 넘치는 공간이었다.

질래는 오랜만에 찾은 본집에서 간단히 샤워한 후 제가 두고 간 옷 중에 가장 입을 만한 걸 골라 새 단장에 나섰다.

메이크업은 평소보다도 힘을 쫙 뺐다.

마치 전투 전 갑옷을 갈아입는 전사처럼 거울에 비친 질래의 모습은 한없이 비장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증거들을 찾아야 할 때였다.

지나가 세상에 폭로할 내용들이 사실인지, 혹 왜곡된 내용은 없는지 확인 작업이 필요했다.

그게 본집을 찾은 가장 큰 목적이었다.

혹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다 태워 버리라고 했던 금고 안에 단서들. 아무래도 그게 강화그룹 오너 일가를 무너뜨릴 강력한 증거가 될 거란 판단이 확신처럼 밀려왔다.

오랜만에 들어와 봤다. 질래는 지금 거대한 블랙 금고 앞에 서 있다.

매일매일 저택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아줌마조차도 이 금고의 정체를 모를 정도로 꼭꼭 숨겨져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가 회장 집무실 책장 뒷면. 그러니까 비밀의 방 안에 존재하는 금고였다.

‘미안해요, 아빠 편 못 돼줘서. 대신 아빠 딸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볼게, 나.’

질래는 마치 저만의 의식을 치르듯 평생을 강화그룹을 위해 살아왔던 아버지에게 사죄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곤 뭐에 홀린 사람처럼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비밀번호가….’

질래는 아버지가 잘 쓰는 숫자들을 먼저 조합해 보았다.

숫자 8자리. 아버지의 성향대로라면 그에게 의미 있는 사람의 생년월일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통장을 새로 만들 때도 늘 그랬다. 사하라 여사를 세 번째 부인으로 들였을 때도 집안의 모든 비번을 그녀의 생일, 혹은 그 네 자리를 거꾸로 나열한 숫자로 싹 다 바꿔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래는 제 생일과 어머니의 생년월일을 하나씩 입력해 보았다.

삐비빅. 씁쓸했지만 역시나 틀렸다. 그렇다면 역시나 사하라 여사의 생년월일인 걸까?

눈동자가 동시에 하늘로 쏠렸다. 잠시 잊고 있던 사 여사의 생일을 기억해 보았다.

‘아빠보다 열다섯 살 정도 어렸나?’

삐비빅. 이 또한 아니었다. 그런데 사하라 여사의 생년월일이 비밀번호가 아니라는 게 괜스레 안도의 한숨을 불러일으켰다.

찰나 질래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한 가지.

아버지가 술만 취하면 내뱉었던 말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한 마디가 있었다.

-지수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여자야. 그게 나한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이 말을 기억해, 딸아.

혹, 이 말이 굳건하게 닫혀 있는 블랙 금고를 열 행운의 열쇠가 되어주지 않을까.

질래는 얼른 휴대전화의 문자 창을 열었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은우의 상황을 알 수 없어 일단은 참았다. 타닥타닥. 대신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은우야 너희 어머니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니? 왜 필요한지는 나중에 설명할게. 무대 끝나면 답문 부탁해.]

띠링. 전송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은우에게서 답이 왔다.

그 답문에는 그의 어머니의 생년월일과 함께 달달한 이모티콘이 한가득 있었다.

피식, 입매가 들썩였다. 이 와중에도 하트 하나에 웃다니. 이럴 때면 은우가 간절히 보고 싶어진다.

이은우 금단현상. 생각보다 심각했다. 무서운 중독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정신 차려. 가질래.’

마른세수로 은우의 환영을 물리친 후 질래는 그가 보내온 숫자를 토대로 비밀번호를 눌러 보았다. 처음에는 그녀의 생년월일을 똑바로 입력했다.

삐비빅. 역시나 아니었다. 그렇다면 거꾸로 입력해 볼까?

한 자 한 자 틀리지 않도록 정성스레 누르자, 띠리리링, 삑.

철커덩. 금고가 열렸다.

역시! 가정만 회장은 한결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단순한 건지. 질래는 얼른 블랙 금고 안을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권총 한 자루와 각종 서류들, 백과사전 굵기의 뚱뚱한 다이어리, 2G 휴대폰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위 칸에는 예상대로 골드바가 한가득, 자리를 차지했다.

질래는 수북이 쌓여 있는 문서들을 꺼내 사선 방향으로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글씨를 눈에 담을수록 새로운 내용들이 질래의 눈에 포착됐다.

가정만 회장이 우두머리로 있던 테러단체를 설립한 사람은 다름 아닌 TY그룹의 윤태규 회장이었다. 이후 가정만 회장이 이 사실을 알고 윤태규 회장을 압박해왔던 거로 보였다.

하지만 윤태규 회장은 이 테러 조직을 조직한 지 4년 만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보면 질래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셨다던 해와 같은 해였다.

이후 이 조직을 감당할 수 없었던 태윤이 가정만 회장의 도움을 받아 이 세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문득 윤태규 회장이 죽은 건 정말 우연이었을까. 혹 우리 아버지가 테러 현장의 피해자가 된 건 우연이었을까.

질래의 머릿속에 이상한 가정들이 그림처럼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야, 지금은 쓸데없는 상상력은 필요 없어.’

머리를 세게 도리질한 후 아버지의 다이어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메모 하나. <윤태규 약점 = 치욕>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지?

그 밑에는 <공유자: 권형욱>이란 알 수 없는 메모들이 암호처럼 쓰여 있었다.

권형욱. 서울아신병원 권 원장의 이름. 그렇다면 그분은 윤태규 회장의 약점을 아버지와 공유하고 있다는 뜻인 걸까.

질래는 아버지의 2G 휴대전화와 블랙 금고의 자료들을 정리한 후 제 방으로 올라가 내일 저녁에 기자 회견장에서 밝힐 발표문을 작성했다.

법적으로 저촉되는 부분은 없는지 강화그룹 법조팀에게 온라인 회의로 자문을 구하며 함께 대응안을 준비했다.

질래보다 앞서 GH그룹 전용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지나가 내일 저녁 기자 회견을 끝내면 바로 이어 강화그룹의 입장을 발표하기로 입을 맞춘 상황이었다.

여기까지는 모든 준비가 순조로웠다. 물론 마음은 저 바닥, 지옥 불구덩이에서 팔팔 끓고 있을지언정 온라인 회의가 끝날 때까지 저를 걱정하는 직원들에게 내색조차 하지 않은 질래였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은우일까?

그런 기대감도 잠시. 발신자를 확인한 질래의 눈꺼풀이 사정없이 떨려 왔다.

마음이 통한 걸까. 서울아신병원의 권 원장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질래 역시 연락하려던 참이었다. 얼른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가볍게 터치했다.

“여보세요.”

-질래, 돌아왔니? 너한테 꼭 해줘야 할 이야기가 있어.

‘저도 묻고 싶은 게 많아요.’

질래도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혹시 스케줄 괜찮으시면 제가 지금 찾아 봬도 괜찮을까요?”

-오늘은 하루 종일 괜찮아. 질래라면 없던 시간도 내야지.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30~40분만 기다려 주시죠.”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권 원장과의 통화를 끝내자마자 캐치콜 문자가 액정 화면에 보란 듯이 떴다.

이번엔 은우일까? 혹 그가 쇼를 마친 후 전화한 건가 싶어 재빨리 확인해 봤지만, 발신자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계속 제 전화를 피하던 줄래라니. 그녀가 웬일인 걸까.

그렇지 않아도 질래는 권 원장을 만난 후 줄래와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신기하게도 두 사람이 제 마음을 읽은 듯 연달아 연락해 오니 질래의 기분도 묘해졌다.

그룹 지분을 한 푼도 받지 못했음에도 줄래 역시 강화그룹의 공식 차녀였기에 기자 회견 전 사전 동의를 구하려 했건만….

질래는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 있니? 웬일이야?”

-당장 만나.

“당장? 권 원장님하고 약속 있어. 내가 일보고 전화할게. 병원 근처에서 이른 저녁 어때? 한 4시 반쯤.”

-알겠어. 근데 권 원장하고는 무슨 얘기할 건데?

“만나서 얘기해. 장소는 이따 얘기하자.”

뚝!

약속이 성사되자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리는 동생이 야속했다. 언니의 썩어 문드러진 속도 모르고. 어쨌든 질래에겐 이제 정말 내려갈 일만 남았다.

그녀는 기자 회견 문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본 후 본가에 둔 차 키를 챙겨 권 원장에게로 향했다.

오랜만에 잡는 운전대라 그런지 차 안도, 익숙했던 거리도 왠지 모르게 생소하게 느껴졌다.

끼이이익!

젠장. 그 낯섦이 뭐라고 또 두려움을 키웠다. 왜 이렇게 하루 종일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는지.

‘염려가 소신을 흔드는 거야, 선택을 믿자. 옳은 길을 믿자. 가질래.’

이 말만 되뇌며 저를 멈춰 세운 빨간 불이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신호도, 제 인생도 하루속히 초록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질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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