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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래요-66화 (66/84)

66화. 사랑이 뭐길래

그러니까 사흘 전이었다.

질래가 살고자 놓은 덫에 오히려 제 발목을 잘리고 말았다.

은우한테 상간남 소송이라니. 태윤과의 관계를 담판 짓기 위해 그와 만남을 약속한 그날, 설마하니 줄래가 뒤에서 손을 썼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동생이 도청장치로 모든 상황을 염탐했단 사실을 질래는 전혀 몰랐다.

사실 줄래는 그날 독 안에 든 질래에게 태윤이 어찌 나올지 정말로 궁금했다.

솔직히 가질래와 닮은 저 말고는 아무도 품은 적 없던 남자 아닌가. 태윤의 평생의 소원이 가질래 정복하기였거늘 한 번쯤은 눈감아줘도 되지 않을까, 도청장치로 집 안의 상황을 엿들으면서 줄래는 홀로 생각이 많아졌다. 언니가 한 번쯤은 치욕스럽게 짓밟혀지길 원했던 것도 같았다.

-나랑 한 번 자자. 그럼 나도… 평생을 바라봐온 여자, 포기해 볼게.

태윤이 정말 급하긴 했나 보다. 언니한테 저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태윤이 코너에 몰린 질래에게 다가갈수록 줄래는 혼란스러웠다. 진짜 제 마음이 원하는 게 뭔지 남자의 소원 성취가 코앞으로 다가올수록 선명해져 버렸다.

-제발, 건드리지 마! 이것 놔. 놓으란 말이야! 놔아!

줄래의 눈과 귀가 한껏 예민해졌다. 한번 자자는 태윤의 바람이 협박이 될수록 질래는 처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우당탕탕. 대체 얼마나 격하게 몸싸움을 벌이길래 온 집안이 난리 법석인 걸까. 줄래의 양 눈썹이 점점 거리를 좁혀갔다.

“놔! 놔 주세요… 제발! 나를….”

그게 줄래가 들은 가질래의 마지막 목소리다. 언니가 누군가에게 저렇게 애걸복걸하는 건 살면서 처음 들어 본 것 같았다. 죽음 앞에서도 자존심을 선택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통쾌하면서도 이상하게 안쓰러웠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가질래 제국이 하루아침에 불타 버린 심정이랄까.

그런데 언니를 향한 애잔함보다도 줄래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태윤과 언니의 정사를 떠올릴수록 스스로가 돌아버릴 것 같은 이 숨 막힘.

생각만으로도 가슴에 가시가 돋는 듯, 쿡쿡 찌르는 통증에 식은땀이 핏물처럼 흐르는 것만 같았다.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찾는 윤태윤이 과연 가질래를 가진 후에 저를 돌아볼까.

물론 태윤보다 제가 더 더럽게 산 건 사실이었다. 태윤이 무심할 때면 클럽에 가서 아무하고나 잤다. 물론 그 아무나의 기준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적어도 그 클럽에서 가장 외적으로 잘난 놈만 찾아 헤맸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왜 항상 제자리는 윤태윤일까.

왜 윤태윤과 가질래의 조합을 용납할 수가 없을까.

줄래는 차에서 엉덩이를 몇 번이고 들썩였다. 내릴까 말까, 손잡이를 잡았다 놓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태윤이 어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런 애타는 속 때문에 제가 먼저 미치겠다 싶던 찰나. 우당탕, 쾅!

또 한 차례 도청장치에서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가질래를 부르는 태윤의 다급한 목소리가 줄래의 귀에 생생하게 내리꽂혔다.

-앗! 위험해. 하! 진짜 대단한 여자야, 그렇게까지 내가 싫은 건가? 제길. 내 손만 너덜너덜하군.

태윤이었다. 손이 너덜너덜하다니. 혹시 다친 건가?

오디오 드라마처럼 뇌를 자극하는 소리에 별의별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잠시. 이후의 상황은 줄래의 굽이굽이 좁아진 미간을 순시에 평지로 만들었다. 그만큼 줄래를 경악게 했다.

언니가 쓰러진 건지 전담 의료진을 부른 태윤이 그다음으로 연락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저, 가줄래.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언니를 만나겠다며 제집에 오지 말라 했던 사람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제집으로 와 달라니 이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그것도, 가질래가 입을 만한 옷을 챙겨 오란다.

왜? 가질래가 쓰러졌다면 그녀를 가질 절호의 찬스 아닌가. 그런데 왜?

수많은 의문점들이 꿈틀꿈틀, 머릿속에 기생했지만 줄래는 일단 제 차에 있는 여분의 옷을 챙긴 후 태윤의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높은 굽을 신고 뜀박질이란 걸 해보았다.

혹, 그 사이에 태윤이 질래를 범하는 건 아닌지, 몇 분 만에 그의 집에 도착한 줄래는 현관문에 들어선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태윤이 테이블에 부딪혀 쓰러지는 질래를 구하려다 유리 파편에 손이 베인 듯, 피를 뚝뚝 흘렸다. 그 피가 가질래의 옷에도 방울방울 떨어진 상태였다.

더 기막힌 건 줄래를 본 태윤이 서두르듯 그녀에게 부탁한 내용이었다.

“의사 오기 전까지 질래 씨 옷 싹 다 갈아입히고 간호해 줘.”

“뭘 그렇게까지 해? 오빠는.”

“나도 병원 가야지. 손 다쳤잖아.”

“의료진 불렀다며.”

“그냥, 그러고 싶네. 나를 못 믿겠어서. 왠지 나랑 엮이면 안 될 거 같아서.”

저게 무슨 말이지? 가질래가 원치 않으면 손대지 않겠다는 것인가. 줄래는 그의 마음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 키를 들고 정신없이 현관문으로 향하는 남자의 등에 대고 물었다.

“안 해? 이렇게까지 기회를 줬는데 고작 손 때문에? 옷도 내가 갈아입혀야 할 정도로?”

신발을 신던 태윤이 한쪽 신발 끝을 뭉개듯 구겼다. 쥐 잡듯 한쪽 손을 꾹 말아 쥔 채로 잠자코 있던 그가 또렷한 음성으로 침묵을 깼다.

“…두려워.”

“뭐가!”

“아내가 깨어났을 때, 내 실체를 알고 정말 증오하는 눈빛으로 바라볼까 봐. 무섭다고.”

“뭐라고?”

“쓰러질 때 눈빛이 그랬어. 제발 손대지 말아 달라는 그 눈빛. 그게 미치게 아프더라.”

“…….”

“내 죄로 질래가 다치길 원치 않아. 이런 게 사랑이니?”

아내? 사랑? 이게 웬 개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사랑하면 가져야지. 사랑해서 아껴준다는 거야 뭐야.

남자의 무심한 등만 바라보던 여자가 차가운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다. 무너진 몸을 품어준 건 냉기 어린 대리석 바닥뿐. 그때의 치욕을 잊을 수가 없던 줄래였다.

다시 현재로 돌아온 지금, 줄래는 여전히 대리석 바닥에 엎드려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가줄래의 굴욕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카노사의 성문 앞에서 무릎 꿇은 황제와 제가 다를 바 없었다.

다 벗은 탓에 바닥의 찬 기운이 줄래의 옅은 살을 더욱 아리게 파고들었다.

이해할 수 없던 기억의 조각들이 그제야 서서히 맞혀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어.”

이 말만 되뇌며 다시 한 번 가질래에게 크나큰 패배감을 느끼던 그때 태윤에게 문득 궁금한 게 하나 생겼다.

“그럼 나는. 나도 사랑해서 놔준다고 하면 안 돼?”

줄래의 턱 근육이 추위를 이겨내듯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한 손을 꽉 움켜쥔 게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처럼 애처롭게 보였다.

태윤의 입에서 부디 제가 원하는 답이 나오기를. 대리석 위로 조용히 눈물을 쏟아낼 때쯤 드디어 기다리던 남자의 중저음이 들려왔다.

“넌 나랑 엮이는 게 두렵지도 않니? 어떻게 첫 질문이 그럴 수가 있지?”

남은 위스키를 게걸스럽게 줄줄 흘리며 삼키던 태윤이 뒤돌아 덜렁이는 가슴을 흔들며 대리석 바닥에 작은 연못이라도 만들 기세인 나신의 여자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화는 이미 동문서답이 된 지 오래였다.

“왜? 오빠랑 엮이는 걸 두려워야 하는데?”

‘제발, 사랑한다고 해줘, 제발. 사랑한다고 말해줘.’

줄래는 속으로 어찌나 외쳐댔는지, 그 부르짖음은 끝끝내 메아리가 되어 그녀에게 돌아왔다.

“쉼터였어. 너는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마음을 나눈 사람. 막상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니까 그게 예의인지 의리인지, 고마움인지, 도리인지 알 수는 없는데 놔 주고 싶네. 그래야만 될 것 같아서.”

“우정이란 소리야?”

기력이 다 빠진 듯 정제되지 않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줄래가 되물었다. 차라리 이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스스로가 믿고 싶은 대로 믿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과유불급이었다. 대화가 더해질수록 의도치 않은 질펀한 진흙탕 싸움만이 벌어졌다.

“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동생이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래?”

“그걸 변명이라고 해? 사랑? 갖고 싶은 건 어떻게든 갖는 윤태윤이 다 잡아둔 먹이 앞에서 사랑이라고?”

줄래의 그 말이 태윤의 아픈 손가락을 다시 베어낸 모양이다. 남자의 눈썹 끝이 솟구치더니 불시에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었다.

“왜, 나는 그런 사랑 하면 안 되는 인간이야?”

태윤이 일으킨 테러에 줄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분노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이다.

“사랑? 그런 놈이 나랑 자, 나, 가질래 동생이야! 그게 사랑이라고?”

“…그래, 그랬었지. 실수라고 했잖아. 왜 그랬는지 또 듣고 싶어?”

연쇄 폭발이라도 일어나듯 굳은 남자의 얼굴에도 화가 잔뜩 올랐다.

‘아니, 말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말하지 말아줘.’

독기 어린 남자의 눈을 바라보는 줄래의 충혈된 눈이 불시에 투명하게 번졌다. 어쩌면 그녀도 그 이유를 알면서도 놓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귀를 틀어막고 싶지만 남자의 입술을 멈추기엔 너무 늦어 버린 듯했다.

“가질래라고 상상하면서 했어.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여자니까. 나도 남잔데 좋아하는 사람, 안고 싶지 않겠어? 안 그래?”

“넌, 개새끼야.”

남자의 사형선고에 줄래의 이성도 폭발했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얼굴 가득 화가 내렸다.

“너도 알고 있었잖아, 내가 너랑 잔 거, 가질래 닮아서인 거.”

“나쁜 놈아, 거짓말로라도 내가 원하는 한 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 그렇게 힘들어?”

줄래의 모습은 마치 구제역에 걸려 처분당하는 고라니의 마지막 발악처럼 보였다. 가슴을 출렁이며 극도로 흥분한 맨몸의 여자를 보던 태윤의 눈빛에 동정심이 어렸다. 지껄이던 입술도 잠시 휴식기를 가졌다. 딱딱하게 말아 쥔 손 역시 말랑하게 펴졌다.

고민이 됐다. 그녀가 원하는 말을 해줄까, 말까. 그 두 개의 갈림길에서 태윤은 원래 가던 길을 걷기로 했다.

“그래서,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거잖아. 어차피 너도 나 버릴 거 아니야? 내가 먼저 버리면 안 되냐? 좆 같은 자존심 좀 세워주면….”

“내가 언제 버린다고 했어!”

“지나가 살아 있어.”

“뭐?”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슬픔을 담느라 가늘어져 있던 줄래의 눈이 순시에 동그래졌다.

지나가 살아 있다니. 줄래는 이 황당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할 말 잃은 입술만이 서서히 벌어졌다.

“귀국해서 기자 회견 준비 중이래.”

줄래는 남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치매라도 걸린 거야? 왜 그래! 지나는 죽었어.”

“아니! 살아 있다고….”

훅 치고 들어오는 남자의 말에 급소를 맞은 듯 눈앞이 혼미해지던 줄래가 다시 정신줄을 잡았다.

“죽인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근데 그 여자가 살아 있든 말든 그게 오빠랑 무슨 상관인데.”

“하! 죽이려고는 했었지, 먼저 죽어버려서 문제였지만.”

“…….”

줄래는 이 대화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태윤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모르는 게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다. 누군가가 그녀의 환골 뼈를 연이어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무릎이 절로 꿇렸다.

“다 끝났어. GH 쪽에서 그 여자를 보호할 거야. 너도, 나도 다 끝이라고. 가질래도 다.”

“무슨 소리야. 쉽게 말해.”

“이보다 더 쉽게? 어떻게 말해줄까. 테러하다가 테러당했단 소리야. 이해가 가?”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태윤이 미친 거라고 믿고 싶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나란 여자가 핵폭탄급 비밀을 들고 귀국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줄래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한 사람이라도 정신 차려야 한다. 줄래는 그 이성의 끈을 붙잡듯 태윤의 목덜미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넘실대는 가슴이 그의 목울대를 감쌌다. 벗은 탓에 내내 추웠었는데 드디어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쪽. 남자의 입술도 훔쳤다.

“사랑해.”

“뭐?”

예상치 못한 고백에 이맛살에 물음표를 그린 태윤을 줄래가 정면으로 바라봤다.

“내가 윤태윤을 사랑한다고.”

“…….”

“그러니까 다시 시작해. 응? 난 안 떠나. 나랑 시작해. 어?”

“다시 시작할 만한 그런 일이 아니라고.”

철벽을 쌓는 남자의 반응에 줄래의 애원하던 입술이 축 처졌다. 빨개진 토끼 눈이 불안정하게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법적으로 구속되고 그런 사안이야? 살인 미수? 지나가 살아서 도망쳤어?”

아무런 상황을 모르는 여자는 진실의 뒤꿈치에도 못 미치는 소설을 혼자서 창작해냈다. 그 덕에 태윤이 나서서 친절하게 알려줬다. 절대로 일으킬 수 없는 처참하게 무너진 현실을.

“그보다 더 한 일도 저질렀을걸? 네가 수습할 수 있는 그런….”

“도망치자, 나랑.”

누군가가 해줬으면 싶었던, 구원 같은 한 마디였다. 순간 태윤은 줄래의 손길에 무기력해져 버렸다.

줄래가 이번에는 태윤의 윗입술을 물어 빨기 시작했다. 태윤의 잠옷 바지 속에 손을 넣어 풀이 죽은 분신을 주물럭주물럭, 딱딱하게 모양을 빚었다.

술김이라 그런지 얼핏얼핏 가질래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태윤은 끝내 색정에 지고 말았다.

결국, 또 이 여자 안이라니. 가고자 했던 길이 틀어졌다는 자괴감도 잠시였다.

그래!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하는 거야. 가질래도 어린놈이랑 잤잖아. 다, 인과응보야.

태윤은 줄래와의 섹스를 속으로 합리화시켰다.

그 사이 줄래는 태윤을 저처럼 벌거벗긴 후 그의 막대기에 옷을 입힌 채 그대로 제 속에 태윤을 밀어 넣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말로 그렇게 할퀴더니 어느새 격렬한 몸싸움으로 서로를 물고 빨기 시작한 두 사람. 정욕으로 얽힌 둘은 또다시 침대에서 뒹굴고 말았다. 나체로 서로를 품은 채 깊이깊이 잠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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