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공주님은 공주님답게
은우가 제 턱밑에 정수리를 내어준 여자의 어깨를 180도 돌렸다. 불시에 마주친 눈. 그렁그렁, 맑은 샘물이 그녀의 눈매에서 잔잔하게 요동쳤다.
질래는 눈앞이 점점 탁해지는 것 같았다. 세계적인 관광 명소의 야경을 눈앞에 두고도 그녀 역시 이은우밖에 보이지 않았다.
에펠탑을 등진 연인의 입맞춤은 디저트 천국인 파리의 그 어떤 케이크보다도 사랑스러운 맛이었다. 타액이 슈가처럼 서로의 혓바닥에 진득하게 스며든 후 입안에서 뭉근하게 녹았다. 고개를 이리저리 비트는 동안 영혼마저 섞였다.
엎치락뒤치락, 혓바닥끼리 서로의 까끌까끌한 나신을 탐하는 접점만으로도 감춰진 욕망이 충전됐다. 저릿한 전율에 등골이 오싹했다.
예상대로 질래의 탄탄한 배 위로 은우가 자랐다. 선인장처럼 쿡쿡, 제 막대기로 시도 때도 없이 찔러대는 남자가 귀여웠다.
작은 스킨십에도 사랑하는 남자가 하체를 키운다는 건 여자에게 짜릿한 쾌감이었다. 저를 원하는 은우의 끈덕진 정욕이 반가웠다.
“얼른 안고 싶다.”
은우가 낮은 중저음으로 본능을 고백한 후 무언가에 쫓기듯 서두르기 시작했다. 저녁 먹자더니 왠지 또 여자를 자기만의 성에 가둘 것만 같은 남자였다. 그런데 질래가 그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의외로 센 강에 있는 한 선착장이었다.
“혹시 유람선 디너야?”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대체 뭐가 틀리다는 거지?
홀로 되묻던 질래가 잠시 과거 속으로 이동했다. 3년 전 파리 모터쇼 사업차 이곳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함께 고생한 팀원들을 위해 유람선을 대여해 디너파티를 열었던 그날, 파리의 야경은 질래에게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부산했다. 하하, 호호, 웃음이 넘치고 연신 시끌벅적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질래는 지독한 외로움을 홀로 느끼고 있었다.
직원들이 파티를 만족스러워하는지, 다음 일정에 차질이 없는지, 자질구레한 걱정근심에 파리의 야경 따위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모두가 즐거울 때 어린 팀장에게 주어진 막중한 업무는 부담감으로 질래를 옥죄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왕따 시켜야만 했던 질래에게 파리 유람선 투어는 고독 그 자체였다.
결론적으로 프로젝트는 성공했지만 인간 가질래는 없던 그날. 우울한 추억을 이제 깨부술 때가 왔다.
“와!”
웬만한 일로 탄성을 지르지 않는 대한민국 상위 1%의 가질래마저도 인정할만한 호화스러움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래도 몽마르뜨에서 시작된 로맨스 영화는 아직 엔딩 크레딧을 올리지 않은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한 레드카펫이 바닥에 깔렸다. 화려한 조명 아래 그들만을 위한 현악 4중주까지. 크리스탈처럼 영롱한 빛의 향연이 질래를 맞이했다. 마치 프랑스의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레드카펫 끝에는 강 투어에 최적화된 납작한 크루즈가 질래를 기다렸다. 다만 질래가 알고 있는 파리 투어 전용 유람선보다 족히 몇 배는 더 긴, 그야말로 웅장하고도 럭셔리한 리버 크루즈였다.
그 황홀함에 홀려 레드카펫에 한 발 내딛으려 하자 은우가 질래의 손목을 재빨리 낚아챘다.
“잠시만.”
은우가 질래의 등과 무릎에 제 팔을 넣어 번쩍 들었다. 또 안아 든 채로 입장하려는 걸까. 왠지 예측 불가인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질래는 이제 액션 스릴러물보다 흥미진진했다.
역시나 은우가 의외의 곳으로 걸어갔다. 선착장 돌담 위에 질래를 조각상처럼 살포시 앉혔다.
“왜? 저 배 타는 거 아니야?”
“맞아.”
“맞아?”
“공주님은 공주님답게.”
질래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이자 은우는 그녀의 주름진 미간에 한 번, 맑고 고운 손등에 한 번, 차례로 포근한 입술을 내렸다.
“잠시만요, 공주님.”
겸손하게 한쪽 무릎을 낮춘 후 질래의 발이 담긴 단화를 정성스레 벗겨냈다.
“발등도 예뻐서.”
베이지 단화에서 꺼내진 여자의 하얀 발등에 촉촉한 봄비를 내리는 남자. 은우의 입술은 여전히 따뜻했다. 감동의 겨워 눈물을 흘리던 심장이 그의 키스에 빙그레 웃었다.
콩콩, 콩콩. 발등에서 시작된 여진은 끝끝내 가슴에서 쾅, 폭음을 내며 터졌다.
“너는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누가 봐도 질래의 표정은 뾰로통했다. 설레고 좋은데, 왠지 티 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불러낸 거친 말투. 하지만 실수로 낸 불협화음마저도 최고의 화음으로 완성시키는 남자가 악보를 수정했다.
“내 무대 보려고 준비한 구두 맞지? 왠지 레드카펫에선 이게 더 빛날 거 같아서. 다음엔 내가 더 좋은 거로….”
“나 아직 안 망했어. 내가 사도 되는데, 자꾸 주려고 하지 마. 기분이 별로야.”
대답이 왜 삐뚤어지는 걸까. 늘 후원하는 입장에서 막상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계속 받으려니 쓸데없는 자존심이 발동됐다. 어쩌면, 곧 강화그룹 오너 일가가 역사 속에 사라질 위기 앞에 놓였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더 없을지도 모른다. 30여 년도 넘게 살아온 가질래의 모습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은우는 개의치 않았다. 질래의 투명한 발 구석구석을 시원하게 마사지해주는 최상의 서비스로 질래의 꾹 다물린 입술을 양쪽으로 얇게 늘렸다.
질래의 아기자기한 발을 제 무릎에 누인 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문지르듯 압박했다. 그 섬세한 자극에 쌓여 있던 피로도 싹 가시는 듯, 질래의 전신이 노글노글하게 풀렸다.
내내 깐깐하게 타오르던 마음도 스무디처럼 시원하게, 달짝지근하게 부드러워졌다.
“나도 알아, 내가 쳐다도 못 볼 여자였다는 거.”
“…내가 예민했어. 그냥 상황이 역전된 거 같아서.”
“전혀. 지금도 이렇게 우러러보는걸?”
그제야 제 밑에서 발 마사지 후 손수건으로 구두를 닦아내는 한 남자가 보였다. 한 발, 한 발 극진하게 대하며 구두까지 신겨주는 친절한 남자였다. 그러면서도 애정을 갈구하는 듯한 저 강아지 눈빛. 덩치는 산만한 대형견인데 얼굴은 몇 개월도 안 된 풋풋한 강아지였다.
“말했잖아, 평생. 네 거라고.”
어떻게 이런 사람이 내게로 온 걸까. 질래가 제 밑에 있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당신 덕에 레드카펫에 어울리는 품격이 발에 장착됐다는 고마움의 표시였다.
에펠탑보다 더 샤이닝한 구두를 신은 그녀가 은우의 손을 잡고 살며시 돌담에서 내려왔다. 단화를 신고 다닌 덕에 새 구두에 혹사당했던 발도 제법 가뿐해졌다.
“가실까요?”
은우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가 내민 새하얀 손바닥이 절체절명의 순간 다가온 천국행 티켓처럼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손을 잡고 뾰족한 굽을 새빨간 레드카펫에 꽂으며 정박된 크루즈로 향하는 길, 질래는 정말 유명 여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떠오르는 톱모델 은우의 에스코트를 받아서인지 더더욱 어깨에 힘이 실리던 찰나, 뭔가가 이상함을 직감했다.
“설마….”
“응, 우리밖에 안 타. 좋지?”
질래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절로 올라간 손이 조그마한 입술을 가렸다. 한 번도 이런 배를 데이트용으로 빌려봐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은우의 발상에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초호화 크루즈 여행은 몇 차례 해 봤지만, 누군가와 단둘이 이런 배를 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큰 배가 둘 만을 위한 공간이라니, 로맨틱했다. 은우와 마치 신혼여행을 온 것 같았다.
크루즈는 입구부터가 5성급 호텔 수준으로 휘황찬란함을 과시했다. 사파이어로 장식된 블루 샹들리에부터 바닥을 도배한 최고급 대리석까지, 마치 18세기 베르사유 궁전을 모티브 삼은 듯 선박 곳곳에서 고급스러움이 묻어났다.
짧은 기간에 이 모든 걸 어떻게 준비했을까? 의구심이 밀려올 때쯤 은우의 설명이 이어졌다.
“세 번째 무대였나? 누군가가 내 피날레를 인상적이게 봤다고 명함을 줬어. 스위스 사람인데 자기가 리버 크루즈 중 손에 꼽히는 회사 사장이라는 거야. 타고 싶을 때 언제든 연락 주라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연락하게 될 줄은 몰랐네.”
“무료로?”
“가질래 공주님 모시는데 설마 공짜로 했을까.”
GH 일가 사람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순간 의기양양하게 살아왔던 질래가 이은우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산은 오로지 가질래만 오를 수 있단 사실에 바닥으로 꺼졌던 턱을 드높게 쳐들었다. 명품 구두에 걸맞은 위풍당당한 워킹으로 배 안에 입성했다.
오늘만큼은 은우가 차린 상을 마음껏 즐겨보리라.
본격적인 디너 타임을 위해 슬슬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질래를 바라보던 은우의 눈빛이 좀 전에 봤던 스위트 가이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석양에 붉은 기운으로 흐드러진 파리도 잿빛 옷으로 갈아입더니, 은우도 덩달아 흑심을 품었나 보다. 정기 가득 찬 눈빛으로 크루즈 매니저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무언가를 부탁했다. 매니저가 곧바로 야살스러운 미소로 은우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아마도 분위기로 봐서는 야경 투어 디너 시간을 살짝 미룬 듯한데, 왜?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알 수 있었다. 매니저가 다급히 자리를 떠나자 그가 음흉한 기운을 물씬 풍겼다.
“샤워 후 식사 어때? 산뜻하게. 여기 스파 죽인다고 들어서.”
“단지 산뜻하게?”
앙큼했다. 은우가 한쪽 눈썹만 섹시하게 치켜떴다. 그 각진 눈매가 질래를 혼미하게 꾀어냈다.
“아마도 좀, 끈적끈적할 수도 있어. 그래도 마무리는 베이비파우더 향 샤워 코롱으로 뽀송뽀송하게. 어때?”
불현듯 은우가 질래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허리를 숙여 여자의 목선에 제 코를 박은 채 킁킁. 킁킁. 그녀의 체취를 맘껏 음미했다.
“가질래한테 오늘 제대로 사정해보고 싶은데.”
“배 안 고파?”
“고파. 그래서 많이 빨아먹으려고.”
“어, 어딜?”
은우가 질래의 귓바퀴를 빨아낸 후 야성미 가득한 목소리로 얄망궂게 속삭였다.
“몰라서 물어?”
은우의 손이 능구렁이처럼 능글능글, 원피스 앞섶 벌어진 틈새를 파고들었다.
브래지어 속에 감춰진 숫기 없는 유두를 정확히 찾아낸 남자의 손이 정점의 돌기를 세웠다.
이미 매끈한 목덜미도 그에게 내주고 말았다.
은우는 누구보다 질래를 잘 알았다. 어느 곳이 열점인지, 어느 순간 허물어지는지.
도도한 가질래를 색스럽고 되바라진 여자로 만드는 법을 유일하게 아는 남자였다.
그의 기습 애무에 다리가 풀린 여자는 제 뒤에 벽처럼 든든한, 널찍한 남자의 가슴에 스르륵 기댔다.
이제부턴 그에게 모든 걸 맡기겠다는 은밀한 시그널이었다.
여자의 젖꼭지도, 남자의 페니스도 발딱 선 지금 이제 서로가 원하는 건 단 한 가지뿐.
뜨거운 결합.
은우가 박력 있게 여자를 안아 들었다. 언제 들어도 가벼운 제 여인을 안은 채로 크루즈 VIP 고객 전용 스파로 거침없이 직행했다.
도착한 프라이빗 룸은 마치 중세 유럽 시대로 시간을 되돌린 듯한 풍경이었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눈부신 시대를 그대로 재현해 냈다. 바로크 양식. 숭고함과 엔틱함이 물씬 풍기는 게 한마디로 엘레강스의 극치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라도 돼야 할 분위긴데?”
“나보고 루이 16세라도 되라고?”
둘은 한동안 서로를 응시하더니 미간을 구기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은우와 질래의 행동은 어느새 닮아 있었다.
“둘 다 말로가 안 좋아.”
질래가 도리질의 이유를 먼저 밝혔다.
“우린 백년해로해야지.”
은우가 부가 설명을 이었다. 어떠한 말도 늘 A급의 정답을 얘기하는 남자. 심지어는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후 A+급의 대안까지 제시했다.
“이제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