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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래요-58화 (58/84)

58화. 달달한 크레페 키스

아쉬운 마음에 질래는 몽마르뜨 언덕을 바라보며 속으로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던 찰나였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봐.”

“왜?”

은우가 질래를 벤치에 앉힌 후 휴대폰을 꺼내 들고선 골목 귀퉁이로 홀로 가는 게 아닌가.

“금방 올게, 꼼짝 말고 있어.”

“어? 내 구두는….”

혹, 다음 스케줄에 착오라도 생긴 걸까? 아니면 화장실이 급했나?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통화 중이던 은우는 질래의 시선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하필이면 질래의 구두를 들고 가버린 탓에 여자는 벤치 위에 꼼짝달싹 못 하게 됐다.

그래! 언젠간 오겠지. 여유를 갖고 기다려 보자.

질래는 앉은 곳에서 거리를 빙 둘러봤다.

치즈 가게, 크레페 가게, 유기농 식품점까지. 사람도 많고 참,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빨간 풍차, 물랭루즈였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유흥업소라고 해야 할까. 19세기 말에 개장한 카바레로 프렌치 캉캉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곳으로 한때 스트립쇼 공연이 이뤄지기도 했다.

현재는 화려한 쇼를 보러 온 관광객들이 찾는 곳으로 영화 물랭루즈를 가장 좋아했던 사하라 여사가 파리에 오면 꼭 들르곤 했던 곳이기도 했다.

고로 그 이야기를 수십 번이나 들었던 질래가 파리에 오면 절대로 가지 않던 곳이 물랭루즈(Moulin Rouge) 공연장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사하라 여사 얼굴만 떠올려도 눈썹이 부르르 떨리고 꼭 말아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건만, 지금은 저 빨간 풍차의 색감마저 예뻐 보이는 걸 보니 제가 많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있으면서도 없는 척, 저도 모르게 가슴 어딘가에 꼭꼭 숨겨두었던 못난 마음. 미움, 증오, 분노의 응어리들이 은우와 사랑에 빠지면서 더 이상 제 안에서 나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왜일까. 그만큼 마음이 편하다는 뜻일까. 질래는 새삼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대한민국 TOP3 안에 드는 강화그룹 오너 일가면 뭐할까. 질래는 사랑 기피증을, 줄래는 애정 결핍증을 앓았다. 그 흑역사들이 줄곧 두 자매를 졸졸 따라다니며 온전한 삶을 방해했었다. 하지만 질래는 이제 그 족쇄로부터 해방됐음을 확신했다.

줄래도 그럴 수 있을까? 진실한 사랑을 만나게 된다면 지독한 사랑 집착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사념을 곱씹으며 과거를 펼쳐보던 그 시간. 얼마나 지났을까. 저 골목 어귀에서 누가 봐도 모델 같은 완전무흠한 내 남자가 걸어온다. 굽 없는 신발에도 9등신은 족히 돼 보이는 현실감 없는 자태긴 했다.

그의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은우를 쳐다봤다. 이미 스쳐 간 누군가는 가던 길을 멈춘 채 다시금 그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아주 유명한 스타가 아니고서야 프랑스에서 웬만큼 생겨 가지고는 보기 힘든 광경이긴 했다.

사람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사람. 그런 남자가 평생 동안 저만 바라봐준다는 게 얼마나 큰 특권일까.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그 남자가 매직아이처럼 제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제야 그의 손에 들린 각진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핑크색? 혹시 서프라이즈 선물이라고 산 걸까?

“보고 싶었어.”

은우가 돌아왔다. 잠시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늘 보고 싶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

실은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아주, 많이.

질래는 속으로 그에게 화답했다. 아마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 훤히 쓰여 있었으리라.

“그게 뭐야?”

질래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은우가 먼저 선물 박스를 여자 앞에 펼쳐 놨다. 그 안에는 베이지 컬러의 예쁘장한 단화 한 켤레와 질래가 신고 온 하이힐이 함께 들어 있었다.

“키 작은 가질래가 귀엽길래, 이거 신고 다녀. 예쁜 발에 물집 생기면 마음 아플 거 같아서.”

깜빡깜빡, 한쪽 눈을 윙크하면서도 찡긋, 장난스럽게 콧등을 찌푸리는 남자. 저 느끼한 멘트도 적당히 달달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특히나 한쪽 입매를 씰룩이며 앞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면 벅찬 전율이 가슴 속에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일부러 알고 저러나 싶을 만큼, 존재 자체가 설렘인 남자였다.

“너, 정말….”

청초한 느낌의 베이지 톤 단화가 질래 앞에 놓였다.

그 신발을 놓는 남자의 손길이 다정해서 여자의 말문이 꾹 막혔다. 희한하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질래, 왜 항상 말을 하다 말아?”

“별말 아니니까.”

“잘했으면 뽀뽀.”

긴 손가락으로 제 볼을 귀엽게 톡톡 건드리며 볼우물을 만드는데 뽀뽀뿐이랴. 당장이라도 그의 품에 안겨서 나뒹굴고 싶은 건 질래도 마찬가지였다.

살결이 닿을 때마다 으르렁거리며 팽대 강직한 분신을 제 몸에 푹푹 찔러대는 발정 난 수컷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미소년 같은 얼굴이랄까. 특히나 앞머리를 내렸을 때, 그의 해사한 소년미가 더욱 빛을 발했다. 심쿵 포인트 많아서 큰일인 남자였다.

“너, 여자 꼬시려고 태어난 사람 같아.”

“그래서 가질래 꼬셨잖아.”

“여자들이 자꾸 쳐다보더라.”

“남자도 보던데? 하루 이틀인가. 뭘 새삼스럽게. 그래서 불안해?”

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저를 올려다보는 은우가 긴 팔을 뻗어 질래의 말간 얼굴선 끝, 말랑말랑하고 야들야들한 볼살을 엄지 검지로 살짝 집었다. 은우는 제 손에서 탄력 있게 흐드러진 여자의 볼살이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사근사근한 미소가 은우를 빙그레 웃게 했다.

“평생, 가질래만 꼬신다고 맹세한 거, 허투루 들었네.”

“그만 놀려.”

“칫! 안 되겠는데? 내가 좋아서 계속 놀리고 싶은데?”

질투라니…. 너무 귀한 걸 가지면 불안한 마음에 비싼 금고에 몰래 숨겨 두고 싶다더니, 그걸 지금 사람한테 느끼고 있었다. 질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 마음을 들킬까 봐 작은 두 손으로 더 조그마한 얼굴을 폭 덮었다.

“예쁜 얼굴 왜 가려. 가질래 바라기 죽일 셈이야?”

언제 들어도 좋은 장난기 섞인 스윗한 목소리. 은우가 알아서 제 발에 단화를 신겨줬다. 아기자기한 리본도 그 큰손으로 섬세하게 잘도 묶는다. 질래는 가린 손 틈 사이로 은우의 행동 하나하나가 고스란히 다 보였다.

“훔쳐보는 거 다 알아. 근데, 아까부터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

“응?”

“나는 아닌 거 같고, 가질래한테서 들리던데? 꼬르륵, 꼬르륵.”

이런, 딱 걸렸다. 사실 파리로 오는 내내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었다. 빈속으로 하루 종일 보냈으니 허기짐은 당연히 찾아올 손님이었다.

“간단하게 요기 할까?”

질래의 손이 저절로 열렸다. 빨갛게 상기된 볼. 은우 앞에 개봉된 여자의 얼굴은 한없이 수줍었다. 그러면서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먹자는 이야기에 저렇게 해맑아지다니. 은우도 덩달아 표정이 밝아졌다.

가늘게 늘어진 눈매로 남자가 저를 올려다보자 순간 밀려오는 민망함에 질래는 의도치 않게 엉뚱한 곳을 가리켰다.

“나! 저거, 먹어보고 싶었어.”

아까 본 크레페 가게였다. 어떤 커플이 다정하게 크레페를 나눠 먹는 장면을 목격한 탓이라며, 맘에도 없는 소리를 질러버렸다. 문제는 늘 당황할 새도 없이 행동부터 하는 은우였다.

“이따 맛있는 거 먹을 건데, 그래! 그럼 맛만 보지 뭐.”

제 아래서 쇼핑백을 챙기던 은우가 다시 하늘에 닿을 듯 길어졌다. 이번에는 질래 위에서 널찍한 손을 내밀었다. 몇 번이고 잡기를 망설였던 그 희고 긴 고운 손가락. 질래는 이제 그 손을 잡는 데 망설임 따윈 없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제 조그마한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가 여자의 손을 가둔 채로 질래를 끌어 안 듯 일으켰다.

“안고 싶어.”

어느 틈에 질래는 은우의 단단하고도 상냥한 품에 푹 뭉개졌다. 정말 은우에게는 프랑스인의 피라도 흐르는지 스킨십에 거리낌이 없었다. 외모라도 덜 튀든가. 자꾸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기분이었다. 은우가 자신의 화보 속으로 질래를 끌어들인 것이다.

거짓 없는 남녀의 표정 하나하나가 몽마르뜨 거리를 배경으로 한 CF의 한 장면 같았다. 착화감이 좋은 신발 덕에 발도 숨통이 트였는지 콩콩콩콩 가뿐하게 춤을 췄다.

“잘 때 안지?”

“좋으면서 꼭 말을 반대로 하더라.”

“어려워서 좋다며.”

“쉬워져도….”

은우가 질래의 귓바퀴를 덥석 물었다, 놓는다.

“사랑해.”

“…….”

“아주, 많이.”

사르르, 은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질래의 얼굴이 홀로 가을 단풍을 맞이했다. 그러자 그녀를 흡족하게 바라보던 남자가 예쁘게 물든 단풍잎 정수리에 입술을 내렸다. 남자가 여자의 서늘한 손바닥 사이사이를 갈라 뜨거운 깍지를 끼웠다.

“가자, 가질래.”

그가 이끈 곳은 그녀가 지목한 크레페 가게 앞. 밖에서 주문하도록 되어 있는 단출한 가게임에도 사람들이 꽤나 붐볐다. 은우가 메뉴판을 대충 훑더니 밀가루 반죽을 종잇장처럼 얇게 부치고 있는 직원 귓가로 다가가 프랑스어로 몰래 주문했다.

뭘 시킨 거지?

만드는 모양만 봐도 무슨 메뉴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달달함에 끝판왕. 바나나 누텔라 크레페였다.

가게 직원이 정성스레 완성한 크레페가 어느 틈에 은우의 손에 들렸다. 크레페는 혼자 먹기 버거울 만큼 큼직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을 자랑했다.

“하나만 샀어?”

“나눠 먹게, 저녁에 예약한 곳이 있어서.”

“근데 왜 속삭이듯 주문했어?”

“재료 좀 더 넣어달라고 했어, 하나니까.”

질래의 앙증맞은 손을 잡고 아빠처럼 인도하던 은우가 크레페를 그녀의 입가 쪽으로 친절하게 내려줬다.

“먼저 먹어봐.”

바나나와 누텔라의 달큼한 향이 질래의 코끝을 자극했다.

앙! 요조숙녀처럼 예쁘게 한 입 베어 물고 싶었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 법.

누텔라를 누군가가 악마의 크림이라고 했던가. 한 입 베어 먹자, 세상 달달한 크림과 송송 썰린 바나나가 입안에 잔뜩 물렸다. 개중엔 동그랗게 썰린 바나나 반쪽이 입술 사이로 빼꼼히 튀어나왔다.

“나이스 타이밍.”

질래 입에 물린 바나나 반쪽이 은우 입에 덥석 물렸다. 순간 아득해지는 파리 거리. 열기를 품은 그의 날숨이 야릇하게 질래의 얼굴을 달구었다. 서늘한 손이 질래의 볼을 어루만지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싫지 않은 불길함이었다.

“하! 잠깐만, 흐읍.”

뜨끈뜨끈한 온기가 표피에 꾹 닿았다. 달콤한 헤이즐넛 초콜릿 잼과 누텔라 크림을 예고 없이 질래의 입술에서 훑어내는 남자.

“맛집 맞네. 엄청 달다.”

은우가 질래를 안아 든 후 제 옆에 있는 돌담 위에 살며시 앉혔다. 은우의 치골 밑, 그러니까 질래에겐 약간 높은 돌담이었다.

“왜, 왜?”

질래가 놀란 토끼 눈으로 은우를 바라보자 그가 입술을 늘어뜨리며 싱긋, 여심을 흔드는 미소로 여자의 딱딱해진 마음을 녹녹하게 만들었다.

“같이 먹자.”

으읍, 크레페를 한 입 베어 문 은우가 질래 안으로 들어왔다. 바삭하고 고소한 크레페에 초코 잼, 바나나의 부드러운 조화가 입안에서 감미롭게 녹아내렸다. 질래의 보름달처럼 커진 동공이 내리감긴 눈꺼풀에 가려져 파르르 떨렸다.

말랑하고 연한 입술을 사정없이 빨아대면서도 남자의 살덩이가 질래의 입안 여기저기 휘저었다. 달달한 누텔라 크림을 입안 구석구석에 꼼꼼히 발라 줬다. 고개가 엇갈릴수록 맞물림이 야해졌다.

잇새를 오가며 부드럽게 뭉그러지는 바나나의 생생한 촉감. 헐떡이는 숨. 꾸물꾸물 엮이는 혀. 닿는 족족 찌릿찌릿한 게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격렬하게 입술이 뒤엉킬 동안 벌어진 여자의 사타구니 사이. 그의 치골이 질래 속살과 밀접하게 조우했다.

은우가 재빨리 질래의 벌어진 허벅지 위로 재킷을 덮었다.

‘왜?’라는 물음도 잠시. 떨어지려 해도 은우가 그녀의 등을 단단히 감싸 안은 탓에 은밀한 곳 어딘가에 그가 바짝 맞닿아 버린 것이다.

은우의 바지를 뚫을 듯 커져 버린 남성이 질래의 예민한 구슬을 콕콕 찌르다가도 까닥까닥 음부에서 노니니 게 선연하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움칠움칠 반응하던 그때였다.

은우가 보낸 신호에 놀라 남자의 와이셔츠를 꽉 움켜쥔 질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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