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사정, 사정
거리 곳곳은 낭만의 도시답게 예술이 꽃피고 있었다. 누군가는 여유롭게 첼로를 연주했고, 누군가는 마임 공연을, 누군가는 버스킹으로 몽마르뜨 언덕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상적인 무드를 선물했다.
“정말 최고야. 잘 온 것 같아. 너무 좋아 은우야.”
“그래? 솔직히 되게 평범한 거린데?”
“그래서 좋아. 평범해 보여서 좋아.”
초옥. 서로의 손을 끊임없이 꼼지락대던 커플의 입술이 순식간에 맞닿았다. 질래가 까치발로 은우의 얼굴을 감싼 채 입술을 훔친 것이다.
그 덕에 은우의 동공은 확장됐지만 입술만큼은 호선을 그렸다. 여자의 도발이 프랑스의 성지라 불리는 사크레쾨르 성당의 웅장함보다 남자에겐 더 위대한 까닭이었다.
이제 눈앞에 보이는 계단만 오르면 정말 몽마르뜨 언덕의 정상에 다다른다. 파란 하늘 아래 큰 돔을 올려놓은 듯 로마네스크풍의 순백의 파사드가 정말 코앞인 것이다.
그러자 하이힐을 신은 질래가 과감히 신발을 벗었다. 지인을 통해 어렵게 구한 명품 구두에서 내려오니 그녀의 키가 더 작아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여자의 손을 제 가슴 위로 갖다 댔다.
쿵쿵쿵쿵, 손바닥 밑으로 심장이 뛰었다.
“질래야.”
“응?”
“너무 귀여워서 설렜어, 방금. 느껴져?”
그의 심장도 저만큼이나 세게 뛰고 있었다. 아무래도 둘 다 부정맥이 의심될 지경이었다. 그저 남자를 올려다봤을 뿐인데 왜 이리도 설레는지. 혈류가 전신을 날쌔게 휘젓는 듯, 맥박이 빨라졌다.
“가질래, 오늘 이은우 인생에 최고의 런웨이를 걸어보려고 하는데. 함께할래?”
은우는 몽마르뜨 언덕 꼭대기가 눈앞에 보이자 한 가지를 마음속으로 결단했다. 왠지 성당 앞이라 저 하늘 꼭대기에서 신이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맹세하듯 그 결단을 질래에게 전했다.
이제 은우의 말이라면 고개가 자동으로 끄덕여지는 여자가 됐다. 신중함의 대명사였던, 목이 빳빳하기로 유명했던 가질래가 너무너무 쉬워진 것이다.
단지 질래는 은우의 말에 동의했을 뿐인데 불시에 제 손에 들린 구두를 빼앗겼다. 그리곤 그의 품속으로 번쩍 쳐들렸다. 은우가 제 고개 밑에 위치하는 마법이 펼쳐진 것이다.
저보다 훨씬 큰 은우 위에 올라가 보니 질래는 세상이 달리 보였다. 아직 언덕 꼭대기에 이르지도 않았건만, 파리가 제 아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설마 이대로 계단을 오르려는 걸까. 은우도 은우지만 질래에게도 그리 편한 자세는 아니었다. 이 계단이 그가 말한 최고의 런웨인가 싶어 말리려던 그때였다.
“나한테 매달려, 코알라처럼.”
은우가 질래의 마음을 읽었는지 대안을 제시했다.
“나, 원피스….”
“재킷으로 덮어줄게. 내가 계단 오를 동안, 파리가 얼마나 예쁜지 잘 감상하고 있어.”
“혼자?”
남자가 고개를 가로로 휙휙 내저었다.
“아니, 무대 끝에선 같이 보자.”
“힘들지 않겠… 어머.”
질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우가 그녀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소중하게 떠받들었다.
그러자 여자의 다리가 알아서 그의 허리에 똬리를 틀었다. 팔은 그의 목에 비단뱀처럼 둘러졌다. 동시에 은우의 재킷이 그녀의 어깨에 걸쳐졌다. 워낙 장신의 남자라서 그의 재킷만으로도 질래의 허벅지가 넉넉하게 가려졌다. 그야말로 가질래에게 맞춰진 최상의 인간 마차가 완성된 것이다.
“간다.”
은우가 출발 신호를 외쳤다. 긴 다리로 한 계단 한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서는데 표정은 어느 무대를 섰을 때보다도 비장했다. 온몸엔 기름기 뺀 듯 거추장스러운 몸동작을 최소화했다. 오직 가질래만이 편안할 수 있도록. 은우는 몽마르뜨 언덕에 생긴 투명한 런웨이에서 그녀만을 위한 워킹을 내디딘 것이다.
사람들이 수근대며 쳐다봤다. 혼자 오르기도 벅찬 계단을 남녀가 엉키어 올라가는 희귀한 퍼포먼스가 신기해서 혹은 이 괴기한 커플이 너무 예뻐 보여서.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우, 질래 커플을 응시했다. 누군가는 그들을 응원했다.
정말 파리지엥스러운 한 편의 로맨스 드라마가 따로 없었다. 그들이 오르는 길 양옆으로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게 뭐라고, 몽마르뜨 언덕을 순시에 런웨이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자 이은우. 그는 그녀를 품은 채로 보이지 않는 저만의 특별한 런웨이를 멋지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어느새 몽마르뜨 언덕 꼭대기인 사크레쾨르 성당 앞에선 두 사람. 은우는 질래를 한 벤치에 살며시 앉혔다.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작고 아리따운 발에 그녀의 구두를 손수 신겨줬다. 그 덕분에 질래는 마치 몽마르뜨의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다.
“알아? 발도 예쁜 거.”
‘알아? 너 때문에 설레 죽겠는 거?’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질래만의 고백이 그와 남몰래 대화 중이었다. 은우는 질래에게 구두를 신긴 후 한쪽 무릎을 여전히 낮춘 채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곤 질래의 손등에 아롱진 하트를 새겼다. 고흐, 느와르, 로트렉, 위틀리 수많은 미술가들의 혼이 거쳐 간 몽마르뜨 언덕에서 그녀의 가녀린 손에 은우가 입술로 명화를 그려냈다.
“파리 좋지?”
“응.”
‘네가 있어서 좋아.’
질래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은우가 알겠다는 듯 낭요한 미소로 그녀에게 낫낫하게 물어왔다.
“같이 볼래?”
“응. 같이 볼래.”
질래가 고개를 주억이며 일어서려고 하자 은우가 그녀를 순식간에 들어 아기처럼 제 품에 가두었다.
“어머! 나 발 괜찮아.”
“아니, 내 뒷말은 듣지도 않고 분명히 ‘응’이라고 해서. 물리기 없기다?”
은우가 성당 정 가운데, 그러니까 파리에서도 가장 높다는 몽마르뜨 언덕 정상 정중앙에서 질래를 안아 든 채로 하나의 조각품처럼 경건하게 서 있었다.
“봐봐! 예쁘지.”
실제로 그랬다. 푸른 하늘. 날이 좋아서 파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두근두근, 말로 다 할 수 없는 전율이 두 사람의 심장을 강타했다. 뜨거운 감동이 온몸에 번지는 듯, 은우와 완벽하게 마음이 통하던 그 순간 기막히게 일몰이 시작됐다.
파란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시간.
그 기적 같은 찰나에 은우는 질래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리곤 나란히 선 채로 그녀의 손을 제 안에 담았다. 파리 시내 전경을 마치 주례자로 세운 후 은우는 앞전에 다 하지 못한 고백을 이어갔다.
“평생.”
“평생?”
“뭐든… 같이 보자.”
질래의 이마에 초오옥, 남자의 따스한 온기가 내려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
“내가 다 지고 갈게.”
“…….”
“평생….”
“…….”
“가질래를 갖게 해줘.”
***
뭐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뚝, 호흡마저 끊겼다. 목이 콱 메여왔다.
귓가에서 찌릿찌릿하게 퍼져나간 소름이란 게 파리의 비경 대신 더 아리따운 남자를 그저 관망케 했다. 심장에서 피어오른 뭉클한 덩어리가 전신을 뒤흔들었다.
평생 나를 지고 가겠다는 남자.
그래서 저를 안고 계단에 올라갔던 걸까?
늘 슬프란 법은 없나 보다. 비록 테러범의 딸이 됐을지언정, 제 옆에는 마치 보상 같은 더 큰 축복이 함께 있었다.
가슴을 떨게 만드는 날렵한 턱선의 남자가 저를 내려다본다. 그 뜨거운 시선은 진즉에 입술에 떨어져 있었다.
답변할 차례구나.
그래서 내 대답은. 음….
“오늘 밤 사정하는 거 봐서.”
“와, 얼마나 사정해야 하는 되는데?”
“미술관에서 아쉬웠던 만큼?”
해넘이, 잔양에 반사된 여자의 붉은 얼굴이 그 한마디에 야하게 물들었다. 은우는 질래의 뒤에 서서 그녀의 보들보들한 어깨를 제 팔로 둘른 후 꼭 안았다.
“주겠단 뜻이네?”
“아닌데?”
“가질래한테 사정, 사정해보지 뭐.”
은우가 허리를 굽혀 질래의 매끈둥한 볼에 제 볼을 살살 비비듯 마찰시켰다. 여자의 볼은 보드라웠다.
이런 제기랄. 살이 맞닿았을 뿐인데 묻어 둔 탐욕 덩어리가 하체에서 불끈불끈 반응해 왔다. 은우는 미술관에서 못다 한 사정의 역사를 그녀와 파리 곳곳에 남기고 싶었다. 그녀 속에 저로 꽉 채우고 아무도 넘볼 수 없도록 영원히 제 것이라며, 쾅쾅 도장 찍고 싶었다. 그래서 질래의 반짝이는 반달눈을 느른하게 주시했다.
“석양 색 와인 한잔 어때?”
“좋아!”
“그럼 갈까?”
“내려갈 땐 케이블 카 타지, 그래?”
은우가 질래의 제안에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더니 계단 쪽으로 발을 내딛으려 하는 그녀 앞에 한껏 자세를 낮추는 게 아닌가. 뒤로 길게 뻗은 팔이 업히라며 그녀에게 손짓해 왔다.
“그러게 편한 신발부터 사줬어야 했는데, 자! 업혀봐.”
“…그냥 케이블 카 타지?”
“가질래, 잘 지고 가나 못 지고 가나, 간 보라고.”
피식. 입가에서 헛웃음이 돌았다. 빼 봐야 답도 없는 시름이었다. 어차피 거절해도 기어이 업고 갈 남자란 걸 이젠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타자! 은우의 넉넉한 재킷이 마법의 망토가 되어 줄 테니, 말려 올라가는 원피스 걱정 따윈 잠시 접어두자. 기왕 이렇게 된 거, 아무나 기댈 수 없는 그의 등을 맘껏 누려보자.
질래는 남자의 뜨끈하고 널찍한 등에 제 몸을 맡겼다. 덕분에 여자의 풍요로운 가슴이 은우의 등에서 젤리처럼 흐뭇하게 푸졌다. 여자의 동그란 엉덩이를 받힌 남자의 손엔 질래의 구두가 가지런히 들려 있었다.
누가 봐도 예쁜 커플이었다. 파리 시내를 붉게 덧입힌 낙양은 질래를 업고 가는 은우의 발걸음을 더욱 로맨틱하게 만들었다. 한 점의 파스텔화처럼 모든 게 완벽했다. 이보다 더 완전무결한 순간은 없을 정도로 질래의 얼굴엔 희락이 넘쳐흘렀다.
“어떻게 매 순간순간이 최고일 수가 있지?”
“거봐, 나랑 있으면 매일이 좋은 날이야. 그니까 평생 나랑 놀아.”
“10년 후에도 이럴까?”
질래는 저 때문에 값진 이슬을 흘리고 있는 남자의 이마를 소매로 정성스레 쓸어주었다. 잠시 드러난 반질반질한 이마에서 은우의 체향이 풍겨왔다. 올백 스타일마저도 잘 어울리는 근사한 두상을 가진 내 남자 이은우. 그는 질래의 물음에 10년 후를 떠올리는 듯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살아봐, 그래야 알지.”
“…정답이네.”
시원하게 웃고 있는 은우의 희고 고운 옆선을 보며 질래의 발그레한 볼도 빙긋, 수줍게 상승했다.
지인들은 막상 와보고선 실망했다던 이 몽마르뜨 언덕이 질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장소가 됐다. 거리의 악취마저도 은우가 중화시켜 주는 듯, 콩깍지는 눈에만 씐 게 아니었다. 그렇게 질래가 히죽일 동안 은우의 발걸음은 어느새 몽마르뜨 언덕에서 내려와 소소한 가게로 즐비한 거리에 닿아 있었다.
‘굿바이 몽마르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