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몽마르뜨의 신데렐라
안다. 20대 때 죽니 사니 요란스럽게 헤어졌던 주변 친구들, 지금 다른 사람 만나서 잘만 산다.
제게 감동을 준 은우의 한마디. 아마도 순간의 감정일 것이다. 흘러갈 진심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폭우가 걷혔다. 눈앞은 여전히 암흑이었지만 어느새 그의 품에 있었다. 따뜻한 심장박동이 질래의 마음에 얼어 있던 두려움을 녹였다. 미안했다. 은우의 마음을 기어이 후비어파고 나서야 평화를 되찾다니.
아무래도 오늘은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인가 보다. 질래가 울음을 그치자 하늘에서 무언가가 뚝뚝 그녀의 정수리를 적셔왔다. 가질래 없는 삶이 가장 두렵다는 한 남자의 진심이 질래의 굳은 마음을 완전히 누그러뜨렸다.
“은우야, 파리 데이트 언제 해? 나 내일 지나 씨랑 떠나야 되는데.”
은우를 달래줄 묘안을 떠올린다는 게 딱 이정도 멘트였다. 은우가 가장 원하고 있는 게 뭘까, 고민한 결과였다.
“어! 그럴까? 그렇지 않아도 오늘 밤 죽이는데 예약했는데.”
차분한 척, 싱겁게 답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그래? 나 웬만한 호텔 다 가봤는데, 만족시킬 자신 있어?”
“역시 내 여자 친구는 어려워. 그래서 더 좋아.”
남자 품에 있던 여자가 드디어 그를 부드러운 눈매로 응시했다.
방금 전 이별을 고했던 커플이 맞나 싶을 만큼 금세 화합을 이뤘다.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예상대로 은우의 눈가는 꽤나 범람해 있었다. 그마저도 TV 광고가 되는 내 남자, 이은우. 이 모성애를 자극하는 눈빛이 한없이 사랑스럽다. 끝도 없이 사랑해주고픈 남자였다.
“이은우, 울었네!”
“아닌데?”
“울었는데?”
“아닌데.”
“여기 갑갑해. 탈출하자.”
초록색이었다. 은우가 가리킨 비상구 표시 모양의 그림은, 그린라이트.
질래가 그의 제안에 동의한다는 듯 가슴팍서 비비적비비적 얼굴을 주억였다. 그의 체취를 맘껏 음미할 수 있는 부대낌이었다. 혹 하얀 와이셔츠에 질래의 메이크업이 묻는 부작용이 있긴 했으나, 이정도는 사랑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은 손을 꼭 잡은 채로 비상계단에서 뛰쳐나왔다.
다시 세상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들었다.
질래가 사람들을 의식해 손을 빼내려 하자 은우가 그 작은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을 끼운 후 꽉 오므렸다.
“그냥 가, 한국 가면 아무도 못 알아볼 텐데.”
“기사 제법 나갔을 텐데, 이은우가 손해지 뭐. 나중에 나 원망하지 마.”
실은 질래도 마치 자물쇠처럼 그에게 꼭 채워진 손을 다시는 빼고 싶지 않았다.
“그냥 간다…. 괜찮지?”
은우의 물음에 질래가 포근한 눈빛, 영롱한 미소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은우가 냅다 뛰기 시작했다. 왜 뛰어야 하는지 이유 따윈 없었다.
그냥 모든 과거로부터의 자유, 혹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투쟁이었다.
우린 숨을 헐떡거릴 만큼 파리 한복판을 질주했다.
단연코 은밀하게 섹스할 때보다 더 숨차고, 더 벅찬 뜀박질이었다.
태양 아래 반짝이는 강물과 로맨틱한 다리가 장관인 햇살 좋은 어느 날, 센 강을 낀 파리에서. 은우는 가질래와 함께 맘껏 뛰었다.
***
은우는 제 손을 잡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한 여자를 보며 깨달은 게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옴으로써 그가 파리에서의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
만약에 그새를 못 참고 한국에 달려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사랑을 하며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 결국 어느 한쪽의 희생이 있어야 유지될 수 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지금 잡고 있는 이 사람의 손이 더없이 소중한 까닭이었다.
저의 일상을 버리고 나의 일상으로 들어온 여자.
그런 가질래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질래의 입가에선 싱그러운 미소가 절로 흘렀다. 완전히 빠졌다, 이 남자. 앞을 보고 걸어야 하는데 자꾸 시선이 제가 있는 아래로 향한다.
실은 저를 보고 있는 거란 걸 질래도 알고 있었다. 그 후끈한 시선을 못내 모르는 척했지만 그런 저를 부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총을 응원 삼아 뻔뻔함을 얼굴에 덕지덕지 발랐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와이셔츠를 제 눈물로 세탁한 탓에 메이크업도 거의 지워진 상태긴 했다. 그럼에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손을 잡고 다닌다는 것. 그것도 이은우 정도의 남자라면 민낯의 수치가 드러난다 해도 자존감 하나는 우주 최강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됐다. 그의 손을 잡고 행복한 착각에 빠져 있던 그때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질래를 깨웠다.
“우리 질래, 어디로 데려갈까?”
“아까 어디 예약했다며, 다 생각해 둔 거 아니었어?”
“음, 몽마르뜨 언덕, 베르사유의 궁전, 둘 중에 어딜 더 가보고 싶어?”
“음, 몽마르뜨 언덕?”
“그래, 나도 거기가 더 좋아.”
질래가 몽마르뜨 언덕을 선택한 데는 별다른 뜻은 없었다. 베르사유 궁전은 두 차례나 가봤고 몽마르뜨는 한 번도 자세히 들여다본 기억이 없다. 프랑스에 와서도 본능적으로 화려한 왕실 문화유산만 찾아 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첫 데이트로는 왕실 문화탐방보다는 그냥 거리 데이트가 하고 싶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은우와 함께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지하철 탈래?”
다정한 눈빛으로 은우가 물어왔다.
“지하철?”
질래의 목소리 톤이 한층 더 높아졌다. 질래가 밝아진 얼굴로 조급하게 고개를 끄덕일 만큼 은우가 제시한 교통편이 마음에 들었다. 은우에겐 익숙한 일상이었지만 질래에게 지하철은 낯선 교통수단이긴 했다.
지하철을 탄다는 게 이렇게까지 가슴 뛰는 일이었다니. 질래의 온몸이 뜨겁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은 발걸음이 평소보다도 경쾌해졌다.
입구부터 지하철 안까지 누추해 보이는 공간이 모두 그녀에게는 신세계였다. 한국과 달리 파리의 지하철은 2인석으로 자리가 많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행운의 여신이 이 커플을 졸졸 따라다니는 듯 극적으로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질래는 의자에 앉자마자 그의 곁에 바짝 붙어 남자의 드넓은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 희한하게 그 밀접한 스킨십만으로도 온몸이 예민해졌다. 한 손으로 끊임없이 제 손을 살갑게 만지작거리는 남자의 손길이 왠지 모르게 야릇했다. 아마도 남자의 하체 중심부에 손이 위치한 연유에서 그런 듯 손이 점점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은우는 혹 질래가 저의 몸에 일어난 불가피한 반응을 눈치챌까 봐 최대한 자상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하철에서의 발기는 숨기고 싶은 남자만의 비밀이었다.
어느새 은우가 만든 가드라인 속에 폭 들어와 있는 그녀. 질래는 저의 어깨를 토닥여 주는 남자의 희고 긴 손가락이 따스했다. 다른 한 손은 끊임없이 여자의 손을 살갑게 만지작거리는 그 변함없는 성실함도 좋았다. 한편으로는 그 다정함 속에 숨겨진 남자의 야수 본능이 질래에겐 여전히 넌센스였지만 말이다.
몇 정거장이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Abbesses 역에서 내려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골목골목이 고풍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과일 가게, 치즈 가게, 작은 카페, 파는 건 소소했지만 모여 있는 전경이 마치 잡지 속의 한 컷 같았다.
스무 살 때 한 번 홀로 배낭여행으로 와본 게 전부라던 은우는 몽마르뜨 언덕 지도를 한 번 쭉 훑은 후 거침없이 저를 인도했다. 마치 현지인처럼 낯선 길을 능숙하게 인도하는 남자. 질래는 은우를 계속 의지하고만 싶다.
혹 이곳에서 은우를 처음 만났다 해도,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주인공들처럼 그와 사랑에 빠져 하룻밤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생소한 여행지는 사람을 한도 끝도 없이 유연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은우가 온통 파란 타일로 뒤덮인 곳으로 질래를 끌고 갔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걸 보니 아무래도 명소인가 보다.
“우리도 저기서 찍을 거야.”
“저게 뭔데?”
“정말 몰라? 평생 동안 내가 해줄 말들이 다 쓰여 있는데.”
“그래?”
관광객으로 보이는 커플이 그 벽에서 사진을 찍은 후 내려왔다. 그러자 은우가 잽싸게 질래를 끌고 그 벽 쪽으로 다가갔다. 급작스럽게 움직인 바람에 질래는 벽의 쓰여 있는 글씨를 확인하지도 못했다. 대신 허리를 숙인 남자의 달콤한 속삭임이 귓전에서 울렸다.
“사랑해.”
“…응?”
“찾아봐.”
“뭘?”
은우가 질래의 몸을 파란 벽 쪽으로 돌렸다. 순간 눈이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솔직히 새파란 벽의 첫인상은 이상한 상형문자들이 잔뜩 새겨진 그저 그런 벽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글자투성이길래 아무 생각 없이 훑어보던 찰나 눈에 들어온 한 문장.
<사랑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자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 너 사랑해>.
눈에 익숙한 한글들이 서서히 들어왔다. 그제야 질래는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신혼부부 혹은 커플의 필수 코스라는 몽마르뜨 언덕 입구에 있다는 ‘사랑해 벽’.
은우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 벽이 왜 명소인지 실망하고 돌아섰을 것이다. 그만큼 별것 없는 곳이긴 했다.
그럼에도 오늘 이 벽이 특별한 건 세계 각국의 언어로 사랑 고백이 적혀 있다는 이유에서, 또한 은우와 이곳에 함께 서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예전 같으면 유치할 일들이 감동으로 성큼 다가왔다.
“인증샷 찍자.”
“지금?”
“세계적인 모델 이은우랑 사진 찍는 영광을 허락할게.”
“뭐?”
풋, 실소가 터졌다. 모든 게 얼떨떨해서 답도 못했건만, 행동이 앞선 남자는 지나가는 현지인에게 벌써 휴대폰을 맡긴 후였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커플 사진이라니. 한국에 있었다면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부끄러웠지만 파리라는 이유로 저에게 그었던 모든 기준선을 확 낮춰버렸다. 이곳은 어느 정도 닭살 돋음이 허용되는 장소라며 질래는 속으로 계속 이 광경을 합리화시켰다.
“un, deux, trios.”
은우의 휴대전화를 든 프랑스 남자가 사진을 찍겠다면 프랑스어로 1, 2, 3을 셌다. 그 타이밍에 맞춰 은우는 모델답게 극적인 포즈를 연출했다.
분명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던 몸이 어느새 그의 옆으로 쓰윽 돌려지더니 생각지도 못한 키스 타임이었다.
은우의 혀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프랑스라지만 남들 앞에서 프렌치 키스라니. 처음에는 난감해하던 질래가 은우의 달콤한 유혹에 저도 모르게 그의 잇새로 혀를 넣었다. 입술 안, 부드러운 볼, 까끌까끌 한 입천장까지 타액으로 뒤엉킨 혀가 서로를 핥고 빨며 천천히 입안을 배회했다. 고개를 교차하며 빙글빙글, 서로의 혀를 열정적으로 감싸줬다. 입안 구석구석을 탐색해 버린 것이다.
타인 앞에서 벌거벗은 듯한 극도의 긴장감. 질래는 그 흥분감에 심장을 테러당한 줄만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키스에 주목할 정도로 우리는 정말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잔뜩 긴장해서 어색하게 허벅지를 배회하던 손도 자연스레 그의 허리를 감쌌다. 입가는 서로의 체액으로 범벅된 지 오래였다.
달콤했다. 프랑스에서 먹은 그 어떤 쫀득쫀득한 마카롱보다도 부드러우면서도 달달한 키스였다.
문제는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농밀하게 시작된 키스가 수줍게 마무리됐다는 점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질래를 보며 은우가 마치 보디가드라도 된 양 제 품에 그녀를 가둔 채로 사람들 속에서 신속하게 빠져나왔다.
혹, 내일 현지 신문이나 잡지 어딘가에 우리의 용기 있는 키스가 실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다시 몽마르뜨 언덕의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하이힐이 조금 불편하단 것만 제외한다면 모든 게 충만했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