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족칠 일
차라리 듣지나 말걸….
질래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말랐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빈번해진 테러로 파리는 매우 민감한 상태이거늘, 그런 곳에서 남 실장이 질래에게 핵폭탄급의 테러를 말로 자행한 셈이었다.
적어도 질래 기준에서는 그랬다. 지나가 살아 있다니, 무슨 전 국민 사기극도 아니고…. 이 일이 사실일 경우 엄청난 범죄에 연루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늘게 뜬 눈, 찡긋찡긋 콧등을 찌푸리는 질래를 보니 이제 그녀에게도 진실을 알릴 타이밍이 왔음을 은우는 직감했다. 그래서 남 실장과 함께 인근의 한 호텔 안, 룸으로 돼 있는 조용한 카페로 장소를 옮겼다. 그 안에서 세 사람은 절대 가볍지 않은 진중한 티타임을 가졌다.
질래 앞으로 주문한 에스프레소에 스팀밀크를 섞은 플랫화이트 한 잔이 놓일 때까지 두 남자는 서로 눈치만 볼 뿐, 어떠한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그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질래는 커피가 주는 진하고 깊은 여운만을 음미했다.
한 30분쯤 흘렀을까. 어느덧 커피잔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그사이 남 실장은 질래에게 그동안 벌어진 일들을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두워지는 질래의 얼굴엔 어느새 폭우경보가 떨어졌다. 애써 찌푸려진 양 눈썹 사이를 평평하게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 인위적일 만큼 얼굴엔 거센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혼백이 나간 사람처럼 질래는 한참 동안 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파리의 풍경을 구경했다. 잠시 후, 지이이익, 의자 끄는 소리가 거칠게 귓전에 울렸다. 언제 어디서든 매너가 몸에 밴 질래가 웬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잠깐만요, 저 화장실 좀….”
오만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아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간 테러 사건의 본거지가 강화그룹이었다니. 그래서 저를 과거 원수 집안이었던 TY그룹의 후계자 윤태윤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단 말인가.
질래는 여자 화장실 안내판을 확인한 후 미친 사람처럼 그 안으로 돌진했다. 화장실로 들어서자마자 초점 없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본능적으로 가장 안쪽에 있는 빈칸을 찾아 헤맨 것이다.
그때 맨 마지막 칸에서 거구의 프랑스 여자가 느릿느릿 한 걸음으로 나왔다. 질래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그녀의 어깨에 부딪힌 지도 모른 채 얼른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숨이 막혔다. 또 실신할 것만 같아서 급히 변기 뚜껑을 내린 후 그 위에 몸을 기댔다.
‘믿을 수 없어, 아니야, 믿을 수 있어. 아니, 믿을 수 없어, 아니… 어쩌면… 어쩌면….’
무질서. 뒤죽박죽 북새통을 이룬 머릿속이 딱 그러했다.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건 가정만 회장, 즉 고인이 된 아버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추호의 의심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 질래에게 절망으로 다가왔다. 머릿속에 깨끗하게 정리정돈 돼 있던 책장이 엉망진창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피할 생각도 없었다.
잠시 동안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질래는 머릿속 책장을 정리해 본다. 어질러진 책들을 하나둘 차곡차곡 제자리에 꽂아 놨다.
질래가 저만의 책장을 정리할 동안 남 실장과 은우가 앉은 테이블에도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질래에겐 그 엄청난 사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남 실장이 돌연 입가에 돌덩이를 달았는지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입술을 열었다. 은우도 그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마음의 각오를 다진 상태였다.
“뭔데 이러게 시간을 끄시나. 그만 뜸 들이고 얘기하시죠?”
“음…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나 휴대폰 돌려주실 수 있습니까.”
“왜요?”
“지나는 자신의 과오를 숨길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죗값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다예요?”
이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남 실장이 갑자기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남자 대 남자로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휴대폰 안에 말 못 할 비밀들이 숨겨져 있나 보다. 혹 지나가 정·재계 인사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는 증거들이랄까.
어쨌든 은우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존심을 버린 한 남자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짠했다. 저 역시 질래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남 실장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은우는 자세를 낮춘 남자를 얼른 일으켜 세웠다. 그를 카페 의자에 겨우겨우 앉힌 후 그를 안심시키려 변명 엇비슷한 말들을 꺼내놓았다.
“뭐, 제가 그 휴대폰 영원히 갖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날 하도 어이없는 행패를 부려서 배후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어차피 돌려주려고 했어요.”
“감사합니다.”
“그 안에 뭔가 어마어마한 게 있나 보죠? 혹시 수위 높은, 뭐 그런 거?”
남 실장의 속눈썹이 잠시지만 파르르 떨렸다. 하긴, 제가 좋아하는 여자의 속사정을 듣고 싶어 하는 남자는 아무도 없겠지. 은우가 무심코 던진 말이 그에겐 쓰라린 이야기였나 보다. 남모를 둘만의 무언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남 실장이 먼저 확인 사살에 들어갔다.
“그럼… 그리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실장님, 사람 참 이상하게 만드네. 그냥 이야기해도 될 거를, 너무 비장하게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까. 어쨌든 저도 알겠습니다.”
은우의 확답으로 협상은 체결됐다. 남 실장은 그제야 제 어깨에 달린 무거운 추를 덜어낸 듯 표정이 한 층 편안해 보였다. 은우는 남 실장의 밝아진 얼굴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얼른 일어섰다. 화장실에 간 지 꽤 됐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질래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럼 저도 제 여자 좀 지켜줘야 해서… 갔다 올게요.”
그 시간 질래는 머릿속의 책장을 말끔히 정리한 후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화장실 벽 거울을 보며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냈다. 입꼬리로 끌어올리며 예쁘게 웃는 연습을 몇 번이고 반복한 후 화장실 문을 나서는데 그만, 다리가 확 풀리고 말았다.
이은우. 그가 문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왜일까. 은우를 보는 순간 질래는 전신이 흐물흐물 풀려버렸다. 순간 쓰러질 뻔한 여자를 은우가 받아냈다.
은우 품. 은우 향기. 스트레스 호르몬이라 불리는 코르티솔 수치가 확 떨어지는 것 같았다. 머리로 치솟았던 열기가 그의 품에서 떠내려갔다.
한때는 화장실 앞에서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나, 그렇게 문 앞에 남자친구를 세워둔 여자나, 참 찌질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사랑을 한참은 몰랐었던 것 같다.
은우가 이리도 반가운 줄 누가 알았나. 어쩌면 그 남자가 누가 봐도 전신이 파리지엥스러운, 낭만의 도시가 선택한 모델, 이은우여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여자 화장실 앞. 가질래는 은우 품에 꼭 안겼다.
남들 눈에는 화장실 간 사이, 잠시 동안의 이별도 못 견디고 감격의 포옹이나 하는 유별난 커플쯤으로 보였으리라.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 들 어떠하리. 질래에게는 지금 그의 품만 한 안식처가 없었다.
“보고 싶었어.”
걱정했다는 말을 꼭 이런 식으로 표현해 주는 은우가 좋았다.
종종 몇몇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데도, 질래 바라기 은우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질래는 그의 기운을 받아 용기를 내어 보기로 했다.
은우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다시 들어선 카페 룸 안. 질래는 남 실장과 은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들었다 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모두가 그녀의 입을 주시하는 가운데 드디어 질래는 결단한 내용을 발표했다.
“지나 씨 입국하는 날 저도 같이 들어갑니다. 기자 회견 연이어 열겠습니다.”
“어쩌려고 그래? 지나, 내일 비행기랬어.”
걱정스러운 듯, 은우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보시면 알 거예요. 이건 제 결정이니까 존중해 주시죠.”
목가를 어루만지던 은우의 손이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허벅지로 내려갔다. 주먹이 쥐었다 펴졌다 끊임없이 움직였다.
깊은 날숨을 꺼내던 남 실장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은우와 질래를 번갈아 쳐다본 후 바짝 마른 입술을 생수로 축였다. 아마도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공유해야 할 또 다른 사항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가 남 실장의 목젖을 타고 나왔다.
“아마 지나 씨가 테러 사건 발표와 함께 정·재계를 뒤흔들만한 이슈 하나 터뜨릴 겁니다. 나름 엠바고라고 볼 수 있죠.”
은우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걸 포착한 질래의 매끈한 이마에도 순간 실금이 그어졌다. 아버지가 테러 조직의 수장이었다는 사실 외에 또 터뜨려야 할 진실이란 게 뭘지 질래는 궁금했다.
“남 실장님, 그게 뭔데요?”
“성매매 리스트요, 아마 파장이 클 겁니다.”
“혹시 윤태윤도 거기에 들어가 있나요?”
아쉽게도 남 실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건조한 말투로 설명을 이었다.
“아마 지나와 관계된 남자들은 모두 벌벌 떨겠죠. 고위 공무원부터, 돈과 권력을 내세워 그녀를 겁탈했던 수많은 남성들….”
덤덤하게 말하는 척하지만 은우의 눈에는 남 실장의 분노가 보였다. 질래는 남 실장에게 출국 직전 지나와 이야기 나눌 시간을 잡아줄 것을 요청한 후 내일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남 실장이 떠난 후. 은우와 질래에겐 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질래가 빈 커피잔을 어루만지며 몇 분간 침묵을 이어갔다.
질래는 아버지의 범죄 사실을 듣고 난 후 화장실에서 결심한 게 또 한 가지 있었다. 화장실 문 앞에서 은우를 보자마자 그 결단이 무너졌지만, 이제는 이성도 어느 정도 되찾은 후였다.
“은우야, 처음엔 내 인생에 이은우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닌 거 있지. 알고 보니 내 삶이 온통 지뢰밭이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꽃길만 걸을 수 있는 널, 내가 지뢰밭으로 끌어들였다고.”
“제발, 나 좀 불안하게 하지 마!”
“너라면, 지금 이 상황에 누굴 만날 수 있겠니? 사실상, 가질래 인생은 끝났어. 너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은우는 질래의 말이 기막혔다. 언제 누가 뭘 해달라고 했었나? 질래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은우가 그녀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얼굴을 제 쪽으로 살포시 돌렸다.
“나 봐! 뭔가 착각하나 본데, 아직 아무것도 안 끝났어.”
질래는 은우의 눈빛이 부담스러운 듯 마른 침을 천천히 넘긴 후 눈꺼풀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너라도, 살아.”
질래는 제 얼굴을 잡고 있는 남자의 따스한 손을 일부러 떼어냈다. 그리고는 유독 슬퍼 보이는 은우의 잿빛 눈동자를 주시했다.
“다신 강화그룹이랑 엮이지 말라고. 마음을 열 때쯤 이런 일이 터진다는 건, 인연이 아니라는 뜻 같아.”
“헤어지잔 소리야?”
“어.”
질래가 단호하게 대답한 후 자리에서 잽싸게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멀어져가는 질래를 뒤따랐다. 그리고는 그녀보다 넓은 보폭으로 여자를 따라잡았다. 주변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은우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은우에게서 이렇게 도망 다녀봐야 끝까지 쫓아올 게 뻔했다. 질래가 뒤돌아서 은우의 옷깃을 잡았다.
두리번두리번, 질래가 재빠르게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때마침 눈에 들어온 비상계단 쪽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딱 봐도 직원들만 다니는 통제구역이었다.
그 안으로 은우와 함께 들어서는데 사실 제가 끈다고 끌려갈 남자가 아니었다. 은우가 저를 배려해 순순히 따라와 줬다는 걸 모를 리도 없었다.
두 사람의 거친 숨결만이 울려 퍼지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비상계단 안.
이별을 고한 질래가 선공에 나섰다. 뚫어져라 은우를 주시했다.
“왜 자꾸 따라오는데.”
“가질래한테 끌려온 건데?”
“따라오니까, 끌고 왔지.”
“어쨌든, 숨기엔 좋은 장소네.”
은우의 한쪽 입매가 들썩였다. 그녀가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오는지 은우도 대충은 짐작이 갔다. 저라도 한순간에 집안이 풍비박산 날 위기에 처했다면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질래가 무슨 말을 하든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먼저 본심을 꺼냈다.
“가지 마, 나 보고 싶었다며, 그래서 여기까지 날아와 놓고 어딜 간다고 그래.”
“윤태윤이랑 잔 거 같아.”
차마 은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서 질래가 흰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게 뭐.”
“화 안 나?”
“그게, 가질래한테 화낼 일이야, 윤태윤 개자식을 족칠 일이지.”
맞는 말이긴 했다. 은우의 그 말이 도리어 위안이 됐다. 하지만, 아버지가 테러리스트였다는 사실을 안 이상, GH그룹 후계자가 된 이은우를 놔주는 게 맞았다.
“내가 싫어. 초라한 내가 싫다고.”
“대체 초라한 게 무슨 상관인데.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또.”
“…13년 전에도 헤어지고 잘만 살았잖아. 지금은 왜 못하는데.”
“그냥 그렇게 됐어, 그니까 미안하다고 떠날 생각 같은 거 하지도 마! 내가 정말 두려운 게 뭔지 알아?”
은우가 질래를 돌려세워 제 품에 품었다. 벽에게만 보였던 여자의 눈물이 남자의 가슴을 적셨다. 그의 와이셔츠가 질래의 아픔으로 함께 물들어갈 때 쯤 조용히 물어봤다.
“…이은우, 넌 대체 뭐가 두렵니? 스물네 살엔 뭐가 두려워?”
“나?”
“그래, 너.”
“…가질래 없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