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포악한 키스
그러니까 윤태윤이 있는 펜트하우스에 도착하기 30분 전.
질래는 몰래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
이번만큼은 GH그룹의 도움이 아닌 강화그룹 장녀 가질래로서 일을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태윤의 연락을 받았을 때 그녀는 곧바로 강화그룹 오너 일가 경호 팀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다만 혼자 가겠다고 약속한지라, 그를 속이기 위해 펜트하우스 인근에 경호원 3명을 포진시킨 채 무전 도청장치를 달고 그 안으로 향했다.
애초에 경호원들은 혼자 들어가는 게 위험하다는 의견이었지만 그녀는 마지막으로 윤태윤을 믿어보기로 했다.
태윤을 바라보던 동생 줄래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던 까닭에, 혹시 모를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로 최대한 예의 있게 이 관계를 마무리 짓기로 결정한 터였다.
또한, 질래가 위험에 처했을 경우 그녀를 구하기 위해 펜트하우스 주변에 경호원들을 배치하지 않았던가. 혹 구출 과정에서 상해나 재물손괴가 발생하더라도 모든 책임을 가질래가 지겠다고 경호원들과 협의한 상태였다.
그 외에도 세부 사항으로는 첫째, 남자가 잠자리를 요구해올 때, 둘째, 막무가내로 의견을 밀어붙일 때, 셋째, 폭력을 행사할 때, 넷째, 질래가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감금할 때. 이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거나 이를 암시하는 단어가 대화에서 언급될 경우 무조건 저를 구하라는 내용도 협상에 포함돼 있었다.
이정도면 나름 철저히 준비하고 전장에 나선다고 생각했지만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터졌다.
줄래가 질래의 계획을 어그러뜨린 것이다.
태윤과 연락한 후 줄래는 질래 혼자 그 집에 갈 리 없다고 판단했다. 재빨리 경호팀 오너에게 사실을 확인한 후 모든 판세를 뒤엎었다.
“아내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데 경호 요청이요? 제가 말했죠. 언니가 사고 난 이후 정상 아니라고요. 설마 아직도 강화그룹이 가질래 손에 달렸다고 믿고 있는 거예요? 제 말대로 하세요. 뭐든 제가 다 책임질 테니.”
이후 질래를 보호해야 할 경호원들은 현장을 떠났다. 물론 줄래에게 도청장치를 넘긴 채 말이다.
이후 줄래는 차 안에서 서슬 퍼런 낯빛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일방적으로 밀어내는 여자와 어떻게든 잘 해보고 싶어 하는 남자. 제각각의 간절함이 극명해서 듣는 내내 줄래의 입매가 침울하게 뒤틀렸다.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집착하는 거야, 갖고 나면, 시시해질걸?’
이게 줄래가 내린 결론이었다.
질래에겐 수치를. 태윤에겐 상처를. 이대로 둘 다 망가지기를.
어쩌면 그것이 태윤이 저에게 돌아오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강화그룹을 쥐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다.
이상하게도 친언니 질래보다 태윤의 편에 서서 그를 돕고 싶었다. 줄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냥 끌리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 사이 줄래는 도청장치를 통해 들려오는 질래의 거친 호흡에 질끈 눈을 감았다.
태윤이 쓰러져가는 질래를 어떻게 할지, 그의 진심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한편, 질래 역시 깊고 무거운 한숨을 연신 내뱉었다.
설마하니, 강화그룹 경호처까지 태윤에게 매수당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진즉에 수가 틀렸음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협의한 대로라면 태윤이 자자고 제안했을 때 경호원들은 펜트하우스 문을 두드리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더한 상황이 벌어지도록 아무도 질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오직 이 안에는 태윤의 욕망과 원망이 뒤섞인 눈빛만이 질래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구, 해… 주… 세….”
‘요.’
마지막 글자조차 내뱉어보지 못한 채로 절망스럽게 의식을 잃어가는, 안타까운 질래였다.
***
여기는 센 강 인근 벤치에서도 가장 경치 좋고 고요한 어느 한 지점.
이곳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은우와 지나가 지나간 진실들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작년 12월 25일 새벽.
춥고 눅눅한 청담동 지하 사무실 집으로 두 사람은 함께 이동했다.
“나쁜 놈, 은혜도 모르는 놈.”
지나는 술이 올랐다. 덩달아 속도 울렁였다. 질래와 은우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지나는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지랄발광 중이었다. 간만에 꺼이꺼이 목 놓아 울어도 봤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건지,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과거에 비해 현실이 초라했다. 성공을 향한 집념이라 믿었던 지난날들의 결과가 잔혹 동화 그 자체였다.
인생의 정점을 찍었지만, 너덜너덜, 누더기만도 못한 초라한 크리스마스 새벽.
전날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CF를 따내기 위해 원치도 않은 관계를 맺었고, 이후 이틀 새 두 남자에게 차이는 이 거지 같은 상황.
견딜 수 없는 고독함과 막막함에 유일한 친구인 알코올을 만나러 편의점까지 직접 마중 나 간 지나였다.
술과 음료수를 산 후 다시 지하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 그는 저보다 더 세상과 동떨어진 남자를 발견했다. 저보다 더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사람. 윤태윤. 그가 왜 이 새벽에 이 지하 사무실 문 앞에 서 있는 걸까. 설마 이제 와서 자자고?
CF고 물주고 나발이고 다 귀찮은, 조금은 쉬고 싶은 새벽.
지나는 주인 없는 사무실 방 앞에 찾아온 태윤에게 먼저 물었다.
“왜요?”
“왜 전화 안 받아.”
“안 울렸어요.”
“거짓말 마! 내가 몇 번이나 한 줄 알아?”
재벌이면 다인가? 끝까지 갑질이다. 다짜고짜 화부터 낸다. 스폰을 받아내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지만 이런 독종은 살다 살다 처음 봤다. 잘 것도 아니면서 집요하게 괴롭히는 이상한 남자였다.
매너 있는 척하다가도 세상 싸가지 없는 그 남자의 손에 이끌려 지나는 은밀한 지하 사무실 방으로 끌려갔다.
그제야 지나는 휴대폰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술에 취해 잃어버린 건지, 누가 들고 간 건지, 그조차도 파악해 내지 못하고 있던 그때, 제 앞에 있는 윤태윤은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랑 연락 한 기록 싹 다 있을 거 아냐! 당장 찾아내!”
“제가 일부러 그랬어요?”
평소 같으면 공손하게 답했을 텐데, 지나도 지금은 술에 취한 심신미약 상태임을 어필하듯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당장 분실 신고하고 정지시켜 놔. 만에 하나 나한테 피해 주면.”
“…주면요?”
사무실 방에 싸한 기운이 첨예하게 흘렀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침묵이 흐르던 그때였다.
“버리는 카드가 된단 소리야.”
“무슨 쓰레기도 아니고, 버리기도 참 쉽네요. 제가, 가질래 씨한테 입만 열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러….”
태윤의 눈빛이 뾰족한 촉수처럼 따끔했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강한 압도감에 눌린 지나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 입, 영원히 닫게 하기 전에 당장 찾아와!”
“찾으면요? 찾으면 제가 받는 보상은요?”
“네 실수, 실패, 한 번은 용서해 줄게.”
술에 취했다. 확실히. 지나는 저 이상한 남자와 자고 싶어졌다. 무슨 자격으로 저를 용서하겠다는 건지, 저 남자의 말에 희한하게 설렜다. 그래서 술김에 미친 척 한번 제안해 봤다.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그래서?”
“나랑 한 번 잘래요? 아무런 대가 없이.”
“그걸 어떻게 믿지?”
“이은우도 못 꼬셨는데, 저 좀, 긍휼히 여겨줘요.”
태윤도 확실히 취했다. 뭐랄까. 분명 제 취향은 아닌데 뭔가 동질감을 일으켰다.
닭발집에서 이은우와 가질래가 뭘 했는지 창가에 서서 비참하게 구경하다 온 터인지라 그 상처받은 가슴을 어떻게든 잊고 싶었다.
불이 붙었다. 청결을 끔찍이 여기는 발정 난 짐승이 웬일로 지나의 입술을 덮쳤다. 지나를 가질래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농염한 여자가 달콤한 혀로 태윤을 요리했다. 이내 남녀는 서로가 입고 있던 옷을 아낌없이 벗겨냈다.
하지만 태윤의 전화가 이 위험한 욕망을 막았다. 새벽부터 줄기차게 울려대더니 급기야 지나를 화장실로 강제이동 시켰다.
“씻고 와.”
그 한마디에 활활 타오르던 불이 꺼졌다. 어떻게 벗은 여자가 전화 한 통에 밀릴까. 그것도 신이 주신 몸매로 칭송받는 톱스타 지나이건만.
그녀는 오늘 참, 여러 번 차인다 싶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뒤돌아서 화장실로 향하는데 태윤의 입에서 절대 나올 것 같지 않은 한 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확실히 넌, 벗은 게 더 예쁘네.”
지나의 입 꼬리가 씰룩였다. 광대도 승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 꽤나 괜찮았던 크리스마스 새벽이었다.
다만, 모든 비극은 이후에 벌어졌다.
샤워 도중 태윤의 통화 소리를 엿듣게 된 것이다.
사실 지나는 제가 잠자리를 가진 정·재계 인사나 고위 간부 대부분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 사람이 벗고 빨다 보면, 의외의 구석에서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까지 까발려진다.
그런데 오늘 왠지 대물을 낚은 듯 태윤의 통화 내용에서 구린내가 풀풀 났다.
“요즘 예민한 거 알지? 아마 사전에 폭발물 검사할 거야.”
폭발물이라. 촉이 좋다. 샤워기를 틀어놓고 좀 더 문가에 바짝 기대어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피해갈 길은… 드론?”
무슨 말이지?
지나의 눈썹도, 마음도 꿈틀댔다. 뭔가 심상치 않은 내용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샤워를 마친 후 태윤이 씻는 사이 그의 전화를 몰래 훔쳐보기로 했다.
실제로 태윤의 휴대폰에 걸려 있는 패턴을 와인 바 펜트하우스에서 훔쳐본 덕에 알고 있었다.
암기력 하나는 타고나서 지금껏 잠자리를 가진 유명 인사들의 휴대폰 패턴이나 비번 대부분을 외웠다. 왜냐. 그들의 약점은 곧 그녀의 보장된 미래요. 지나가 이사로 있는 엔터테인먼트회사는 단순히 연예사업만 하는 곳이 아니라, 아방궁 같은 곳이었다. 정·재계 인사와 경·검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캐슬이랄까. 세상과 다른 생태계를 갖고 있었다.
여기서 하나만 삐끗해도 온 나라가 뒤집힐 만큼 구더기가 득실득실한 곳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나름 윤태윤을 타깃으로 물고 들어갔건만….
제대로 잘못 물었다.
생각보다 그는 중증의 상또라이였다. 미친 순애보거나 혹은 사이코패스이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하는 건 분명했다.
지나는 태윤이 씻는 사이 그의 폰에서 이거다 싶은 정보들을 쪽지에 열심히 옮겨 적었다. 적어도 샤워하는 데 몇 분은 걸리겠지 싶어 꼼꼼히 적어 내려가던 그 순간 비극의 종이 울렸다. 태윤이 갑자기 화장실에서 나온 것이다.
다행히 펜과 쪽지를 잽싸게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안심하기도 잠시. 그의 휴대폰 화면을 끌 시간까지는 허락되지 않았다. 폰을 훔쳐본 걸 들키고 만 것이다.
이후 수습하기엔 타이밍이 늦은 듯, 그의 이목구비는 이미 세상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뭘 본 거지?”
“저 그… 그게.”
말을 더듬었다. 엄연한 범죄였다.
지나가 태윤이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다.
“내 휴대폰 패턴을 아네.”
“별거 못 봤어요.”
“남의 약점 잡고 뜯어낸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진짜구나?”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태윤의 눈동자가 돌아간 것은.
“너 나랑 키스 되게 하고 싶었지? 아까 하다 말아서 아쉬웠던 거잖아. 아니야?”
“괘, 괜찮아요.”
지나는 왠지 그와 엮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예감에 얼른 도망쳐 보려 했다. 하지만 태윤의 무차별적인 키스가 시작됐다. 거의 폭력에 가까운 키스였다. 혀뿌리가 뽑힐 듯한 흡입력에 놀랄 틈도 없이 제 혀를 절단 낼 모양이다. 이런 미친! 이러다 정말 혀가 잘릴 것만 같아서 그를 밀어낸다는 게 탁상 위에 있던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졌다. 휘청거리며 넘어지는데 하필 그 파편 쪽으로 쓰러진 것이다.
“아아앗!!!”
일시에 너덜너덜해진 한쪽 볼. 지나는 왼쪽 얼굴이 뭉개진 듯싶었다. 하지만 태윤이 너무 무서워서 파편이 박힌 건지 얼굴이 찢어진 지도 모른 채, 오들오들 겁에 질려 피범벅이 된 얼굴로 싹싹 빌었다.
하지만 진심이 담긴 그의 섬뜩한 한마디가 지나의 회색빛 미래를 암시했다.
“그 내용은 보지 말았어야 했어. 아마 너도, 펑! 하고, 사라져야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