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질래요-48화 (48/84)

48화. 이렇게 빨아줬어?

“오랜만이다. 사람 참, 알 수 없어, 그치?”

“…….”

세상이 미쳤거나, 이은우 미쳤거나. 둘 중 하나는 분명했다.

안 그러고선 눈앞의 상황은 어떤 식으로든 해명이 안 됐다.

즐겨 먹던 음식이 제 앞에 놓였지만, 이건 뭐! 사약만도 못했다. 혹은 입맛을 도둑맞거나. 왜냐고?

최지나. 왜 백골로 발견됐다는 사람이 파리의 한 브런치 카페에서, 그것도 하필 제 앞에 나타나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단 말인가.

숨이 턱 막혀와 목젖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모습을 누군가가 다른 테이블에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왜, 안 믿기니? 딱, 귀신 보고 지린 표정인데?”

“…얼굴은 왜 그래요?”

그제야 집시 차림의 여자의 얼굴에 큰 밴드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볼 한쪽 면을 덮고 있을 만큼 상처의 면적이 꽤 큰 듯싶었다.

“이거? 너무 놀랄 거 없어, 흉터 제거 치료 중이거든.”

“분명,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던 거 같은데….”

“애송이가 많이 컸네? 이제 파리에선 네가 더 유명해졌다 이거니?”

육안으로 보이는 은우의 모든 혈관이 모조리 씰룩였다. 목선이며 손등, 말아 접은 와이셔츠에서 드러난 팔뚝에 날 선 핏줄까지도. 최선을 다해 분을 삭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자의 일방적이고도 뻔뻔한 언사는 계속됐다.

“모델 일은 할 만해?”

쾅! 은우가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야말로 인내심이 터지기 직전인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순간 접시에 아름답게 플레이팅 된, ‘마그레 드 꺄나흐’가 흔들렸다.

“참아! 너 이제 호텔 와인 바에서 발렛하던 애 아니잖아.”

부글부글 끓던 분이 결국은 펑 터졌다. 은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장난해요? 웃어져요, 지금?”

“참으랬지!”

“뭐, 어떻게 하면 이런 게 가능해요? 뭐, 영화처럼 환생이라도 했어요?”

가게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얼핏 보기에는 남녀의 사랑싸움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차피 그곳에서 한국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은우가 집에서 나올 때부터 그의 뒤를 미행했던 의문의 사나이, 단 한 명뿐, 아무도 없었다. 브런치 카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델 같은 남자의 애정전선이 어떤 결말로 향할지 다음 장면을 몰래몰래 훔쳐보았다.

“이은우, 다시 앉아. 주목받고 싶어?”

“누구 맘대로 앉으라 말아야?”

은우는 지갑에서 음식값이 훨씬 넘은 10유로 화폐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뒀다. 그리고는 곧바로 지나의 손목을 잡고 끌어내려 했지만 그녀가 자리에서 작정하고 버텼다.

“나가자고, 나가서 얘기해.”

“싫다면?”

이성을 잃은 은우는 급기야 지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말든, 그는 이제 진실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여자를 들쳐 안은 채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 모습을 남몰래 지켜보던 남자가 파파라치처럼 카메라에 그 광경을 담았다.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은우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여자를 버리듯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손목을 잡은 채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가 순순히 따라 와줬다는 것이다. 하긴, 지금 이 상황에 누구에게든 주목받아봐야 이로울 게 없었다.

저는 지금,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살인 사건의 피해자, 즉 유령과 걷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은우는 그녀와 운치 좋고 고즈넉한 센 강 벤치에 앉았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조용히 대화하기엔 제격인 장소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낭만으로 기억될 아름다운 이곳이 은우에게는 진실을 들여다보는 강이 되고 말다니, 유감이었다. 어쨌든 지나의 충격적인 과거는 잔잔한 물살을 타고 강물과 함께 흘러갔다.

“사람이… 죽고 싶을 때가 있어.”

“…….”

“너도 스타가 돼 보면 알 거야. 치부가 드러나느니,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끝내자!”

“혼자 영화 찍어요? 현실이랑 작품 구분 못 해?”

“나도… 차라리 지금이 영화였으면 좋겠다.”

푹, 고개를 숙인 채로 긴 한숨을 내뱉는 여자의 눈에선 참회의 눈물이 흐르는 듯했다. 과거 패셔니스타 지나라면 결코 입지 않을 촌스러운 롱 치마 위로 도트 무늬가 하나둘씩 새겨졌다.

그럼에도 이만큼의 동정도 가지 않는 건 어째서일까. 은우는 입을 오므린 채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마도 그녀를 좋아했던 사람들의 진심을 백지장보다 가볍게 여긴 것 같아서, 톱스타 지나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제 마음이 우롱당한 것 같아서, 제 앞에 산 자로 나타난 그녀를 쉽사리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궁금한 건, 왜 하필 나일까? 어떻게 알고 찾아 왔을까? 혹시 남 실장이?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며 은우는 그 실마리를 천천히 풀어보기로 했다. 다그쳐 봐야 서로 감정만 상할 것 같아서, 나름 예의를 갖춰 질문하는 은우였다.

“왜, 날 찾아온 건데요?”

“크리스마스 새벽이었나? 그때 만약 내가 널 찾아가지만 않았다면, 난 여전히 톱스타 지나로 살았을까?”

“그 일이 나랑 상관있다는 얘기에요?”

은우의 물음에 지나가 선뜻 대답을 잇지 못했다. 공허한 시선으로 센 강을 바라보면서도 팔과 손을 연신 주무르는 게 무척 초조해 보였다.

은우는 답답했지만, 지나가 입을 열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줬다.

그렇게 흘러가는 센 강처럼 몇 분이 흐른 후에야 지나가 한 마디를 겨우 꺼냈다.

“윤태윤 그 새끼는 사람이 아니야. 사람, 참 겉보기랑 달라.”

“…윤태윤이요?”

윤태윤, 그 세 글자만으로도 은우의 마음엔 폭우가 몰아쳤다. 새파랗던 미래가 온통 탁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윤태윤을 만나러 간 질래에게 연락이 없던 터라 괜한 불안감까지 엄습했다.

지나 역시 윤태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듯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주먹을 몇 번이고 쥐었다 놓은 후 서서히 고개를 돌려 은우를 주시하는데, 눈, 코, 입, 인중… 얼굴 근육까지 모든 근육이 두려움을 그렸다.

“은우야! 죽지 않으면 죽일 것만 같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게 무슨 삶인지, 이해가 가?”

“…알 듯 말 듯한데, 아닌 건 아니죠.”

“그런데, 숨어 살게 되면서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진실은 누군가가 반드시 쏘아 올려야 한다고.”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요?”

“내가 분명 주연이었는데 나만 죽긴, 억울하잖아?”

***

같은 시각, 한국에 있는 질래의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대한민국과 파리의 시차는 7시간.

은우가 지나에게 붙들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질래는 태윤의 눈매에서 좋지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뭔가가 잘못됐어.’

그제야 기 회장에게 말없이 나온 저를, 은우에게 통보만 해놓고 휴대폰을 꺼버린 저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윤태윤이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둘씩 풀어내는 걸까. 그러면서도 어정어정 제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순간 망했다 싶다.

질래의 이성 회로에 경고등이 켜졌다. 얼른 대피하라는 뜻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태윤을 피한다는 게 그만 거실 코너 쪽으로 뒷걸음치고 말았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였다. 그 처량한 쥐에게 피할 시간을 준 건 의외로 태윤의 휴대폰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SNS 메시지가 연달아 오는 듯 끊임없이 주인을 찾아댔다. 질래에게 다가오던 남자도 그제야 휴대폰을 쳐다봤다.

지금이야!

질래는 그 틈을 이용해 현관문 쪽으로 질주해 보려 했지만 메시지를 확인한 남자의 한마디가 그녀의 발 앞에 덫을 놓았다.

“이야! 이은우 잘 살고 있네, 벌써 딴 년이랑 바람났나 봐!”

태윤의 말에 잠시 발걸음이 주춤해진 건 맞았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도 않았다. 저에게 하루에도 수십 번을 연락해 오는 남자가 은우였다. 일거수일투족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보고하는 남자가 그새 바람이 났다고?

“오늘은 술을 과하게 마신 거 같네요, 멀쩡할 때 다시 보도록 하죠. 협상을 술김에 할 순 없잖아요?”

“이제 와서?”

“그래도 목소리가 진실 되게 느껴져서, 마지막으로 믿어보려도 했는데, 윤태윤 씨는… 정말 아닌 거 같네요.”

저를 멸시하듯 바라보는 질래의 눈빛이 태윤에게는 마치 이렇게 통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과 나, 이루어질 가능성은 제로. 죽어도 없다고.

그 경멸의 시선이 너무도 날카로워서, 태윤은 질래에게 상처를 주고만 싶었다.

1단계는 유치하게, 파리에서 보내온 사진을 확대해서 질래에게 보여줬다.

“이것 봐봐! 오늘 아침에 다른 여자랑 데이트하다가 딱 걸렸다니까, 카페에서 나갈 땐 아예 안고 나갔다네, 미친놈.”

그가 휴대폰 사진을 검지로 넘기며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였다. 설핏 보기에도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이었다. 연출된 샷으로 보이진 않았다.

“은우한테 사람 붙였어요?”

“너무 이은우를 믿는 거 같길래, 현실을 좀 알려 주려고.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환장하는데, 가만있을 남자가 과연 있을까?”

솔직히 빼도 박도 못할 증거 사진 앞에서 질래도 살짝 흔들릴 뻔했다. 저만 안아 들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조금은 서운했다. 하지만 은우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 윤태윤을 만난다고 문자까지 남겼건만, 은우가 이른 아침부터 다른 여자를 만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윤태윤 씨, 그런 사진 따위로 우리 못 찢어요.”

“남자를 진짜 모르네. 아침을 함께 한다는 건, 전날 밤을 함께 했다는 뜻인데.”

“그래서 줄래, 아침 좀 챙겨줬어요? 모두가 윤태윤 씨 같은 줄 아나 보지?”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한 걸 질래는 겨우겨우 참았다.

그의 말에 반박 거리를 찾기 위해 제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부터 켰다. 분명 은우가 연락해 온 게 있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계의 불이 들어오는 순간, 투두둑, 툭.

전원이 켜짐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이 날아갔다.

태윤이 질래의 양 손목을 제압한 채로 그녀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은 것이다. 그의 날숨이 너무 소름 돋아서 질래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태윤의 힘에 밀려 주춤주춤 뒷걸음친다는 게 어느새 양면이 벽인 코너에 다다랐다.

“거, 건드리기만 해봐! 내가 가만있을 줄 알아?”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래가 발버둥 치자 태윤은 그녀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질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본능적으로 제 머리를 최대한 뒤로 젖혔다.

“겁에 질린 가질래, 이런 모습이었구나.”

술에 취해서일까. 꼭 다른 인격체를 보는 것만 같았다. 겉모습은 분명 윤태윤인데 다른 남자가 저를 제압하는 것만 같았다. 질래가 아무리 밀어내도 어느새 찔꺽찔꺽, 태윤이 그녀의 귓바퀴를 핥으며 농락했다.

“그 새끼가 이렇게 빨아줬어?”

“제발, 건드리지 마! 놓으란 말이야! 놔아!”

“놔! 감히, 놔?”

가질래라면 늘 신줏단지 모시듯 대해왔던 태윤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지금의 이 상태다. 장례식장에서 상주를 자처했지만, 어린놈과 키스를 했고. 와인바 펜트하우스를 빌려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하려 했으나 그녀는 허름한 닭발집에서 이은우란 자식과 혀를 섞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애초에 안 되는 여자였던 것이다. 고로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가질래를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태윤은 질래의 웃옷을 힘껏 찢었다. 덕분에 질래의 젖무덤이 너덜너덜해진 옷 사이로 수줍게 드러났다. 얼핏 보기에도 희고 풍만했다, 남자를 절로 유혹하는 어여쁜 가슴 라인이었다.

그가 브래지어 사이로 튀어나온 동그란 가슴살에 더러운 입술을 내리려 하자 질래는 온 힘을 다해 독립 만세를 외쳤다. 왠지 이대로 제가 수탈당하면 안 된다는 의지로. 힘써, 그에게로부터 제 몸에 대한 자주권을 외쳤다.

“놔! 놔 주세요… 제발! 나를….”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질래의 시야가 터널처럼 좁아지기 시작한 것은. 이내 새하얀 눈이 눈앞에서 펑펑 내리기 시작했으니까. 화이트 크리스마스, 그날의 지워졌던 기억의 일부가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제야 태윤도 비정상으로 헐떡이는 여자가 보였다. 원래도 하얗던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지는데 행여나 쇼크사로 죽는 건 아닌지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외치고 또 외쳤다.

“가아, 지이일, 래애.”

하지만 질래의 귀에는 태윤의 목소리가 늘어난 테이프 소리처럼 들렸다. 저를 정신없이 흔들어 깨우는 그의 손길을 끝까지 밀어낸다는 게 그만 삐끗하여 도리어 독이 됐다.

퍽, 우당탕탕!

질래는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찧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끝까지 정신을 부여잡고 싶었지만, 이미 늦은 듯, 새하얗던 세상이 까맣게 질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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