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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래요-47화 (47/84)

47화. 나랑 한 번 자자

약 한 달이 흘렀다.

집으로 향하는 태윤의 얼굴에는 황사가 몰아쳤다.

특별한 약속이 있어서 평소보다 일찍이 퇴근했다. 어쩌다 보니 그 기다림이 초조해서 늦은 오후부터 술판을 벌였다.

독한 양주 외에 별다른 안주 없는 초라한 테이블. 오후 5시경.

그는 가질래와 행복한 신혼을 꿈꿨던 집에서 홀로 그녀를 기다렸다. 늘 일에 치여 살던 태윤이 이 시간에 퇴근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휴대폰 발신자를 확인한 태윤은 쉽사리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테이블로 손을 뻗었지만 전화를 집어 들기까지 수차례 망설였다. 꿈적대던 손가락이 휴대폰의 진동이 끊기기 직전 겨우겨우 움직였다.

태윤은 무심하게 통화 버튼을 누른 후 이내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아파서 조퇴했다며. 어디가 안 좋은데? 내가 좀 갈까?

태윤이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살살 주억이더니 나중에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격하게 도리질했다.

-여보세요? 뭐해? 밥은? 요새 너무 걱정되는 거 알아?

줄래의 끊임없는 질문에도 그는 소파에 기대어 목을 젖힌 후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태윤 오빠,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허공을 응시 중인 태윤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꿀렁였다. 깍지 끼운 손에서는 관절을 튕겨 내며 딱딱거리는 묵직한 소리를 대답 대신 흘려냈다. 잠시 고민하는 듯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마침내 놓았다.

“가줄래, 넌 내 편이지!”

-또 술 마셨어?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나 같은 놈의 편에 서?”

-무슨 일이냐니까.

블루투스 기능은 켠 채로 운전 중이었던 줄래의 목소리가 한껏 다급해졌다. 유독 느릿느릿 답하는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술에 취해 혀도 살짝 꼬인 듯했다.

“뭐야! 들어줄게. 무조건 오빠 편 한다고.”

-…나 알고 보면 쓰레긴데. 술김에 딱 한 번만 진심 전한다. 좋은 놈 만나. 나 같은 폭탄, 가까이 둬봐야 좋을 거 없다고,

“윤태윤, 태윤 오빠 왜 그래?”

-미안했다고,

운전대를 잡은 줄래의 손이 흥건해졌다. 울분을 애써 참는 듯한 태윤의 목소리에 왜인지 제 코가 다 찡해졌다. 태윤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단 사실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매너는 있지만 사과할 줄 모르는 자존심 센 남자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가 불길했다.

“금방 갈게!”

-오지 마!

“왜?”

-가질래가 온대. 드디어 와주신대.

가질래? 어째서 술 마신 남자의 입에서 가질래란 이름이 또 나올까. 줄래는 언니가 미웠다. 저는 자존심을 구기며 애걸복걸해야만 얻을 수 있는 사랑인데 언니에겐 모든 게 다 쉬웠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음을 가장 먼저 알려준 사람. 남들은 친언니가 있어서 그렇게 좋다던데, 줄래에게 가질래란 사람은 가시덩굴로 무장한 거대한 장벽이었다. 마치 저를 찌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가질래가…. 진짜로 온대?”

-끊는다.

뚝. 태윤이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운전 중이던 줄래는 잠시 차를 갓길에 세웠다. 이미 태윤이 좋아하는 전복죽을 사 들고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던 그녀였다. 그런데 가질래라는 그 이름 석 자에 줄래는 그만 목적지를 잃었다. 제 마음이 향해야 할 곳도, 이제는 모르겠다.

그 시간,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소파에 눕듯이 앉아 있는 태윤은 애써 줄래의 전화를 외면했다. 적어도 방금 전 줄래에게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제 인생은 알고 보면 거짓투성이기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나쁜 짓만 해도 수두룩하기에.

저를 인간적으로 안아 주고 남자로서 품어줬던 가줄래만큼은 제대로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 부패한 배려가 남의 가슴을 썩어 문드러지게 한지도 모른 채, 그는 제 아내였으면 싶은 여자를 기다렸다.

그토록 보고 싶던, 갖고 싶던 가질래를….

***

사실 그동안 질래는 태윤에게 만나 줄 것을 수차례 요구했다.

은우가 없는 동안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일단 골반이 나아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기쁜 소식 하나.

불행한 소식이라면 혼인 신고 사기극도 모자라 이제 와 생뚱맞게 은우에게 상간남 소송을 걸겠다는 윤태윤의 선전포고에 질래는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하지만 상대는 TY그룹의 윤태윤 아닌가.

TY그룹 법조팀은 불가능도 가능케 하는, 없던 증거도 뚝딱 만들어내는 진실 왜곡의 달인들이 모인 집합소란 걸 질래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강화그룹 법조팀의 많은 인력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TY그룹으로 이동했다.

태윤이 유능한 인재를 한발 앞서 스카우트해 간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강화그룹 가질래와 TY그룹의 윤태윤을 부부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두 기업이 경쟁 구도에서 상생 구도로 함께 갈 거라고 모두가 그렇게 예상했다.

게다가 1년 전 윤태윤과 성대하게 약혼식까지 치르지 않았던가.

또한, 태윤이 살고 있는 집의 명의자는 질래였다. 태윤이 아내의 명의로 구입한 신혼집이었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니 사실혼을 증명할 만한 증거는 굳이 조작하지 않아도 차고 넘쳤다.

줄래마저 태윤의 편에 섰고 반면 저는 한 달 전 사고로 기억에 장애를 입은 환자에 불과했다.

이런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질래가 가장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혹, 저 때문에 앞날이 창창한 은우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혹 GH그룹의 도움을 받아 이 싸움에서 승소한다 해도 저와의 스캔들이 연예인의 길을 선택한 은우의 이미지에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그뿐 아니라 태윤이 본격적으로 소송전을 시작할 경우, GH그룹 기 회장이 저를 어떤 시선으로 볼지도 무서웠다. 때문에 태윤이 소송을 걸기 전 양자 간의 협의로 마무리 짓는 게 질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태윤은 질래에게 꼭 혼자 오라고 했지만 그녀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강화그룹 경호팀에 도움을 요청한 후 그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 이야기만 잘 되면 평생 저를 놔주겠다는 그 한 마디를, 태윤을 마지막으로 믿어보기로 했다.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힘없던 그의 목소리가 진심이길 빌고 또 빌었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택시에서 내려 펜트하우스로 향하는 질래의 발걸음이 땅에 질질 끌렸다. 그만큼 내키지 않는 조우였다. 특히나 우려되는 게 있다면 은우가 떠난 이후 알게 된 저에게 생긴 새로운 병이었다.

일명 미주신경성 실신.

오토바이 사고 후 갑자기 찾아온 질병이었다.

때때로 예고치 않은 곳에서 어지러움과 속 울렁거림을 호소하면서 갑작스럽게 쓰러지는 증상이다. 가뜩이나 스트레스에 취약한 병이기도 했다.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겠다. 다만 일이 커지기 전에 태윤과 하루속히 이 길고 긴 악연을 끊어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강화그룹 경호팀과 다시 한 번 연락을 주고받은 후 후 천천히 약속장소로 향했다.

협상의 여왕, 강단 있던 과거의 가질래의 모습을 오늘을 계기로 되찾으리라.

복잡한 머리를 끌어안은 채 질래는 펜트하우스 문 앞에 섰다. 심호흡을 내쉰 후 떨리는 손가락으로 드디어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띵동.

사람이 배달됐다. 태윤은 누군가가 오면 늘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사람을 물건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좀 특별한 택배였다.

인터폰 화면 속 사람은 제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여자, 가질래였다.

그녀가 처음으로, 신혼집에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태윤은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속 좀 타보라고, 그간 제가 느꼈던 심정의 1/1000이라도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질래를 기다리게 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합리화했지만, 실은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 속 제 모습을 정비하느라 시간이 필요했다. 민트 향 구강청결제로 가글링해서 술 냄새도 잡았다.

한편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질래는 슬슬 짜증이 났지만, 인내심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오늘은 최대한 윤태윤의 비위를 살살 맞춘 후 제가 원하는 걸 성취하는 게 이 집을 방문한 목적임을 잊지 않기로 했다.

덜컥. 마침내 문이 열렸다.

결혼 전부터 이미 신혼집으로 마련된 곳이었음에도 질래는 이 집을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전형적인 재벌 2, 3세들이 살법한 펜트하우스. 딱 그 정도의 인테리어였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점은 소파든, 탁상이든, 벽에 걸린 그림이든, 자잘한 인테리어 소품에는 전적으로 한 사람의 취향이 반영된 게 고스란히 보였다.

‘줄래가 많이 드나들었구나.’

오자마자 제 시선을 대놓고 피하는 가질래에게 태윤은 서운했지만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멈춰 있던 위장이 다시 뛰는 듯, 가슴팍에 뭉쳐있던 체기가 확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 친절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술이 너무 올랐다. 취중진담. 그런 거 해보고 싶어서 부러 독주를 과하게 마신 태윤이었다. 술김에 처음으로 가질래에게 말을 놓았다.

“어렵다. 가질래, 갖기가 어려워.”

“원하는 게 뭔데요? 빨리 끝냅시다, 우리.”

“뭐가 그렇게 급해. 전화 한 통이면 바로 소송 들어갈 텐데.”

“오늘 얘기 잘 하면 끝내준다면서요. 그래서 혼자 왔잖아요.”

“그래, 잘하면 끝내줄 거야. 무슨 의민지 이해했어?”

“…들어줄 만한 협의 사항이면 이해할게요.”

태윤을 바라보는 질래의 눈빛은 잘 갈린 칼날처럼 한없이 날카로웠다.

“그래, 그 표정. 전장에 선 가질래의 모습. 진짜 섹시한 거 알아? 내가 이래서 가질래를 좋아하나 봐.”

질래의 고운 미간이 순시에 찌푸려졌다. 그럼에도 비릿한 미소로 저를 내려다보는 태윤이 부담스러워 드넓은 거실에 생뚱맞게 배치된 소파에 알아서 앉았다.

“질질 끌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 마음은 확고하니까….”

“강화그룹 법무팀보단 TY그룹이 법조계는 더 꽉 잡고 있다지?”

“하지도 않은 혼인 신고는 왜 했다고 떠들어 대서….”

“어차피 할 건데 시기가 중요한가? 어쨌든 결혼식만 안 올렸다뿐이지, 모두가 우릴 부부로 안다고. 사실혼 증거? 차고 넘칠걸? 약혼자였고, 집도 사줬고. 병간호도 내가 했어. 무엇보다도 줄래도 내 편이라고.”

줄래라니. 갑자기 병실에서 줄래와 태윤이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병실에서 벌어진 일들을 다 녹음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윤을 곤란하게 만들 증거는 충분했지만, 그 불륜의 대상이 줄래여서 질래는 파일을 버렸다. 두 사람의 실수를 혼자만 알기로 했다.

줄래를 범해놓고 저와 결혼하려 들다니. 불쾌함에 질래의 낯빛에는 미세먼지가 가득 꼈다.

“줄래, 좋아해요?”

“가질래를 사랑하지.”

그 대답이 더 역겨웠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감히 내 여동생을 건드려? 분노가 일었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대응했다.

“내가 왜 좋은데요?”

“나는 왜 안 되는데?”

질래가 그의 뜨거운 시선을 피한 채로 마른 침을 꿀꺽 넘겼다. 이러다가는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얼른 담판 지으려 냉철한 얼굴로 그를 주시하던 그때.

“나랑 한 번 자자. 그럼 소송이고 뭐가 다, 없던 일로 해줄게. 잘하면 다 끝내준다고 했잖아.”

“미쳤어요?”

“그럼 나만 이대로 접으라고? 버림받는 사람의 심정을 알기나 해? 한 번 자자. 그럼 나도 평생을 바라봐온 여자, 포기해 볼게.”

***

같은 시간 파리에 있는 은우는 질래 생각에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여기저기 아무리 연락해도 묵묵부답이었다. 분명 제가 자고 있을 때 태윤과 해결할 일이 생겼다는 메시지를 보내 왔건만, 이후 보고 연락이 없었다.

마음이 천근만근, 너무도 답답해서 잠시라도 쉬고 싶던 그날. 남 실장과 아침 미팅이 있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어기적어기적 옮기고 있었다.

사실 은우는 지금 파리에서 무섭게 떠오르고 있는 라이징 스타다. 모델계에서 이. 은. 우로 말할 것 같으면 파리 패션 위크에서 톱 모델만이 설 수 있다는 명품 브랜드 무대에 선 것은 물론 매 무대마다 압도적인 아우라로 찬사를 자아냈다.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벌써부터 입소문이 돌 만큼 화제의 루키로 떠올랐다.

간혹 혜성처럼 등장하는 신인들이 종종 있었으나 은우처럼 독보적인 마스크와 비율, 개성 넘치는 워킹으로 짧은 기간에 이렇게까지 승승장구한 사람은 과거에도 이후에도 없을 만큼 전무후무하다는 게 이 업계의 평판이었다.

사람이 옷에 날개를 달아 준다나.

천생 연예인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며 사람들의 입에서 칭찬이 마를 새가 없었다.

그럼에도 은우는 질래와 떨어져 지내는 게 늘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매일 같이 한국 뉴스를 검색하며 질래 집안에 별일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건 국내 재벌들을 노린 굵직한 테러 사건의 범인이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는 점. 또한, 지나를 살해한 용의자에 대한 수사 역시 별 진척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게다가 남 실장은 이상하리만큼 여유로웠다. 제가 알기로 그는 지나를 남몰래 흠모해 왔다. 지나 일이라면 목숨 걸 만큼 열정적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그녀의 죽음에 아파할 줄 알았건만 예상외로 덤덤한 시간을 보내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이래저래 마음이 갑갑해서 썩 유쾌하지 않은 꾸물꾸물한 아침.

아침 미팅 때문에 내키지도 않는 식사 자리로 꾸역꾸역 이동했다.

그런데 남 실장이 약속 시간이 다 돼서 늦는다고 연락을 해오는 게 아닌가. 먼저 시켜먹고 있으란다. 그 바람에 평소 즐겨 먹던 오리고기와 달콤한 바나나가 플레이팅된, ‘마그레 드 꺄나흐(Marret de Canad)’를 주문한 후 질래에게 문자 하며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분명 별일 없던 파리에서의 아침이었다.

적어도 누군가가 제 맞은편 의자를 끌어낸 후 착석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이은우!”

익숙한 하이 톤의 목소리.

설마 하는 의구심을 품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드는데, 대체 뭘 본거지? 은우는 너무 기막혀서 그대로 세상이 정지된 듯 몇 초간 멍 때리고 말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현실을 다시금 확인하는데, 그렇게 굳어버린 입에서 겨우겨우 내뱉은 한마디라곤 이게 전부였다.

“…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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