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육 구, 오십사.
줄래는 은우가 길래란 사실을 알아챈 이후 홀로 고민이 깊었다. 사실 줄래네 집에서 살았던 이길래에 대한 모든 증거들은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태윤이 질투하는 대상이 알고 보면 질래 언니가 키우다시피 했던 남자였단 걸 알게 될 경우, 이 질투 전이 시시해질까 봐 걱정되었다. 줄래는 태윤이 계속 은우에게 열등감을 가지길 바랐다. 조금이라도 제 심정을 알아주길 바랐던 마음도 있었다.
한편 태윤은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차마 줄래에게 둘이 키스하는 걸 직접 봤다고, 실은 그 새끼가 가질래의 처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건 제 아내 될 여자의 프라이버시기도 했지만 실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혼인 신고를 했다는 말도 거짓이었다. 솔직히 가질래가 제 아내임을 공식화하고 싶었고, 이번 계기로 가줄래와는 선을 긋고 싶기도 했다.
태윤과 줄래, 둘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봤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윤은 질래가 그 새끼 품에서 잤다는 생각만 하면 분노가 폭발했다. 저에겐 손끝 하나 못 대게 해놓고 어린놈의 키스에 얼굴을 붉히던 가질래 때문에 내내 불면증을 앓을 정도였다. 그제야 태윤이 깨달은 게 있다면 지독한 질투도 병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불치병.
그 순간 태윤의 구멍에 난 가슴을 알아챈 줄래는 남자의 머리를 제 턱 아래 두었다. 한 손으로 그의 등을 토닥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내 비밀 하나 알려줄까?”
혹, 이은우에 관한 것일까? 태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말이야, 눈물이 안 났어.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었지만 줄래의 고백이 태윤의 흥미를 끌었다.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줄래는 태윤이 질문해 올 때까지 다음 말을 아꼈다. 그러자 태윤이 어쩔 수 없이 줄래에게 물었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길래?”
아랫입술을 문지르며 대답을 미루던 줄래가 태윤을 응시했다. 한참을 바라본 후 굳게 다문 입술을 조심스레 열었다.
“혹시 내 친아빠가 아니지 않을까?”
“…말도 안 돼. 뭐 나도 그런 억측은 해봤지. 아버지가 바람났다길래. 이 세상에 나도 모르는 이복동생들이 여기저기서 아무도 모르게 살고 있지는 않을까?”
태윤이 입에서 자조 섞인 웃음이 흘렀다. 줄래도 덩달아 헛웃음 터졌다. 두 사람은 왠지 모르게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태윤이 벽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복장을 정리할 동안 줄래는 사무실 안에 놓인 안마 의자에서 휴식을 취했다. 안마 의자의 버튼을 눌러 뻐근한 근육들을 풀어가던 그때 그녀의 시선에 탁상에 놓인 조간신문이 들어왔다. 설핏 봤을 뿐인데도 지나의 죽음에 관련된 기사가 눈에 들어올 정도로 대서특필 돼 있었다.
“지나는 정말 누가 죽였을까?”
줄래가 아무 생각 없이 툭 내던진 말에 거울 앞에 선 남자의 이맛살이 잔뜩 구겨졌다. 의욕을 상실했던 우울한 눈망울이 순시에 희번덕거리더니 잠잠해진 분노가 꿈질꿈질 그 안에서 되살아났다.
“내 앞에서 지나에 ‘지’ 자도 꺼내지 마. 재수 없으니까.”
“무슨 분노조절 장애도 아니고, 요즘 왜 그래, 정말!”
“분노조절 장애? 내가 요즘 정신병자로 보여?”
태윤이 조간신문 앞으로 다가와 집어 던지려던 찰나,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후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듯 그가 볼 안쪽 살을 질겅질겅 씹었다.
잠시 후 전화가 또 울리자 이번에는 줄래의 눈치부터 살폈다.
“그럼 쉬고 있어, 난 서재 가서 전화 좀 받고 올 테니까.”
본부장실 옆에는 태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서재가 하나 있었다. TY그룹의 기밀문서들이 있다는 그 서재 안으로 태윤이 들어갔다.
딸깍. 방문까지 잠가 가며 통화하는 태윤이 낯설었던 줄래는 안마 의자를 켠 채로 일어섰다. 살금살금, 방문 앞으로 가 살며시 귀를 댔다.
숨을 고른 후 온 신경을 귓가에 쏟자 희미하게나마 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쳤어? 그건 나 아니래도! 설마 내 거 될지도 모를 병원에 뭐 좋다고, 목숨까지 걸면서 그래.”
저게 무슨 말이지? 줄래는 혼란스럽다. TY그룹은 계열사 병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마 강화그룹의 아신 병원?
그런데 줄래의 비수를 찌른 충격적인 워딩은 그 뒤에 이어졌다.
“어쨌든 가질래는 건드리지 마, 그 집안에서 그 여자 하나는 두라고. 내 아내니까.”
***
빨 때는 몰랐다.
그런데 끝나니까 알았다.
제가 뭘 했는지, 어떤 사람인지.
사랑이 곧 개연성이라며 불구덩이에 뛰어든 친구들을 어리석다 비난했던 과거의 저를….
질래는, 비웃었다.
9살이나 어린 남자의 성기를 물고 타액이나 질질 흘려가며 가르쳐 달라고 안달복달하던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다.
이런. 알고 보니 제일 미친년이 여기 있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제 얼굴을 관찰하던 남자가 질래의 등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물어왔다.
“어? 그게, 아흐앙.”
이것 봐라! 딴생각을 하다가도, 유두 한 번 살짝 비틀렸다고 ‘아흐앙’이란다.
게다가 이곳은 남의 집. 뼛속부터 귀족 집안인 GH그룹 본가에 있는 병실 겸 진료실 아니었던가.
발가벗고, 남자의 품에 안겨서 신음이나 질러대는 이 꼴이 33년간 몰랐던 나, 가질래의 실체였다니.
“진짜, 뭐가 이렇게 귀여워.”
이 와중에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톡톡, 제 젖꼭지와 놀고 있는 남자 때문에 온몸의 열기가 식을 줄을 몰랐다. 고열에 시달리듯 머리가 팽팽 돌고, 으슬으슬, 전신이 뻐근했다.
은우는 그런 뜨거운 여자가 좋았다. 만지는 족족 반응하는 게 어찌나 색스럽던지. 기력이 쇠했던 그의 성기가 순식간에 벌떡 좀비처럼 일어섰다. 예의 바르게 키운 놈이라 주인을 보고선 까닥까닥 목례도 잊지 않았다.
“봐봐, 장난 아니지.”
“너, 갈 준비 안 하니?”
“왜 자꾸 보내려고 해, 시간도 충분하구만.”
옆에 있던 은우가 어느새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질래 위에 밀접하게 자리를 잡았다. 목울대에서 지분대는 그의 찌릿찌릿한 호흡이 여자의 얼굴을 청순하게, 눈빛은 야살스럽게 만들었다.
“거봐, 원하고 있잖아. 어떻게 다시 왔는데 허투루 보내, 안 그래?”
“힘들지 않을까?”
뺨이 화끈화끈 타올라서 은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성은 아니라는데 몸이 원하는 상태였다. 그게 은우여서인지, 제가 원래 밝히는 여자여선지 질래조차 알 수가 없었다.
혹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인스턴트처럼 금방 먹고 버릴 사이가 돼 버리진 않을지. 저와 함께 같은 목적지를 향해 고속도로를 내달리고 있는 동승자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보통 연인처럼 썸도 타보고 데이트도 해보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처럼 오래 썸 탄 커플도 있어? 황천길도 함께 했는데.”
“으흥응.”
신기한 건, 언제나 몸은 정직하다는 거였다. 저도 모르게 남자가 빨아 재끼는 대로 얇은 신음을 흘렸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그득했던 걱정근심은 정성스러운 애무에 벌써 휴지통으로 처박혔다.
은우가 이미 양손으로 젖무덤을 모은 채 젖꼭지를 함락한 까닭에, 유두에서 시작된 전희가 저릿저릿 전신으로 흘렀다.
“으읏, 골반.”
“잡았어.”
잔뜩 자란 은우의 분신이 아랫배에서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간 또 여린 내벽이 그로 가득 채워질 게 분명했다.
질래의 유방과 유두, 통통한 와이 존까지 까끌까끌한 혓바닥으로 집요하게 운전하며 드라이브하던 남자는 잠시 휴게소에 정차했다.
질래의 귀와 귓불, 뺨을 소중하게 어루만진 후 마치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귀엣말을 해왔다.
“잘 생각해봐, 같이 밥 먹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씻고, 이게 다 데이트 아닌가? 무려 7년이나 동거했는데?”
“7년? 설마 어릴 때 말하는 거야?”
은우는 늘 생각하는 게 엉뚱했다. 그게 데이트라니. 그런데 남자의 은밀한 데이트 타령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맞다. 가질래가 내 기저귀도 갈아줬다며, 다 씻겨줬겠네, 은근 엉큼해.”
“그거야 네가 3살 때부터.”
“그때부터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라는 거잖아.”
“당연히 가족이니까.”
왜 세 살 아이의 앳된 고추가 불현듯 떠오르는 건지, 잘 익은 고추처럼 질래의 얼굴이 새빨개져 버렸다. 여자는 그런 스스로를 강하게 부정해 봤다. 하지만 마치 이런 속내를 들키기라도 한 듯 은우의 시선이 이미 끈적끈적 뇌쇄적으로 변해있었다.
그 광채를 품은 눈망울에 홀린 건지, 아니면 색기로 너울거리는 잘생김에 빠진 건지, 날숨소리만으로도 심장이 뛰는 순간에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렀다.
“돌아보니까, 난 단 한 번도 없었어.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 가질래는?”
왜 갑자기 은우가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그 어색함이 싫어서 뜨끈한 침을 꾸역꾸역 삼켜냈다. 그 찰나였던 것 같다.
“그때도 여자고, 지금도 여자야.”
끼이이익, 연료 떨어진 차처럼 깜빡이를 켠 채로 도로 한복판에 멈춰 선 기분이었다. 오토바이 사고 이후 질래의 삶이 그랬다. 누군가는 저를 구원해 주겠지. 언젠가는 이 위험천만한 도로에서 벗어나겠지 싶던 찰나, 슈퍼카를 몰고 온 남자가 제게 옆 좌석을 내준 것이다. 눈꺼풀조차 껌뻑일 수 없을 만큼 단단히 얼어버린 여자에게 남자는 ‘땡’이라고 외쳐줬다.
“복습하자, 가질래.”
“응?”
“자꾸 그렇게 어벙한 표정 지을 거야? 배웠으니까, 복습해야지!”
갑자기 복습이라니, 당황스러움에 손이 부자연스럽게 목덜미를 만졌다. 발가락은 왜 꼼지락대는지, 질래는 입술을 뭉개며 잘근잘근 씹었다.
은우는 그런 어리숙한 동승자를 보며 지금부터 이 길고 긴 터널을 함께 빠져나갈 것을 선포했다.
“가질래, 돌려 말하지 않을게. 육 구!”
“…오십사.”
“…….”
잠깐의 정적 이후, 질래의 이마에 꿀밤이 떨어졌다.
“여기서 구구단이 왜 나와? 같이 해. 뻘 소리 말고.”
은우와 처음으로 해보는 육 구의 세계.
어설펐지만, 쑥스러운 황홀감을 알려준 신세계였다.
환자인 질래를 배려해 은우가 그녀 위에서 질래를 품었다.
서로의 성기를 함께 맛보며 하나가 된 순간, 그제야 둘은 확신했다.
찌릿한 향락이 지나간 후 진짜 사랑이 온다는 것을….
은우는 그렇게 사랑만 남겨두고 질래 곁을 떠났다.
질래 몸 여기저기에 그를 깊이깊이 새긴 후, 파리로 날아간 것이다.
은우 없는 긴긴 하루.
벌써부터 그의 살내음과 체온이 지독히도 그리운 질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