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선생님, 해 봐!
익명의 제보자라니. 누구를 말하는 걸까.
더 이상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치 제 의지를 대변하는 듯 꽉 말아 쥔 주먹 위로 시퍼런 핏줄이 투명하게 비쳤다.
몸져누워 있다고 해서 강화그룹의 가질래가 바래지는 건 아니었다.
상체를 세워 침대 머리 판에 조심스레 기댔다. 그리고는 탁상에 있는 태블릿 PC를 제 허벅지 위에 펼쳤다.
혹 은우와 관련된 유언비어는 없는지, 익명의 제보자에 대한 단서는 없는지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검색창에 먼저 지나와 관련된 기사부터 검색했다.
평소 기업 관련 악플이나, 허위성 보도에 대해 직접 신고하거나 포털 사이트 관계자에게 연락해 처리했던 적도 많았다. 그래서 질래는 정보를 수집하는 디지털 포렌 작업에 어느 정도 능한 편이었다.
일단 최초 보도된 기사가 어느 언론사인지, 그리고 어떤 기자가 보도했는지부터 파헤치다 보면 대충 그 출처와 기사의 의도가 그려진다.
다음으로는 혹시 모를 목격자를 찾는 작업에 들어간다. 남성향 사이트나, 여성향 사이트 등 수많은 목격담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인터넷을 살펴보던 중 질래의 눈을 사로잡는 댓글 하나가 포착됐다. 지나의 죽음과 관련해 의문점을 제기한 기사에 달린 댓글 이었다.
<12월 25일 새벽 청담동 편의점에서 알바 할 때 일임. 새벽 4시경인가 지나가 떡 돼서 소주 사러 왔음. 대박! 술김에 사인 해줬는데 며칠 후 자랑하니까 친구들이 안 믿음. 그래서 CCTV 보여주려 했더니 싹 다 지워져 있었음. 소오름이. 어차피 한 달 후면 다 지워질 자료긴 했음.>
편의점? 질래는 지나가 변사체로 발견된 건물 근처를 검색한 후 로드뷰를 통해 편의점의 위치를 확인했다. 술 취한 지나가 갈만한 편의점이라면 건물에서 10m 이내의 거리에 위치한 가게일 것으로 유추됐다.
순간 질래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번뜩이는 대화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새벽, 바이크에 올라타기 직전 은우와 나눈 이야기의 일부분이었다.
‘전화 온 거 같은데?’
‘그 여자 거야.’
‘설마 그 여자가 지나야?’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생겼거든.’
그래, 은우가 확인해 보고 싶다고 했었던 거. 바로 지나의 휴대폰이었다.
그제야 질래의 시선에 닭발집 할머니가 두고 간 각 잡힌 쇼핑백이 운명처럼 들어왔다.
***
같은 시간 은우는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 있었다.
남 실장이 개통해 온 새 휴대폰으로 실시간 뉴스를 확인하던 중 그 고운 피부에 잔뜩 스크래치를 냈다.
세상에 제가 지나의 동거남이자, 용의자라니.
분명 본인을 저격한 내용임을 은우도 눈치챘다.
찰나 수많은 선택권이 은우 앞에 펼쳐졌다. 이대로 튀어? 아니면, 떳떳하게 해결하고 가?
그때 운명처럼 지나의 휴대폰을 닭발집 할머니가 들고 온 장면이 떠올랐다.
그 안에 혹 저를 살려줄 만한 증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치, 그게 결정적 증거일 수도 있어.”
은우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이를 귀 기울여 듣던 남 실장이 보조석에서 잽싸게 몸통을 돌렸다.
“결정적 증거라면, 혹시?”
“최지나 휴대폰 제가 갖고 있거든요.”
“그걸 어떻게….”
분명 남 실장의 동공이 심히 와들댔다. 표정에는 무심함이 담겨 있지만, 낯빛만 봐도 그가 얼마나 조바심을 내고 있는지 은우는 훤히 보였다.
“지나, 저한테 오기 전에 분명히 누구 만났죠? 실장님, 사생활까지 관리하는 거로 유명하잖아요. 이제 제 사람인데 침묵하실 건가요?”
“저는 언제나 지금!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남 실장이 돌린 몸통을 원위치로 되돌렸다. 더 이상 눈빛을 들키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사표시였다. 심리전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면서도 허벅지 위에서 까닥거리고 있는 그의 손가락은 안절부절, 초조해 보였다.
그래서 은우는 남이 싸 놓은 똥을 피해가기보단 깨끗이 치우기로 했다. 그게 더 안전하니까.
“남 실장님, 죄송한데 다음 비행기로 좀 미루죠. 그 엄청난 게 기 회장 집에 있어서요.”
“그게….”
방황하던 남 실장의 손가락이 일순간 입가로 향했다. 생각이 많아진 건지 앞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른 후 한참을 망설이더니 끝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기사님, 사모님 저택으로 차 좀 돌려주시죠.”
***
그 시각. 질래는 지나의 휴대폰을 충천시킨 후 전원을 켰다.
다행히 파일 한 개 빼고는 비번이 걸려 있지 않았다.
통화기록과 문자, 사진 등 여기저기 훔쳐보던 질래의 첫 반응은 딱 한 마디.
“말도 안 돼.”
대물을 잡았다. 잠시 동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이 당첨금을 어디에 쓰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각각의 상황극을 연출했다.
어느 정도 극본이 완성되자 이제는 극을 무대에 올릴 연출자를 기다린다. 바로 GH그룹의 기훈희 회장님. 제가 발로 뛸 수 없는 상황인지라 대리 연출자로 기 회장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똑. 똑, 똑.
어김없이 세 번이었다. 기 회장은 은우처럼 일정한 리듬감을 가지고 노크를 했다.
“질래 씨, 들어가도 될까요?”
저 칼 같은 예의 바름에 이젠 질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연배로만 따져봐도 한 참 위인데 계속 존댓말로 쓰니 부담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예, 회장님. 들어오십시오.”
삐그덕.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기 회장이 다시금 등판했다. 물론 그녀의 손에는 질래가 그토록 기다려 왔던 선물도 함께 들려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도 할 말이 있었어요. 질래 씨가 먼저 호출해줘서 통했다 싶었어요.”
“아! 먼저 말씀하시죠.”
“일단 이거부터 받아요.”
기 회장은 들고 온 쇼핑백을 질래의 베게 옆, 그러니까 은우가 누워 있던 자리에 뒀다. 그 쇼핑백 안에는 GH그룹에서 나온 최신 기종의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 은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가질래 인생에 절대 쓸 일 없는 라이벌 일가의 브랜드였다.
“부탁한 대로 기존 번호로 개통했어요, 은우랑 커플 폰인데.”
그 말에 질래의 입술이 씰룩씰룩 저도 모르게 바록거리고 말았다.
“고맙습니다.”
“은우 번호도 저장돼 있어요.”
자꾸 승천하는 광대를 억누른 채 질래는 감사의 표시로 기 회장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마인드 컨트롤을 이렇게까지 못하다니. 낯선 제 모습이 질래도 당황스러웠다.
그런 그녀를 보며 기 회장이 자애로운 미소로 화답했다.
“참, 질래 씨가 하려던 말이….”
온화한 얼굴로 기 회장이 따스하게 응시하자 결심이 선 듯 질래는 꿈질대던 입술을 벌려 목소리를 꺼냈다. 먼저는 편의점 목격담을 쓴 댓글러를 찾아달라는 요청, 그다음은 거절당할 우려가 있는 내용인지라 잠시 망설여졌다.
그걸 기 회장이 눈치챈 덕에 지레 겁먹지 말라고 질래의 마음을 풀어줬다.
“괜찮아요, 얘기해 봐요.”
질래가 마른 침을 넘긴 후 복식 호흡으로 멘탈을 붙잡았다.
“윤태윤 본부장 좀 만나고 싶습니다.”
“윤태윤 본부장이요?”
“아무래도 제 생각에 제보자는….”
질래가 기 회장의 귀에 속삭이자 호선을 그렸던 기 회장의 입술이 순식간에 일자로 쭉 펴졌다.
어질고 선량했던 방금 전의 얼굴과는 달리 매우 진중해진 기 회장이었다.
***
남 실장과 함께 기 회장 저택으로 돌아가는 있는 고요한 차 안.
공항을 눈앞에 두고 차를 돌린 까닭일까. 아니면 용의자로 몰린 억울한 상황 때문일까. 은우는 숨을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남 실장을 통해 익명의 제보자가 윤태윤이란 사실을 확인한 까닭에 차 안의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졌다.
지이이잉.
그런 멋쩍은 침묵을 깬 건 오늘 개통한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였다.
누구지? 하고 번호를 확인하는데 발신인에 ‘가질래’라고 정확히 세 글자가 적혀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은우는 잽싸게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은우야, 나 질래야. 메시지 보면 연락 줘.]
오늘 처음 개통한 휴대폰에 어째서 질래의 이름이 저장돼 있는 걸까. 정말 질래가 보낸 메시지가 맞나 싶어 은우는 우선 이 부분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다.
“남 실장님, 혹시 질래도 오늘 휴대폰 개통했나요?”
“네 두 분, 커플 폰으로 따끈따끈하게 맞췄습니다. 번호도 서로 저장시켜 놨고요. 저도 기 회장님 통해서 받았습니다.”
은우는 질래가 보낸 메시지를 한 번 더 내려다본 후 빙그레, 바닐라 향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달한 미소를 지었다.
“실장님. 파리 가서 정말 열심히 잘 할 테니까 제 부탁 세 가지만 들어주시죠.”
은우는 질래의 메시지를 확인한 후 남 실장에게 먼저 딜을 걸어 보기로 했다.
“예, 그럼 일단 들어나 보겠습니다.”
“반응이 좀… 가서 대충 할까요?”
“콜록 콜록, 으흠.”
은우의 말에 남 실장이 헛기침을 과하게 쏟아냈다. 왜지? 일부러 저러는 걸까. 혹은 곤란한 대답을 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남 실장 특유의 반응인 걸까. 뭐든, 은우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남 실장은 이제 과거와 달리 제 부탁을 거절할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사님 말씀인데, 제가 여부가 있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첫 번째 부탁부터 바로 가죠. 애초에 계획대로 저녁 비행기로 갑시다.”
첫 번째 건의사항을 듣자마자 남 실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시계를 확인한 후 한숨을 내쉬는 걸 보니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벌써 비행기 표만 몇 번을 예매하고 취소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또 기 회장에게 보고도 해야 하는 입장인지라 더욱 난감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사님. 그럼 두 번째는 뭔가요?”
“급한 불 끈 후 공항 가기 전까지는 질래랑 둘만의 시간 좀 가질게요, 가능할까요?”
시계를 보니 현재 시간은 오전 10시경. 화재를 진압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으나 이 와중에 연애라니. 남 실장은 참, 대책 없는 청춘이다 싶었다.
“뭐 간단한 회화 공부나, 워킹 연습이라도.”
“아. 모르셨구나. 저 언어 영재였는데, 외국에서 태어났잖아요, 한국 와서는 질래랑 어릴 때부터 원어민 강사한테 교육받았고요. 10살 때 다시 미국에서 살다가 유럽에도 잠깐 있었어요, 중국어랑 일본어도 꽤 하고요, 불어도 간단한 회화 정도는 가능합니다.”
순간, 남 실장은 은우가 라임을 타며 랩을 뱉어내는 줄 알았다. 자기 어필을 저렇게 잘하는 사람이었나 싶을 만큼, 그간 못 보던 모습이긴 했다.
“아, 굉장하시네요.”
얼굴만 뻔지르르 한 일자무식인 줄 알았건만 4개 국어를 한다니. 갑자기 남 실장 눈에 사람이 달라 보였다.
은우도 제가 말해 놓고도 뿌듯했는지 어깨를 으쓱으쓱거리며 잠시 동안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세 번째는 뭡니까?”
그 꼴을 못 보겠는지 남 실장이 바로 질문했다.
“아! 이게 제일 중요해요.”
왠지 세 번째 항목이야말로 핵폭탄급 부탁일 것만 같은 불길함에 남 실장이 잔뜩 경직된 얼굴로 은우를 응시했다.
“지금부터 제가 뭘 하든 못 보고, 못 들은 거로 하고 참아 주시면 됩니다.”
“네?”
무슨 말이든 찰떡같이 알아듣던 남 실장의 눈이 한없이 확장됐다. 번역기에 오류라도 난 듯 은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어리둥절한 표정도 잠시.
은우가 긴 팔로 휴대폰를 멀찌감치 든 채 얼짱 포즈를 취하는데. 왜 저러지? 셀카라도 찍을 모양인가. 고개가 갸우뚱해질 때쯤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어? 은우야! 뭐야? 영상통화?
사랑스러운 질래의 목소리. 그 어여쁜 얼굴을 보니 그제야 말도 안 되는 기사 때문에 분쟁 중이었던 마음에 평화 통일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심신에 평안이 찾아오자, 남자는 돌연 질래에게 장난치고 싶어졌다.
“선생님~~ 해봐!”
-응?
화면 속 질래는 큰 눈만 껌뻑 일 뿐이었다. 얘가 왜 이러지, 물음표를 담고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이따가 몇 시간만 한의원 좀 차리려고.”
-한의원?
점점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혼란해지는데, 그런 반응은 보인 건 질래 뿐만이 아니었다. 저한테는 무뚝뚝하게 말하던 어린 이사님이 제 애인에게는 꿀 떨어지는 눈빛을 보내다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남 실장은 괜스레 서러웠다. 그래서 결국 은우의 부탁대로 눈을 닫고, 귀를 닫는, 속 편한 선택을 했다.
그럼에도 은우의 밑도 끝도 없는 직행열차는 질래를 향해 폭주했다.
“우리 질래, 아까 못 먹인 보약 먹이려고.”
-보약? 그거, 그렇지 않아도….
질래가 카메라 방향을 바꿔 기 회장이 갖다 준 보약 박스를 비췄다.
“그거 알아? 감기도 먹는 약보단 주사가 직방인 거.”
-…….
이후로 질래는 모든 대답은 속으로만 했다. 딱 봐도 차 안인 게 운전석에는 기사님이, 보조석에는 남 실장이 앉아 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 방 안에는 지금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잠시 방황했는데 이제야 가야 할 길, 제대로 찾았거든.”
-가야 할 길?
“날 한의사로 만들어줄 유일한 여자한테….”
-그 유일한 여자가 나야?
“가고 있다고, 지금.”
-…….
“보약 넣자, 질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