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세운 남자가 갈 곳
사람이 가장 어렵다.
사람은, 정답도 없다.
톱스타 지나의 죽음이 알려준 그날의 교훈이었다. 실로 충격이었다.
하필, 저가 살던 그 지하 사무실에서 목맨 시신으로 발견되다니, 게다가 한 달 전이란다.
설마하니 은우가 떠난 직후 질래가 숨어 있던 그 벽장에서 홀로 자살 기도라도 한 걸까.
질래를 사랑했을 뿐인데, 누군가는 거부당했다며 상대를 죽이려 들고,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별의별 생각에 근거 없는 죄책감이 밀려오던 그때 질래가 채널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러 패널이 나와서 ‘지나’ 사건을 두고 토론하는 내용이 이어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 달 만에 사람이 백골화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겨울인데요.
앵커가 국과수 출신 패널에게 한 질문이었다. 사실 뉴스를 보고 은우도 갸우뚱해진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러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패널 한 명이 앵커와 카메라를 번갈아 본 후 입술을 달싹였다.
-수사팀은 시신 상태를 봐서 한 달 정도 된 거 같다고 유추했지만 사실 잘못된 거죠.
-그렇다면 한 달 안에 백골화되는 게 불가능하다. 이런 말씀이신가요?
-아니요, 가능은 합니다. 실제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병운 사건 때도 산에서 한 달 만에 백골화된 시신으로 발견된 사례가 있습니다. 다만 그때는 습한 여름이었죠.
-그랬죠, 그때는 무척 더운 여름이었습니다만.
-지나 씨의 사망 시점은 약 한 달 전. 그러니까 정확히 5주 전이라고 예측한 이유는 분명 작년 12월 24일 녹화 현장에 등장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 같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국과수 출신의 패널이 말끝을 흐리자 모두가 그의 검붉은 입술에 주목했다.
-타살, 타살이라고 확신합니다. 경찰이 발견한 당시 지하 사무실은 찜질방처럼 무척 더웠다고 했죠. 라디에이터와 온열 기구 등이 현장에 있었고요. 더 신기한 건 양식용 구더기,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낚시용으로 쓰이는 구더기를 시체 주변에 인위적으로 뿌린 흔적도 발견됐다는 거죠.
-일부러, 백골화를 앞당겼다. 그런 의견인 건가요? 왜죠?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음…. 그 점이 앞으로 경찰들이 밝혀야 하는….
삐빅. 국과수 패널의 결론 없는 대답에 질래가 아예 TV를 꺼버렸다.
“이은우 들었지? 타살일 확률이 크대.”
“그러게.”
“그니까 죄책감 갖지 말라고, 혹시 자살했을까 봐. 그게 네 탓일까 봐 걱정하고 있었잖아. 아니야?”
질래를 응시하던 은우의 눈빛이 바닥으로 향했다. 그녀가 제 생각을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네 탓 아니라고.”
“그래. 그래도 사람이 죽었으니까, 하필 그 집에는 내가 살았고.”
은우가 마른 입술은 말아 문 후 촉촉해진 표피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내 입술을 가린 채로 얼굴을 괬다. 내내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질래 역시 그런 은우를 살피다가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옳은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내가 증인이잖아. 너 범인 아니라는 거….”
“동시에 공범으로 몰릴 수도 있다고는 생각 안 해 봤어? 난 그게 제일 걱정 돼.”
미간을 한껏 좁힌 은우가 폐부에서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한 단계 한 단계,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더 높은 난이도의 방 탈출 게임이 제 앞에 펼쳐진 기분이었다.
질래 역시 은우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똑, 똑, 똑.
누군가가 다급하게 방문을 두드렸다.
“일어났니?”
소프라노 톤처럼 격양된 목소리. 기 회장이 뉴스를 보고 방으로 온 게 틀림없었다. 은우가 문 쪽으로 가다가 벽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근육을 이완시키려 양 볼을 한껏 부풀렸다가 공기를 쭉 빼냈다. 딸깍. 문고리를 돌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덤덤하게 기 회장을 맞이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그래, 뉴스 봤니?”
“지나 소식 말씀하시려는 거죠?”
“은우야, 이 할미 말대로 해라. 지금 당장 파리로 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오므렸던 입술이 탄력 있게 제자리를 찾을 때쯤 은우는 제 생각을 털어놓았다.
“제가 살던 집이긴 한데 저랑은 관련이 없어요, 꼭 일찍 갈 필요가….”
“질래는 내가 돌보고 있으마. 걱정 말고 가.”
“이렇게 가면 꼭 도망치는 거 같잖아요.”
“도망치는 게 아니라, 큰일을 앞두고 집중하라는 거지. 네가 죽인 거 아니잖아, 안 그래?”
“…….”
“참고인 조사엔 어차피 강제성은 없으니까.”
원래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기 회장이 가장 빠른 파리행 티켓을 이미 끊어뒀다는 것이다. 잠시 동안 고민하던 은우가 질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찬성, 네가 빨리 갔음 좋겠다에 한 표.”
질래가 야속하게 기 회장의 편을 들었다.
“진심이야?”
은우의 질문에 질래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의 얼굴엔 실망감이 드리워졌다.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챈 기 회장이 겸연쩍은 얼굴로 은우와 질래를 번갈아 봤다.
“둘이 할 얘기 있음 정리하고 나오거라! 남 실장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필요한 건 가서 구입하고, 챙겨둔 캐리어 들고 얼른 나와.”
애써 제 시선을 피하는 질래를 봐서라도 담담하게 떠나야 하는데 은우에게는 그게 제일 자신 없는 일이 돼 버렸다.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기 회장의 뒷모습을 확인한 후 은우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콧등에 제 코를 비비었다.
“보약 먹었으니까, 빨리 회복할 수 있지?”
“보약?”
방문을 나선 줄 알았던 기 회장이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난감하게 끼어들었다.
“키, 키스요.”
“키스?”
얼굴이 잔뜩 상기된 질래가 괜한 오해를 피하겠다고 꺼낸 어설픈 변명이었다.
세상에 보약이 키스라니. 제가 말해 놓고도 당황해서 열을 식힌다는 게 오히려 더 열 뻗치라고 마른세수나 하고 있었다.
찰나 질래의 머릿속에 은우와 하체를 맞댄 채 적나라하게 헐떡이던 야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질래가 귀여웠는지 심각했던 기 회장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번졌다.
“보약이 그렇게까지 부끄러운 일인가, 그렇지 않아도 질래 씨를 위해서 보약 주문했는데. 어떻게 알았나 싶어서요.”
“아… 보약이요.”
정말 보약이 있었구나. 질래는 영혼이 이탈한 듯 혼잣말을 되뇌며 가만히 멍때렸다. 도둑이 제 발 저는 격도 아니고, 가만이라도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실로 귀까지 화끈화끈한 게 잘 익은 사과가 따로 없었다. 마치 제 위로 비닐하우스가 씌워진 듯, 그 고온다습함에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 발그레한 볼을 지닌 순진무구한 여자의 모습이 은우 눈에는 마냥 사랑스러웠다. 저런 애인을 두고 떠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싸하다 못해 아려왔다.
그래서 도발해버렸다. 기 회장이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한 후 은우는 한쪽으로 삐뚤게 말아 올린 입술을 곧장 질래에게로 내렸다.
“후우.”
그의 야릇한 숨결에 질래는 또다시 심장이 뛰었다. 얼굴과 얼굴이 그만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가질래.”
“응?”
촉촉이 젖은 은우의 아롱아롱한 눈동자, 그 안에서 쏟아지는 뇌쇄적인 눈빛이 마치 저를 유혹하는 듯했다. 쫍.
“키스가….”
빨갛게 도드라진 여자의 윗입술을 빨았다… 놓는다.
“그렇게 하고 싶었어?”
“그게 아니라….”
“하자, 그럼.”
숨이 거칠게 가빠졌다. 말캉말캉한 온기가 그대로 뭉개지길래, 안을 열어 까끌까끌한 살덩이를 쭈욱 흡입했다.
시작은 가볍게. 말랑말랑한 젤리 먹듯 입안에서 혓바닥을 굴렸다.
끈적한 타액이 질척질척 점점 더 격렬하게 들러붙어 점막 구석구석을 점령했다. 부드러운 살덩이로 뜨거운 마음을 주고받았다. 새하얀 치아 숲을 노닐 듯 문지르며 서로를 맛보는 속 깊은 시간. 서로가 얽히고설킨 탓에 온몸이 홧홧해지고, 속절없이 맥이 뛰었다.
찔꺽찔꺽, 야한 효과음과 신음이면 충분했던 최상의 보약. 이성을 녹일 만큼 달달했고 효과 또한 직방이었다.
어느새 말없이 우뚝 선 남자의 하반신이 여자의 배를 쿡쿡 찌르고 있을 만큼, 달큼한 자양강장제가 따로 없었다.
“섰다.”
“가야지. 이은우.”
“세운 남자가 갈 곳이 어디겠어!”
촉. 눈꺼풀을 핥았다 빠는 아찔한 소리. 후끈한 감각에 바르르, 여자의 피부가 반응했다.
어쩌자고 서로의 흥분점을 건드린 건지, 은우가 정신없이 제 바지 버클을 풀어낼 때쯤이었다.
“으음. 으흠.”
문밖에서 아주 인위적인, 날 선 기침 소리가 들렸다. GH 일가는 뭔 일 처리를 이렇게 다이렉트로 하는지, 말 안 해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은우와 떠나야 할 남 실장이 진즉에 문 앞에 서 있던 것이다.
“갈 곳을 잃었네.”
“저기서 기다리잖아, 이은우 네가 가야 할 곳.”
질래가 문 쪽을 가리키자 은우가 허망한 표정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제 물건을 바지 안에 넣었다. 티 나지 않도록 잘 정돈했다.
“남자는 취향이 아니라서.”
“에흠. 으흠.”
대놓고 심기 불편함을 드러내는 남 실장의 신호가 문밖에서 또다시 들려왔다.
“저렇게 눈치 없는 남잔 더더욱, 별로라서.”
“듣겠다. 풋.”
농담과 함께 환한 미소를 선물하는 은우가 빛나 보였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모습마저도 화보가 되는 이 남자가 질래는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았다.
성큼성큼.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온전치 못한 몸 때문에 문 앞까지 배웅해 주지 못하는 현실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걸 감추기 위해 방금 전 은우가 정성스레 닦아 준 새하얀 치아가 훤히 드러나도록 빙그레 입꼬리를 최대한 양쪽으로 끌어올렸다.
은우 역시 질래가 일부러 웃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머릿속에, 마음속에 깊이, 깊이 그녀의 웃는 얼굴을 카피했다.
꼭 이 모든 상황이 꿈만 같아서 제게 온 행운이 믿기지 않아서 은우는 동양화같이 청초하면서도 서양화처럼 화사한 여자를 잠시 동안 멍하니 응시했다.
그 물기 가득 찬 눈매를 본 질래가 얼른 남자에게 힘을 실어줬다.
“다 나아서 셀러브리티 자격으로 당당하게 패션쇼 보러 갈게. 그러니까 성공할 때까지 치열하게 잘 살다 와!”
쿵!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심장이 떨어졌다. 발끝까지 추락한 마음은 정착지를 모르는 듯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갔다. 정말 은우를 보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은우. 지금부터 서로 보지 않기다. 뒤돌아서 얼른 가.”
“알겠어,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쪽.
“사랑해.”
그녀의 이마에 제 온기를 전한 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과감하게 틀었다.
얼굴을 보면 떠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이를 악물고 런웨이를 걷는 심정으로 문 쪽으로 향하는 은우였다.
질래 역시 그에 등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마음이 허했다.
이럴 때 보면 사랑은 어려웠다.
그런데 이별은 그보다 더 아픈 거였다.
이제는 제각각 번데기가 되어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할 때라며 훗날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제일 예쁜 나비가 되어 은우를 찾아가리라. 질래는 일순간 밀려오는 슬픔을 이겨내려 더듬더듬 리모콘을 찾았다.
전원을 꾹 누르자 TV에서는 아침에 봤던 시사프로그램의 2부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취재 기자와의 토크였다.
채널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만약 타살일 경우 강력한 용의자로 함께 산 동거남이 꼽히고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원래 고인이 발견된 건물주가 지나 씨 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하 사무실 방에 내연남과 함께 살았다는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익명의 제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