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악마를 보았다
“공범이 있다고?”
기 회장의 떨리는 목소리가 질래 귀에도 들렸다.
공범이 있다는 건 범인이 두 명이란 소리일까? 질래는 진실이 두려웠다.
혹,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범인이 있을까 봐. 질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밀려오는 불안감과 초조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차가워진 손을 잡아 준건 은우였다.
따스한 눈빛으로 얼어버린 여자의 심장을 서서히 녹여줬다.
“검거 직전이라는 구나.”
그사이 통화를 끝낸 기 회장이 저벅저벅 방으로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비장해 보이는 게 사안이 심각해 보였다. 그 팽팽한 긴장감과 밀당하던 은우가 먼저 침묵을 깼다.
“범인이 누군데요? 두 명이라는 거죠?”
“오피스텔에서 칩거 중이라는 계속 문을 안 열어주고 있나 봐. 이 근처인가 보더라.”
“어딘데요?”
“범인이 보고 싶니?”
강력하게 제 의사를 피력하는 은우와 달리 질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혹, 제가 예상한 사람들이 맞을까 봐 그녀는 진실을 피하고만 싶어진다. 때론 모르는 게 더 약일 때도 있는 법이니까. 어차피 알게 될 일을 굳이 서둘러서 알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은우를 알게 된 그 설렘만으로도 충분한 하루였다.
“어떤 인간들이 뭘 노리고 우릴 죽이려고 한 건지 그 면상 좀 봐야겠어요. 프랑스 가기 전에 볼 수 있을까요?”
기 회장은 은우의 제안에 잠시 고민한 후 다시금 휴대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뭐가 그리도 비밀스러운지 등을 돌린 채 또 문밖으로 나갔다.
“권 비서, 수사팀 누구누구 있다 그랬지? 안전은?”
기 회장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문제는 제 손을 잡고 있음에도 질래가 벌벌 떨고 있다는 거였다. 은우는 얼른 제 품 안으로 그녀를 끌어들였다. 범인이 검거됐다는 말에, 혹 강가에 떨어지던 그 순간이 떠오른 건지, 초점을 잃은 듯한 그녀의 눈빛이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많이 무서워?”
“혹시라도….”
“윤태윤일까 봐, 그래?”
“아니….”
목이 콱 메어 오길래 질래는 얼른 마른 침부터 넘겼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은우가 재빨리 탁상에 있는 생수통을 열어 그녀의 입가에 대주었다.
“일단 마셔. 마음부터 진정시켜, 이야긴 나중에 해도 되니까.”
왜일까. 사랑하는 그녀의 눈매가 순시에 깊어졌다. 대체 뭐가 두려운 거지. 제가 알던 질래와는 다른, 낯선 모습에 은우도 당황스러웠다.
범인이 잡혔다고 하면 저처럼 엄청 궁금해할 줄 알았건만. 너무 아프고 나니 겁이 많아진 걸까.
하긴 보통 멘탈로는 이 한 달 새 벌어진 일들을 감당하기 어려우리라.
질래는 마치 오랜 갈증을 겪은 사람처럼 생수를 벌컥벌컥 마신 후 이내 저를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남자의 목울대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후 촉촉하게 생기를 되찾은 입술을 조심스레 달싹였다.
“예전에 봤던 영화가 떠올랐어. 아들이 자기를 죽이는데 혹시라도 나중에 범인으로 몰릴까봐 죽어가는 와중에도 아들의 손톱을 삼키는 거야.”
그 내용이 무슨 연관인가 싶어 의아하긴 했지만 은우는 떨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묵묵히 들어줬다.
과거에도 특별한 사이였지만 오늘부터는 정식으로 내 여자니까. 은밀한 곳을 함께 나눈 내 사랑이니까. 그 생각만으로도 이 심각한 상황에 입가가 줏대 없이 살랑였다.
“근데, 나 그 엄마 심정 알 것 같아.”
“엄마 심정?”
질래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은우는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눈치챘다.
“…걱정하는 게 윤태윤이 아니구나.”
엄마를 일찍 여읜 탓에 동생 줄래에 대한 안쓰러움을 항상 지니고 살았던 장녀, 질래였다. 물론 줄래에게 질래 언니란 열등감의 근원이자 넘지 못할 거대한 장벽 같은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그래도 질래에게 줄래는 애틋한 핏줄이었다. 절대로 외면할 수 없는 동생이었다.
은우가 그런 질래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괜찮아. 줄래는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지? 그럴 리 없겠지? 아무렴….”
질래가 알아서 제 양팔로 은우의 넓은 몸통을 껴안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어린아이처럼 매달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렇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안을 수 있는 남자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속으로 고백했다.
네가 내 남자여서 든든하다고. 네 심장 뛰는 소리에 설레서 내 멈춰 있던 심장도 함께 뛴다고. 자꾸자꾸 그와 함께 있고 싶어서 큰일이었다. 내일이면 프랑스로 떠날 은우건만, 왜 이렇게 계속 의지하게 되는지….
“뭐가 진실이든, 가질래는 내가 지킬 거니까 걱정하지 마.”
“…걱정 안 시킬게.”
“시켜도, 괜찮아…. 내가.”
“…….”
“더 많이 사랑하니까.”
남자가 여자의 이마에 수줍은 뽀뽀를 내렸다. 개기월식 중이던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지며 빛을 발하는 시간. 남자가 저를 보며 환하게 웃는 찰나 질래의 마음속 새벽이 홀연히 지나갔다. 순리대로 동이 텄다.
두려움도 이기는 더 큰 사랑이었다. 이은우는 가질래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 사이 경찰 측과 어느 정도 합의를 본 듯 통화를 마친 기 회장이 은우와 질래 앞으로 다가왔다. 질래는 다급하게 그를 밀어냈지만 그럴수록 은우는 그녀의 등을 꼭 감싸 안았다.
“힘쓰지 마, 다쳐.”
“그래도 회장님 앞에선.”
“볼수록, 세트 같구나. 너희 둘 말이야.”
민망해도 어쩔 수 없었다. 감춘다고 감춰지는 감정도 아니었다. 초호화 병실로 꾸며진 방안에는 이미 애정전선이 상륙해 있었다.
기 회장이 괜스레 헛기침을 내 본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용의자 말이야, 볼래? 말래.”
“…혹시 제가 아는 사람일까요?”
곧 알게 될 사람이긴 했지만 은우는 기 회장을 조심스레 떠보았다. 그러자 기 회장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약간 기울이는 게 모호한 제스처로 답해왔다.
“글쎄, 범인이랑 아는지 모르는지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남 실장도 이 근처라는데 같이 가봐. 보면 알겠지.”
맞는 말이긴 했다. 조금 더 미리 안다고 범인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은우가 기 회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남 실장을 만나서 사건 현장으로 향하였다.
질래와 저를 죽이려 했던 악마의 실체와 마주하는 순간이 드디어 코앞으로 다가왔다.
***
돈 있는 사람들만이 특권처럼 거주할 수 있다는 강남의 꽤 고가 오피스텔 앞.
은우와 남 실장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경찰들이 막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시점이었다.
중대한 범죄혐의가 인정됨으로써 이들에게는 긴급체포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 열린 문 사이로 은우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서는데 발에 차이는 건 뒹굴대는 텅 빈 술병뿐. 고급 가죽 소파에는 술에 찌든 남성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이 앉아 있었다.
아직은 실루엣에 불과했지만 경찰들이 그에게 수갑을 채우는 찰나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는데…. 제길! 낯설지가 않았다. 그것도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범인이라니.
납득도 안 되고, 이해도 안 갔다. 정말 저 사람이 범인이라고? 왜? 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째서….”
휘진 형이 왜? 고개를 숙인 남자는 은우의 첫 마디에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비릿한 미소로 은우를 노려봤다.
이름 함휘진. 나이 스물일곱 살. 강남 일대에서 제일 잘나가는 선수로 꼽히는 그였다.
그런 그가 왜 저를 헤치려 했던 것일까. 기 회장 덕분에, 경찰서로 연행되기 전 잠시 대화할 시간이 주어졌다.
“부잣집 년 하나 물었다더니, 대단하네, 이은우. 부럽다. 네 팔자.”
미안하단 말로도 부족한 판국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따지듯 분을 토해내는 남자를 보니, 그간 휘진 형에 대해 잘 못 알아도 단단히 잘 못 알았구나 싶다.
그동안 보여줬던 예의 바른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뻔뻔한 태도에 혀가 절로 차졌다.
간판급 선수치고 매너가 좋았고 발렛 파킹으로 들어온 저를 유독 잘 챙겨줬던 형이었다.
일 년 전에는 같은 동호회에서 바이크 라이딩을 함께 할 정도로 취미까지 비슷한, 마음 통하는 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자꾸 이 질문이 입가에서 맴돌았다. 혹 제가 모르는 질래와의 무슨 악연이라도 있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랬어, 형?”
“넌 왜 그랬는데.”
“내가 형한테 뭘 잘못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돌아보면 그와 금전적으로 얽힌 것도 없었다. 딱 하나 걸린다면 유흥주점에서 선수로 함께 일 해보자는 제안을 거절한 일 외엔 딱히 트러블도 없었다.
“혹 내가 형 마음을 상하게 한 게 있다 쳐, 근데 그게 나랑 내 여자 친구를 죽일 만큼의 큰 죄였어? 내가 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휘진은 차마 은우를 보지 못한 채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 무책임한 태도가 은우를 더욱 분노케 했다. 침상에 누워 있는 질래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그의 골반을 똑같이 아작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돈 받고 한 일입니다.”
“돈이요?”
옆에 있던 경찰이 담배꽁초를 버리듯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문제는 그 불씨가 끝내 은우의 분노를 대형 화재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은우는 있는 힘껏 휘진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곁에 있던 남 실장과 경찰이 급히 중재에 나섰다.
“잡혔으니까 대가를 치를 겁니다. 그러니….”
“질래가 지금 얼마나 고생 중인지, 알아? 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기나 해! 아냐고!”
쾅쾅쾅쾅! 그때였다.
한쪽에서는 다른 경찰들이 잠겨 있는 방을 열고자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용의자는 두 명이라고 했는데.
내 바이크를 손 본 게 휘진 형이라면 의뢰자는 대체 누굴까.
“그러니까 저 안에, 형을 돈 주고 고용한 사람이 있다는 거죠?”
순식간에 분노 게이지가 머리 꼭대기까지 상승했다. 마그마처럼 뜨거운 기운이 온몸에서 콸콸 흘러넘쳤다. 은우는 경찰들 틈새로 뛰어가 온몸으로 의뢰인이 있다는 방문을 부숴버릴 뻔했다. 다행히 남 실장이 은우를 뜯어말리긴 했지만 이를 지켜본 휘진의 입에서 쏟아진 뻔뻔한 말들이 은우를 아프게 했다.
“황 마담한테 공사 친 돈 빼돌린 거 걸렸어. 이미 다 쓴 거 안 토해내면 죽이니 마니 하는데 그럼 어떻게, 나도 살아야지.”
“형 살라고, 내 오토바이에 손을 대? 형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쓰레기네. 폐기 처분하기도 아까운 쓰레기였어.”
그때였다. 경찰 한 명이 드디어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 안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 엇비슷한 하이톤이 울려 퍼졌다. 휘진 형과 범행을 계획한 용의자가 경찰들의 접근을 철저하게 거부 중인 것이다. 사람까지 죽일 뻔 해놓고 뭐가 그리 억울해서 소리를 지르는 건지.
헝클어진 머리칼, 엉망이 된 차림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 마냥 죽상인 피의자는 서서히 방에서 끌려 나왔다. 역시나 만취한 듯 독한 술 냄새가 거실까지 진동했다.
은우는 그 실체를 설핏 확인한 순간. 너무 어이없어서 입에 단단한 족쇄가 채워지고 말았다.
세상에는 만나지 말아야 할 악연이 있다더니. 바로, 저 사람이구나.
“겁만 주려 했지 정말 죽이려고 했던 건 아니라고요. 어? 저 봐요, 죽었어요? 멀쩡히 살아 있잖아! 근데 무슨 살인 미수야.”
그런 악연을 은우는 눈앞에서 확인하고 말았다.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까지도 자기반성이라곤 이만큼도 없는, 악마.
은우는 오늘 지독하게 악취 나는 그런, 악마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