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엄청 젖다
호흡이 죽었다.
진짜로 뇌사 상태인 듯, 세상이 멈췄다.
“너도 날 원한다고 했어.”
“…내가?”
“너랑 나, 다 벗고. 온기 나누면서 그렇게 맹세했어. 서로한테.”
삐이익. 이성이 멎었다.
왠지 알 것만 같았다. 혼절해 있던 내내 꿈속에서 저랑 정사를 나누던 남자가 은우였다니.
꿈이 아니라 추억이었다는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얼굴도, 심장도 터질 것만 같았다.
들숨, 날숨, 호흡하는 남자의 다부진 가슴이 질래 위에서 함께 날뛰고 있었다. 빠른 템포의 심장 소리가 질래의 고막을 파고들어서 무력하게 듣기만 했다.
“기다리려고 했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그래서 가질래한테 숙제 주고 가려고. 첫째.”
내려다보는 적나라한 그의 눈빛에 데일 것만 같았다. 뜨거운 숨결이 콧등을 화끈하게 스쳐 지나갔다.
“나 없는 동안, 나를 기억해 내.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지, 뭘 했는지. 할 수 있지?”
“…그게 내가 일부러….”
“둘째!”
은우는 변명할 틈을 주지 않았다. 바로바로 다음 과제를 제시했다.
“이게 제일 중요해. 몸 다 회복하기…. 나는 나 대로 부끄럽지 않게 살다 올게. 이것도 할 수 있지?”
“…….”
“마지막으로 이은우 기다리기.”
“…….”
“돌아오는 날, 서로를 가질 거야. 남자 대 여자로.”
솔직히 싫지 않은 선전포고였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귀속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불쾌함이 아니라 도리어 온전해지는 든든함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지독한 외로움을 뚫고 빛이 스며들 듯, 은우가 제 위에 뜬 태양 같아 보였다. 그 태양을 오래오래 보고 싶어서, 질래는 은우에게 부탁이란 걸 해본다.
새롭게 마음먹었을 때 질래가 늘 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니까. 나름, 그와 잘 지내보고 싶다는 의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한 것이기도 했다.
“씻고 싶어.”
“씻겨줄까?”
그런데 남자는 늘 질래보다 몇 걸음을 앞서갔다. 아니, 아예 대놓고 질주했다.
“도와줄 분 불러줄 수 있냐고.”
“머리 감을래?”
“그러니까, 너 없는 동안 나 좀 돌봐 줄 수 있는….”
“내가 해준다고.”
은우가 뒷말을 싹둑 잘라먹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질래를 내려다본다. 어느새 등과 무릎 밑으로 그의 굵직한 팔이 파고들었다.
“들 거니까, 몸에 힘 빼.”
“…….”
싫다고 또 말하지 못했다. 저를 안아 든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가 숨 막힐 정도로 화보 같았다. 길고 하얀 손으로 직접 머리를 감겨준다니,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렸다.
혼자서 감정 컨트롤 하느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은우는 어느새 방에 딸린 욕실 쪽으로 질래를 이동시켰다.
병실 전용으로 설계된 공간이라 그런지, 화장실마저도 모든 구조가 환자에게 최적화돼 있었다.
고급 헤어숍에나 있을 법한 전동 샴푸 의자에 은우가 질래를 조심스레 앉혔다.
쏴아아!
질래의 귓가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은우가 손으로 물 온도를 맞추고 있는 듯싶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전신이 파르르 떨리는지. 혹 젖힌 고개 때문에 얼굴이 못생겨 보이는 건 아닌지 걱정되던 그때였다.
또 통한 걸까. 얼굴 위로 수건이 얹혀졌다.
“신경 엄청 쓰이나 보네, 편하게 있어. 다 해 줄 테니까.”
그의 말대로 시야에서 은우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그의 세심한 배려가 머리를 적시는 온수만큼이나 따뜻했다.
“너한테 자꾸 신세 져서, 미안해.”
입술을 벌릴 때마다 포근한 수건의 감촉이 입술에 그대로 닿았다. 그런데 질래의 사과에도 손끝으로 제 두피를 자극하는 남자는 별말이 없었다. 시야가 차단돼서 그런지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졌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내가 미안하지.”
한 참 후 들려 온 그의 대답이었다.
“이게 왜 너 때문이야.”
“오토바이, 그걸 내가 타자고 했으니까.”
“오토바이? 어쨌든 그래서 샴푸 해주잖아.”
“…….”
“그거면 됐어.”
“…….”
“충분히 고마워.”
고맙다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는 은우는, 순간 마음이 저렸다.
제 손안에 있는 물고기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새삼 실감하는 중이다.
그녀의 몸을 상하게 한 것도 그랬지만 그거면 됐다는 가질래의 진심이 은우의 지난 상처를 덮어 줬다. 전신에 새살이 돋듯 꼬여 있던 마음에 치유가 시작됐다.
“맞아, 내가 이래서 가질래를 좋아했어,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래, 넌 날 참 잘 따랐어, 졸졸 쫓아다닌 거 기억나?”
어느덧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제법 익숙해졌다. 전신이 녹녹해지는 느낌. 굳어 있던 긴장감이 풀려가던 찰나였다.
“따뜻한 사람.”
“내가?”
“응, 가질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따뜻해.”
말도 안 돼. 누구도 질래한테 따뜻하다고 이야기해 준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제 가족조차도 너무 냉철하고 완벽해서, 그 지독한 예의 바름에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런데 저를 따뜻하다고 말해주는 이 남자 때문에라도 정말 따뜻한 여자이고 싶어졌다.
“아니면,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이거나.”
정답이었다. 유독 너와 난 그랬다. 그의 손이 뜨끈한 온수와 함께 두피를 자극할 뿐인데 전신이 찌릿찌릿 뜨겁게 전율했다.
그의 터치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와 대화하던 중 정말 인생의 소울메이트를 만난 것만 같은 충만함 마저 들었다.
남자만이 오롯이 저를 내려다보는 이 상황 속에서 질래는 이 사람에게 더한 모습이 까발려져도 괜찮을 것만 같은 믿음이 생겼다.
계속 이리저리 도망만 다니던 그녀에게 확신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그래, 너 갔다 오면 같이 자보자.”
“정말?”
은우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자자고.”
“가질래가?”
애초에 그럴 계획이긴 했지만, 뭐지? 순간 당황한 은우가 그만 샤워기를 놓치고 말았다. 물이 사방팔방으로 화재를 진압하듯 정신없이 튀었다. 그만큼 심쿵했던 그 한 마디! 가질래 입에서 먼저 자자는 워딩이 나오다니, 꿈만 같았다.
남자는 그런 말에 약한 동물인데 병신같이 꼴렸다. 자자는 그 한마디에 페니스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는 여자가 은우 눈에 되게 섹시해 보였다. 수건 밑으로 떨어진 여자의 가녀린 목선이 빨고 싶게 생겼다. 당장 뱀파이어라도 되고픈 심정이었다.
사실 질래는 이미 귓불까지 빨갛게 물든 후였다. 제가 질러 놓고도 그 민망함에 어찌할 바를 몰라 수건을 방패 삼아 스스로 그 부끄러움을 감내해 내고 있었다.
꿈속의 그 남자가 은우라면, 정말 둘이 잔 사이라면, 서른셋 인생에 더 이상 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을 준 남자에게 정착하고 싶어 졌다.
아니, 저도 남자를 맛보고 싶었다.
좋았으니까. 그의 애무가 묘한 중독을 불러일으킨 듯 또 한번 알고 싶었으니까. 더 은밀하게 더 깊은 곳으로, 남자가 주는 쾌감을 알고 싶어졌다.
이심전심, 또 통한 걸까.
“오토바이 사고는 내가 쳤지만….”
본 연주 전 야할 것 같은 전주가 나지막한 중저음으로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이번 브레이크는 가질래가 끊었다.”
“응?”
두근두근, 두근두근. 나대는 심장의 브레이크도 이미 끊어진 지 오래였다.
“오늘부터 가질래는.”
“…….”
“이은우가 갖는다.”
딸깍. 욕실 문이 잠겼다.
돌연 샤워기의 물 흐르는 소리가 멈췄다.
‘어쩌자는 거지?’
혹 내리막길인가 싶어 질래는 끊어진 브레이크를 임시방편으로라도 잠시 이어보려 했다.
“나, 환잔데.”
“그러니까, 조심해… 조심할게.”
“무슨 말이야?”
“너무 좋아도 들썩이지 말고 잘 참으라고.”
“…….”
꾸울꺽. 마른 침을 티 안 나게 천천히 넘겼다. 벌써부터 찔꺽찔꺽 야한 소리가 귓가에서 생생하게 들려왔다. 남자가 제 귓바퀴부터 스무스하게 맛보는 듯싶었다.
지독한 유혹이었다.
불붙은 남녀의 끌림은 더한 것도 괜찮지 않을까란 합리화와 함께 더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어린 수컷의 구애에 모든 걸 놔버린 여자가 됐다. 그것도 샴푸만 해주겠다는 남자 앞에서 말이다. 무방비하게 흐물흐물, 전신에 힘을 뺐더니 은우에겐 그것이 여자가 주는 신호처럼 보였나 보다. 얼마든지 더 가져보라고 하는.
그 견고했던 의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은우의 발기된 성기가 질래의 탄탄한 배에 그대로 느껴지는데 대체 무슨 자세인 건지, 우린 어떻게 겹쳐진 건지, 그러한 궁금증도 잠시였다.
저를 덮고 있던 수건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곧바로 제 눈앞에 흥분한 남자가 보였다. 이제 우린, 아마도 멈출 수 없는 모양이다.
귓가에서 지분대던 입술이 목선까지 내려와 질근질근 잇자국을 남긴다. 으읏, 성감대인가. 간질간질하면서도 저릿저릿한 쾌감에 의자 손잡이를 꾹 누르다 못해 결국 꼭 쥐고 말았다.
그 사이 깊게 패인 쇄골까지 느릿느릿 그의 유연한 혀가 도달했다. 그의 분주한 손은 환자복 단추를 과감하게 풀어냈다.
“저기 은… 웁. 나 유부….”
한 마디도 못하게 이번엔 그의 혀가 강하게 잇새를 갈랐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부지런히 환자복 마지막 단추까지 꼭 맞던 구멍에서 완벽히 빼냈다.
저를 덮고 있던 옷이 사라지자 뭔가 허전하고 휑한 느낌이 들었다.
곧바로 남자의 손이 스르르 제 맨살을 스치더니 부드럽게 가슴을 쥐었다. 퍼붓는 키스 세례에 딱히 신음 말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소리를 담당하는 제 입과 혀는 그에게 잠식된 채로 그의 혀의 포로가 돼 버렸다.
한 손이 부드럽게 얼굴을 쓰다듬는다면 한 손은 포악하게 유두를 비틀었다.
“하앗. 아!”
들썩일 뻔한 허리를 그가 슬며시 눌러줬다. 다만 너무 생경한 희열에 그의 혀를 물어버렸음에도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는 어른스러운 남자였다. 어떠한 통증에도 굴하지 않는 든든한 남자였다.
지그시 감긴 눈에서 뻗어 나온 긴 속눈썹, 꿀렁이는 그의 목울대와 팔뚝에 선 핏줄마저도 경이로울 만큼 뇌쇄적이었다.
“혹시라도 죄책감 가질까 봐 미리 이야기할게. 가질래 유부녀 아니야. 기 회장이 알아봤대. 윤태윤이 거짓말한 거래.”
“사실이야?”
“그러게, 확인해 보고 믿었어야지. 바보. 내일 기 회장님이 확인해 줄 거야.”
갑자기 은우의 나신이 보고 싶어 졌다. 어찌할 바를 몰라 의자 손잡이만 그러쥐던 여자의 손이 어느새 남자의 와이셔츠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유부녀라는 도덕적 잣대가 사라지고 나니 본능이 꿈틀댔다.
은우도 놀랐는지 감았던 눈을 떴다. 분명히 동공이 요동쳤다.
하지만 그것도 매우 일순간일 뿐. 한쪽 입꼬리를 치명적이게 늘어뜨리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미소 덕분에 여자의 넘실대던 가슴이 결국엔 남자의 탄탄한 상체와 맞닿을 수 있었다.
어느새 샴푸 전용 의자에는 상의를 완벽하게 탈의한 두 남녀가 이성을 잃은 채 서로를 물고 빨았다.
이런 게 바로 학습된 본능이란 걸까.
분명 샴푸만 받으려 했는데 상체가 샤워라도 한 듯 잰득잰득, 타액으로 범벅돼 버렸다.
색색거리며 남자의 가슴에 밭은 숨을 내뱉을 동안 은우가 미용 전동의자를 천천히 내리더니 이내 환자복 바지에 손을 댔다. 서서히, 서서히 바지가 내려간다.
설마, 이 몸으로… 가능할까, 싶던 그때였다.
“몸이 날 기억해, 알아?”
“…….”
“엄청 젖은 거.”
“…….”
“오랜만에… 넣어 달래. 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