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고백
질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기 회장의 눈을 바라봤다. 숨기고 싶은데, GH그룹의 기 회장은 아직 제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과 같았다.
GH 일가의 명맥이 괜히 유지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다음 말이 질래의 흉중을 날카롭게 파고들더니 이내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나도 사랑에 미쳐봐서 아는데, 후회도 해봤는데, 돌아보니 한 번쯤은 참 잘했다 싶어요. 우리 같은 인생, 생각보다 각박하지 않나요?”
질래의 눈매가 깊어졌다. 어느 지점에서 뭉클한 건지 기 회장의 온화한 얼굴이 시야에서 점점 흐릿해져 갔다.
“저는… 무서워요.”
무섭다니. 은우의 마음이 질래의 두려움과 함께 갈기갈기 찢겼다. 강화그룹 장녀라는 이유로 얼마나 오랜 세월 인내해 왔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기 회장이 고마웠다.
그 사이 기 회장이 질래 손 위에 벽돌 쌓듯 제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은우와 질래를 번갈아 봤다.
“TY 윤태윤 본부장, 만만치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같이 싸워요.”
막막했던 현실 속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도움은 늘 의외의 곳에서 시작됐다. 동생 줄래와 태윤과의 전쟁이 내심 두려웠던 질래에게 다시금 용기란 게 생겼다.
“은우야, 이정도면 할미 대답, 충분히 됐을까?”
그의 입매가 양옆으로 쭉 상승했다. 역시나 청일한 미소였다.
“참! 남 실장한테 곧 연락 올 거다. 너 포트폴리오 보고 에르아스 측에서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구나. 일정이 촉박할 거 같던데? 곧 패션 위크 기간이지?”
“혹시….”
“내가 한 거 아니야, 오해하지 마!”
일찍이 군대를 다녀온 후 모델이 되기 위해 은우는 저만의 워킹과 애티튜드를 만들려 노력했다. 포트폴리오도 이곳저곳에 많이도 뿌렸었다. 하지만 중간에서 배달 사고라도 난 건지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다. 그런 무명의 설움이 이제야 풀리다니….
분명히 축하받을 만한 굿 뉴스였다.
그러나 문제는 질래였다. 그녀를 두고 유럽으로 떠난다는 게 막상 기쁘지가 않았다.
좋은 소식에도 먹구름이 잔뜩 낀 은우의 얼굴을 본 기 회장이 금세 제 손자의 근심을 캐치했다.
“내가 책임지고 돌볼 테니, 걱정 말고 다녀와. 너만큼은 젊었을 때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았으면 싶구나. 혹시 더 할 말 있니?”
“아니요, 아! 있어요.”
은우가 뭔 말을 하겠다고 하니 기 회장과 닭발집 할머니의 눈에서 동시에 생기가 돌았다.
완전히 손자 바보였다. 괜스레 은우의 입술이 무거워졌다.
“저기, 둘만 있고 싶은데….”
두 노인네가 금방 시무룩해진다.
“…그래.”
“그렇구나.”
쌔앵. 찰나였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질래의 두 뺨을 스치는 순간은.
은우의 지체 없는 돌진이 질래의 달뜬 얼굴을 차갑게 식혀줬다.
과유불급이라고, 뭐든 적당해야 하는데 이러다가 기 회장의 미움까지 사는 건 아닐지 내심 걱정되는 질래였다.
그럼에도 기 회장은 대인배였다. 오히려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닭발집 할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복주야, 오랜만에 담소 좀 나눌까?”
“감사합니다.”
은우가 기 회장을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닭발집 할머니 역시 두 청춘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조용히 점두했다.
할머니들이 나가자 은우는 제 휴대폰에 뜬 남 실장의 부재 전화를 확인했다.
“잠시 전화 좀 하고 올게.”
질래가 알겠다는 듯 손짓을 보내자 은우가 몇 분간의 통화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그의 얼굴엔 장마전선이 북상해 있었다.
당장 내일 밤 출국이라니. 빠듯한 일정을 미루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질래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부턴 단순히 그녀의 곁만 지킨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스스로가 성장해서 떳떳하게 그녀의 동반자가 되고 싶었다.
GH그룹이라는 배경 말고, 그냥 이은우란 남자가 가진 가능성으로 질래를 책임지는, 진짜 남자이고 싶었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온 은우를 질래가 환하게 반겨 준다.
드디어 출국 전까지 얼마 남지 않은 둘만의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기 회장이 휴대폰을 깜빡 두고 나갔단 사실만 제외한다면 완벽했을 것만 같은 저녁.
둘 사이엔 오랜만에 제법 달달한 기류가 흘렀다.
“나 통화하면서 두 가지 소식을 들었어.”
“뭔데?”
“하나는 알다시피 파리 런웨이에 곧 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랑, 하나는 음, 이따 알려줄게.”
“…궁금한데.”
“아니, 이따 알려 줄 거야. 일단 나부터 새기고.”
“응?”
음흉한 늑대로 변신한 은우가 질래의 머리 밑에 있던 베개를 슬그머니 빼냈다.
***
몸이 기억한다는 말….
들어 본 적이 있다.
어릴 적 배웠던 피아노가 그랬다. 악보 없이 즉석에서 바로 연주되는 곡이 몇 곡 있었다.
질래는 그 원리를 새삼 실감 중이다. 어느새 은우와 한 침대에서 그의 팔을 베고 자연스레 쓰담쓰담, 저를 어루만지는 은우의 손길을 받으며 도란도란 대화 중이니 말이다.
설레는 살 냄새가 좋아서 계속 이 품에 머물고만 싶었다. 하지만 강화그룹 가질래라는 이름 석 자, 그리고 누나라는 압박감이 솔직할 수 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가지 말까?”
“얼마나 좋은 기회야. 당연히 가야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은우라는 연결고리 없이 기 회장과의 조우는 그리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확실히 해야겠어.”
“뭘?”
은우가 질래의 뺨을 감싼 후 시선을 고정시켰다. 내려다보이는 여자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완벽에 가까울 만큼 아름다웠다.
“가질래한테 내 포지션은 뭔데? 그거 안정하면 아무 데도 못 가, 난.”
“글쎄…. 뭐가 되고 싶은데?”
일분일초도 떨어지기 싫을 만큼 질래한테 빠졌다. 몸도, 마음도 바짝, 그녀 곁으로 밀착시키지 않고선 배길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파리에 데려가고 싶다.”
“이 몸으로?”
“빨리 나아야 넣는데. 그것도 아쉽고.”
“넣어? 뭘?”
“특별한 사이끼리 하는 거, 그런 게 있어.”
은우의 입에선 항상 종잡을 수 없는 수위가 넘실댔다. 질래는 그 넣는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민망함에 부러 모른 척했다.
“다 제자리란 게 있잖아. 근데 아직 내 몸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어.”
“자꾸 이상한 소리 하면 저쪽 침대로 보내버린다.”
“누구 맘대로!”
“왜 이래?”
벌떡 일어선 은우가 제 허벅지 사이에 질래를 가뒀다. 여자를 안전하게 보호한 후 한 손으로 매트리스를 짚은 채로 아슬아슬하게 질래 위에 포개졌다.
“봐봐, 가질래한테 난 이렇게 반응하는데 우리, 같은 마음 맞잖아, 아니야?”
남자의 바지 위로 확실히 무언가가 뭉툭하게 자랐다.
그래! 남녀가 한 침대 위에 붙어 있는데 플라토닉 사랑을 꿈꾼다는 자체가 허무맹랑한 일이다. 질래도 한참을 고민했다. 기억을 잃든 안 잃든 여기까지 함께 온 제게 은우는 뭘까 하고.
“이은우 너는 말이야, 음… 혼인취소 소송하면.”
“하면?”
“만나보고 싶은 사람?”
제법 솔직하게 답했다고 생각했다. 은우의 구겨진 이맛살이 평평하게 펴진 걸 보면 말이다. 제 위에서 시크한 표정을 짓던 남자의 얼굴에 빙그레, 우유 샤베트 같은 상큼한 미소가 지어졌다. 다만 문제라면 예상치도 못한 딱밤이 그녀의 뺨에 벌칙처럼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뭐야, 아프잖아.”
“별로야!”
“별로라고?”
“뭐, 뭐 한 후에, 뭐, 뭐 하면, 이런 말들 딱 싫어. 나한테 신중하지 마!”
대체 무슨 말을 원하는 걸까? 어차피 은우도 저 스스로가 유럽에 얼마나 있어야 할지도 모르면서 섣부르게 뭔가를 기대한다고 질래는 생각했다.
“은우야, 만남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 오늘부터 만나. 결혼 전제로, 진지하게.”
“나도 생각할 시간, 읏.”
은우의 바지 위로 튀어 오른 물건이 질래의 다리 사이로 쿡 들어왔다. 딱딱한 물건의 야릇한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뭐 하는 거야?”
여자의 사타구니 속 은밀한 곳 위로 도장 찍듯 남자의 분신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경고하는 거야.”
“그 경고 땜에 난 오해할 수가 있어, 나랑 자고 싶어서 이러는구나….”
“당연히 자고 싶지, 어떤 미친놈이 사랑하는 사람이랑 안 자고 싶겠어.”
역시나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 제 맘을 마구마구 왜곡해 대는데 쓱쓱, 심장이 쓸린다.
사실 말이 출발선이지,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 은우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서두르고 있는 제 맘도 몰라주는 여자가 야속했다. 계속 은우를 향해 가르치듯 종알댔다.
“솔직히 육체적인 사랑 이런 거, 밝히는 사람 치고….”
“우리 잤어.”
“뭐?”
쿠웅, 쿵! 마음속 큰 배가 암초에 부딪힌 줄 알았다, 설마하니 또 낚인 건가?
질래는 생각지도 못한 미끼에 속지 않으려 은우가 던진 낚싯바늘로부터 멀리멀리 도망치려 했다.
“엄청 잤어, 아주 진하게, 열렬하게 다 했다고.”
“말도 안 돼. 기억이 없다고 그런 식으로….”
“아니! 처음으로 어떤 여자를 집에 데려갔어. 처음으로 내 침대에서 물고 빨고 애지중지, 다 맛봤어.”
“…….”
“맛있더라. 사람이 달콤했어…. 설레더라. 나도 처음이어서.”
저 매혹적인 미끼에 안 낚이려 했는데, 질래는 어느새 낚싯대를 물다 못해 펄펄 끓는 냄비 속으로 풍덩 빠져버린 형국이었다.
머리끝까지 화끈한 열기가 칙칙폭폭 폭주하는 열차처럼 달아올랐다. 더더욱 문제는 은우의 말이 거짓인 것 같지 않다는 이 거지 같은 촉이었다.
내가 단 하루 만에 정말 이 남자랑 잤다고?
“가질래의 처음을 가졌어. 근데 또 하고 싶고, 또 갖고 싶고, 영원히 갖고 싶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백이란 걸 했어. 그때 알았거든.”
“…고백?”
“…사랑해.”
“…….”
“사랑해. 질래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