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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래요-31화 (31/84)

31화. 유부녀와 침대 위에서

대체 뭐가 끝났다는 거지? 사고 당일, 혹 술에 취해 은우랑 무슨 일이라도 벌였던 걸까? 점점 질래의 마음이 촉박해졌다.

“너도 혹시 윤태윤이랑….”

“그건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고.”

그럼 끝났다는 말의 의미가 뭘까. 혹시 잃어버린 기억 일부 속에 저가 모르는 은우와의 은밀한 일들이었었던 걸까.

“너, 나 꼬셨니? 내가 넘어갔어? 술 먹인 거야?”

질래가 또 물어온다.

‘말해 뭐해, 이 바보야! 지금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잖아. 너랑 나, 이미 하나라고, 갖고 싶은데, 지키는 중이라고.’

저와의 추억을 잊은 질래에서 한껏 하고픈 말을 쏟아낸 후 은우는 환자인 그녀를 안정시키기로 했다.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눈동자를 마주했다.

“지금 서울 GH병원으로 넘어가고 있어. 술은커녕, 맨정신으로….”

사랑을 나눴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충격받을까 봐 은우는 진실을 당분간 숨기기로 했다.

하지만 남자가 핵심을 흐릴수록 질래의 궁금증은 증폭됐다. 몇 날 며칠 굶은 사람처럼 심히 허기지고 갈증이 샘솟았다.

“너랑 나 뭐냐고! 왜 자꾸 애매하게 말해?”

질래의 눈망울이 갈피를 잃었다. 도톰한 입술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이런 그녀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입술을 벌리는데 이토록 신중하기도 오랜만이었다.

“뭐였음 좋겠는데?”

“…….”

막상 은우가 질문해오자, 질래 역시 답하기 어려웠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기엔 첫 키스를 나눴다. 스스로도 이 남자와 무슨 관계이길 원하는지 정답을 찾지 못했다.

질래의 고민이 깊어지자 은우가 먼저 적당한 선을 제시했다.

“다 나을 때까지만 가질래가 원하는 이은우로 살게.”

“다 나을 때까지만?”

“응, 이후 플랜은 좀 달라야 해서.”

“뭐가 달라야 하는데? 왜 GH 사람이랑 같이 있는데? 왜 GH 병원인데?”

속사포 랩이라도 구사하듯 질래는 궁금증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분명한 건 서로 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으면서도 각각 다른 길로 향해가는 기분이었다.

대체 난, 무엇이 두려운 걸까? 질래의 이성 한켠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뭐든, 이은우 앞에선 절대로 티 내지 말라고. 그래서 좀 더 어른답게, 이성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GH 사람이 온 건, 혹시 우리 아버지와 연관 있니?”

“글쎄,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분명한 건.”

“분명한 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래, 시켜서가 아니라.”

은우가 다음 말을 이으려다 주춤한다. 긴 눈꼬리 안에 선함을 가득 채운 채 저의 표정을 살피는 남자의 눈길이 왠지 모르게 따스했다. 그간의 설움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보고 싶어서 왔어.”

“…….”

“가질래가 보고 싶어서.”

남자의 따사로움이 결국은 일을 냈다. 여자의 어두운 마음속에 이은우라는 투명한 프리즘이 마법을 일으킨 것만 같았다. 한 줄기의 빛이 남자를 거치는 순간 무지개 빛깔로 희망을 노래했다. 제 안에서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벅찬 가슴이 본심을 알려줬다.

‘너, 저 남자한테 조금 많이 반한 거 맞다고.’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은우가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시점은.

흔들리는 차 때문인 건지, 체력이 고갈된 건지 은우는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질래의 예쁜 얼굴이 흐릿하게 뭉개지더니 그녀가 한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푹! 질래 손을 제 손에 꽉 끼운 채로. 그대로 그녀 위에 쓰러진 은우였다.

***

그 시간 서울아신병원 VIP 병동 복도에선 한 차례의 전쟁을 벌어졌다.

방화벽 덕분에 다행히도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상황이 정리된 후 들어간 VIP 병실 안은 태윤에게 실로 큰 충격이었다. 텅텅, 비어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비극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손님도, 환자도 없는 무의 상태였다.

뇌에 테러를 당한 것만 같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들이 머리 곳곳에 매설된 듯 보이지 않는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때문에 제 옆에서 덜덜 떨고 있는 줄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건, 어째서 GH그룹 쪽에서 코마 상태에 빠진 질래를 굳이 빼돌렸느냐였다. 도무지 이 부분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황당무계한 상황은 VIP 병동 방문객 신상과 복도의 설치된 CCTV를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육 상무와 함께 복도를 지나간 남자의 얼굴은 소름 끼칠 만큼 익숙했다.

“젠장, 내가 왜 닭 쫓던 개 신세를 면치 못하는 거지?”

제가 흠모하는 여자, 가질래의 마음을 훔친, 어쩌면 첫 남자일지도 모르는 저 개자식.

그가 왜, 어째서, 육 상무와 함께 서울아신병원 VIP 병동에 감히 발을 들였느냔 말이다.

혼수상태라고 전해 듣긴 했는데, 이후 행방이 묘연했었다. 결국은 깨어난 걸까. 어떻게? 그의 신변이 철저하게 숨겨진 거지? 설마 GH그룹에서 보호해왔던 걸까. 왜?

끊임없는 질문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동안 줄래 역시 CCTV에 찍힌 모델 같은 남자의 모습에 주목했다.

“이름이 이은우라고요?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줄래가 별 뜻 없이 한 말에도 태윤이 말아 쥔 주먹을 어찌하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끝내 보안실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이런 공개된 장소에선 절대, 상스러운 언어도 과격한 행동도 보이지 않던 태윤의 모습에 줄래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믿기지 않아서였다. 단둘이 있을 때 말고는 저렇게 분개하는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나이스한 재벌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 목숨 걸고 사는 사람이건만, 저 이은우란 남자가 윤태윤의 아킬레스건이라도 되는 걸까.

줄래의 짐작대로 태윤은 지금 열불이 나서 돌 지경이었다. 이은우란 이름만 들어도 온몸이 발작할 만큼, 그의 존재 자체가 싫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나서서 GH그룹과 대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말 누군가가 이토록 죽이고 싶을 만큼 저주스러웠던 적도 없었으리라.

뭣도 없으면서 가질래만큼이나 저한테 열등감을 심어주는 이은우라는 이름 석 자. 그렇게 마음속으로 힘껏 그를 미워하고 있던 그때였다.

태윤의 허벅지에서 야릇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심복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무슨 일이야, 나 별일 없다고 문자 한 거 못 봤어?”

-그게 아니라, 그 여자 행적이 포착됐습니다.

순간 주변 눈치를 살핀 후 태윤은 휴대폰을 들고 보안실을 나갔다. 인적이 드문 복도 끝 구석으로 가 비서와의 통화를 이어갔다.

“정말이야? 어디서? 어디에 있는데?”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울아신병원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서울아신병원? 나 있는데?”

-예, 하도 두문불출해서.

태윤이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냉큼 비상계단 문을 열어 그곳에 몸을 숨겼다. 깊이 심호흡을 내뱉은 후 다시금 휴대폰에 입술을 갖다 댔다. 혹, 누군가 들을까 봐 입가를 가린 후 작고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지시했다.

평소 부하 직원들에게도 매너 있게 대하는 상사로 유명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터라 그의 음성은 매우 거칠게 변해있었다.

“당장 잡아 와, 당장! 불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나 좀, 숨 좀 쉬자. 김 비서. 어?”

흰 벽에 맥없이 기댄 태윤의 다리가 풀린 듯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

눈꺼풀이 스르륵 열렸다. 은우가 눈을 떴을 땐 제가 알던 병실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곳에 전혀 다른 조명이 은우를 내리쬈다.

호텔 펜트하우스 같기도 하고, 영화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저택 같기도 했다. 분명한 건 강남 GH병원 병실은 아니었다.

그 순간 가장 먼저 스스로에게 꺼낸 질문은 단 한 가지. 질래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옮기자 바로 옆 침대에 누워 있는 질래와 눈빛이 닿았다.

‘이런! 딱 걸렸네.’

실은 은우와 눈 마주치기 전부터 그를 보고 있었다. 질래의 얼굴이 또 핑크빛으로 달아오른다. 눈을 뜬 남자가 제일 먼저 저를 찾아낼 거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나머지 고맙다는 말 대신에 화를 내고 말았다.

“이은우, 너 오늘 깼다며? 제정신이야? 좀 더 쉬었다 왔어야지!”

순간 구급차 안에서 졸도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질래 앞에서 쓰러진 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 달간 누워 있던 사람이 제대로 먹지도 않고 달려갔으니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질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그래서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여기가 어딘데?”

“그러게, 어쩌다 우리가 GH그룹 기 회장의 사옥에 온 걸까? 살다 살다 이게 무슨 일이니?”

상큼 달달한 캔디핑크색 안개꽃이 활짝 핀 얼굴. 그게 은우가 가장 사랑스러워하는 질래의 모습이기도 했다.

대화 내용은 불친절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애잔한 눈빛은 왠지 모르게 찡했다. 거친 말투에 비해 오가는 시선만큼은 한없이 친절했다.

질래는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부러 은우에게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제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이 어색한 감정을 밀어내고자 나름 발악한 것이다.

“GH그룹이랑 너, 어떤 사인데 그래? 아까 남 실장이란 분이 너를 이사님이라고 불렀어. 어린 게 대체 뭘 하고 다녔길래 벌써 이사야? 어? 뭘 어떻게 살았길래….”

“대체 어딜 봐서 어리단 거야? 사춘기 소녀처럼 얼굴 빨개진 게 누군데.”

누나처럼 말하는 질래의 말허리를 은우가 싹둑 잘랐다. 이상하게 어리다는 말이 듣기 싫었다.

사람이 말로 내뱉다 보면 어느새 상대에게 편견이란 게 생긴다. 질래에게 제가 어리숙한 남자로 각인될까 봐 그 프레임만큼은 사전에 차단하기로 했다.

“안 되겠다. 전력 질주할래.”

“그 몸으로?”

“생각보다 멀지 않은 것 같아서, 그냥 가보려고.”

저게 또 무슨 말이지? 질래는 은우의 화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뭔가가 불길하다. 슬슬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편 휘청거리는 모습을 들킬까 봐 은우는 이를 꽉 물었다. 각종 영양제가 섞여 있는 링거 바늘을 팔에서 빼낸 후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이제, 질래에게 직진이다.

“침대가 쓸데없이 넓고 그래.”

“저기 은우야, 나 유, 유부녀거든?”

듣기 싫은 건 그냥 거른다. 은우는 슬금슬금 질래가 덮고 있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녀 옆에 조심스레 누웠다. 혹 다친 부위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애지중지, 제 품 안에 여자를 쏙 넣었다.

은우와 몸이 닿는 순간 질래는 심장이 과부하로 터질 것만 같았다. 전력 질주는 제가 하는 듯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살 냄새가 제 코에 전해질 때까지, 귓가에 닿은 호흡이 가깝게 울릴 때까지. 질래는 아픈 몸을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게 전력 질주니?”

“…재혼해.”

“…어?”

질래는 잘못 들은 줄만 알았다.

“…나랑 재혼해, 그럼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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