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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래요-30화 (30/84)

30화. 키스까지만 한 사이네

폭탄이라니,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래서 병실 밖이 분주했던 걸까. 복도에는 방화벽이 내려왔다. 태윤 역시 같은 소식을 들은 듯 매우 당황한 얼굴로 질래가 있는 병실 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이내 손잡이를 이리저리 거칠게 돌려대며 급기야 발로 문을 뻥뻥 찼다.

보안 요원들까지 함께 들러붙어 잠겨 있는 문을 열고자 쿵쿵 두드리는데 난리도 아니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이 현장에서 은우는 방문을 뚫고자 떠들썩하게 움직이는 적들의 움직임에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 혼란을 뚫고 들어온 건 오늘부터 전우가 된 육 상무의 한마디였다.

“결정을 하셨으면 얼른 가셔야 합니다.”

보안 장치로 시간을 번 만큼 신속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질래의 침대를 끌고, 반대편 비상통로로 이동하려는 찰나!

쾅! 쾅! 콰아아앙!

파바바박!

병실의 불이 꺼졌다. 설마하니 정말 폭탄이라도 터진 걸까?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사람들의 비명과 함께 화재경보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고막을 때리는 엄청난 폭발음이었다.

처음 맞이하는 스펙터클한 상황에 두 남자가 버벅대자 침대에 누워 있는 질래가 있는 힘껏, 그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지금이 기회예요!”

강화그룹의 자부심인 서울아신병원의 테러 사건을 도리어 제가 살 기회로 삼아야 하는 이 아이러니함. 다행히 비상 전력 때문에 VIP 전용 엘리베이터는 작동했다.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VIP만은 살아라, 이런 건가? 이 기막힌 상황을 저도 모르게 비웃고 있는 은우였다. 물론 한편으로는 질래가 그 혜택자여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층에서 테러가 벌어진 건진 모르겠으나, VIP 병동과 가까운 것만은 확실했다. 경호원들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더더욱 거세질 때쯤 엘리베이터가 그들 앞에 도착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VIP 병동 층은 각종 화재나 테러에 대비해 비상경보가 울리면 방화벽이 자동으로 내려와 안전하게 보호된다고 들었다. 그래서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 층에 상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안전은 보장된다는 소리였다.

덕분에 태윤과 줄래, 보안 요원들은 VIP 병동 층에 고립됐고, 우린 그 혼잡한 틈에 무사히 1층에 도착했다.

밖으로 빠져나온 후 병원 신관 건물 꽤 고층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순식간에 경찰특공대와 119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병원 주변은 그야말로 혼비백산. 갈 바를 잃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뛰쳐나왔다. 한마디로 사람이 날뛰고 있었다.

그 틈에 육 상무는 마치 질래가 위급 환자인 양 사설 구급차를 운영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그의 마음을 진짜로 움직인 게 무엇인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분명 물질적인 보상이 있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어쨌든 그의 도움을 받아 질래를 구급차에 태울 수 있었다.

은우는 질래의 보호자로, 육 상무는 구급차 보조석에 올라탔다. 앰블런스가 큰 소리로 울어대자 사람들로 꽉 막혀 있던 현장은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은우 일행은 인산인해를 이룬 테러현장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드디어 구급차가 강남GH병원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한편으로는 운명 같았다. 마치 이 테러를 알기라도 한 듯 질래를 구하기 위해 오늘 때맞춰 깨어난 기분이었다.

구급차가 도로를 달리는 순간 질래 역시 만감이 교차했다.

사고 후 정확히 한 달 만에 탈출이었다.

저도 모르게 자신을 구한 남자의 손을 꼭 붙잡았다.

분명 13년 전 헤어진 동생 길래. 아니, 상상 이상으로 멋진 어른이 되어 돌아온 낯선 남자. 더 정확히 말하면 제 가슴골에 키스마크를 남긴 이은우란 남자의 손을 어느새 의지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GH그룹의 육 상무와 함께인 걸까?

수많은 질문은 잠시 묻어 둔 채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구급차가 급히 이동하느라 덜컹덜컹, 흔들려서 덩달아 속도 울렁이는 것 같았다. 잠시, 메슥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눈꺼풀을 닫았을 뿐인데 입술 위로 뜨끈한 무언가가 내려왔다.

쿡쿡 쑤셔오는 전신보다 더. 쌩쌩, 달리고 있는 구급차보다 더. 전력 질주 중인 심장이 문제였다.

“뭐, 뭐 하는….”

저를 구한 남자의 입술이 그대로 질래 위에 포개졌다. 그렇다고 장례식장 빈소에서처럼 더 깊은 곳을 침범해 오지는 않았다.

그저 힘 잃은 양팔로 맥없이 그를 밀어보지만 흔들리는 구급차 안, 남자의 양손은 어느새 그녀의 양 손목을 붙잡았다.

강제성 없는 부드러운 감김이었다.

“가만히 있어, 더 다칠라.”

“구해줬다고, 함부로….”

“함부로?”

질래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의 얼굴 어디에도 저를 향한 나쁜 마음이 감지되지 않았다.

빨려들어 갈 것만 같은 저 눈빛. 어미 잃은 강아지 같으면서도 기쁨과 두려움이 혼재돼있는 오묘한 표정.

미치겠는 건 이 와중에 남자의 입술이 왜 그리도 탐스러워 보이는지. 달싹이는 그곳에선 사람을 홀리는 멋진 저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기억해?”

어디까지 기억하냐니. 정말 이 남자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봐도 되는 걸까?

눈앞에 남자와 구급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지금, 질래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진척시킬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알아야 할 진실을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었다.

“너랑 나, 무슨 일 있었던 거니?”

“장례식장에서 키스한 건 기억 하는 것 같고.”

눈앞의 남자 때문에 질래의 얼굴만 계절을 초월한 채 가을을 맞이했다. 단풍나무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버린 것이다.

“그건 네가 일방적으로 한 거잖아!”

울긋불긋 단풍진 질래의 얼굴을 보고는 어째, 남자의 입에선 살인 미소가 흘렀다. 기분 좋은 듯 가볍게 입꼬리를 씰룩이는데 빈소에서 키스하던 그 짜릿함이, 병실에서 제 가슴골을 핥던 그 야릇함이 자꾸자꾸 떠오르면서 질래를 수줍음 가득한 사춘기 소녀로 만들었다.

“재밌다.”

질래를 바라보는 남자의 입에서 떨어진 알쏭달쏭한 평가였다.

“재밌어? 넌 지금 이 상황이 장난처럼 보여? 누가 얼마나 다쳤을지 아무도 모르는데?”

“아니, 그러니까 우리.”

“그래 우리, 무슨 일 있었던 거니?”

은우가 한 손으로 그녀의 콧등을 간질이듯 살짝살짝 터치했다. 장난기 가득한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녀의 귓가에 바짝 다가왔다.

그 순간 질래는 또 설렘사란 걸 당할 뻔했다. 그는 콧김마저도 간드러졌다. 들숨, 날숨을 질래에게 온전히 전해 주던 남자가 귀엣말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우리, 키스까지만 한 사이란 거네.”

“그게 왜?”

“백 미터를 함께 뛰었는데, 뒤돌아보니 나 혼자 결승선인 기분, 알아?”

“그래서, 무슨 의민데?”

“음.”

“…….”

“내가 다시 출발선으로 가겠다고, 가질래 데리러.”

어처구니없는 남자의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익숙한 입맞춤. 가끔 사람에게는 도피처가 필요하다.

이대로 은우와 어디론 가로 새고 싶었다.

사고 당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병실에 갇혀 지낸 한 달간 불필요한 진실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생지옥이었다.

마음의 안식처도 잃었다. 정 없던 아버지긴 했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죄책감과 허전함이 함께 버물어져 극도의 불안감을 만들었다.

그래서 나온 질문이란 게 고작 이 정도였다.

“네 손 잡음, 좋은 거야?”

늘 이성적이고 냉철했던 질래의 불안정한 동공을 은우도 처음 보았다. 알몸으로 제 품에서 색색거리며 수줍어하던 눈빛과는 확연히 달았다. 근심을 애써 숨기려 하는 표정이었다.

골절상만 당하지 않았다면 몸이 부서져라 꼭 안아 주고 싶은데, 당장이라도 품고 싶은 여잔데… 마음이 아프다.

“적어도 놓진 않아. 끝까지. 절대로.”

은우의 애매한 대답이 여자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질래에겐 지금 안전하고도 견고한 피난처가 필요했다.

“안 놓는 거랑, 좋은 건 달라. 그래서 나, 어디로 가는 건데?”

“음, 좋은 곳?”

진지한 상황 속에서도 저를 보며 마냥 웃고 있는 남자의 표정이 겁 없이 불 속에 뛰어든 불나방처럼 보였다. 질래가 판단하기에 연하남의 패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살다 보면, 순간의 이끌림에 손대는 경우가 있어. 당장은 달콤하거든. 그런데 인생 선배로서 조언하자면, 무턱대고 아무 손이나 잡지 마. 경고해 주는 거야. 너 살라고!”

은우는 지난날, 사귀잔 말에 화내던 질래가 떠올랐다. 기억을 잃었어도 현실적인 모습은 여전했다. 그 고리타분한 말에 은우가 질래의 손에 얼른 깍지 끼웠다.

제 큼지막한 손으로 여자를 포근하게 덮어 줬다. 초점 잃은 여자의 눈동자가 저를 응시해오자 손을 오므린 채 허리를 숙였다. 질래의 여린 손등에 제 촉촉한 입술을 비비듯 문질렀다.

일명 손등 키스. 부디, 제 진심이 그녀의 굳어버린 마음을 누그러뜨리길 염원하였다. 그녀의 이마에 뜨스한 온기도 내렸다.

덜컥덜컥! 흔들리는 차 안에서 질래의 싸늘했던 온몸이 반응했다.

자르르, 자르르. 곳곳으로 전율이 흘렀다.

“미안한데….”

은우가 돌연 질래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질래는 그 미안함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혹 저가 구원자로 은우를 잘못 선택한 건지, 여러 가능성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부디 최악의 상황이 아니기 만을 바라며 질래는 애원하듯 은우를 바라봤다.

그러자 남자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병실에서 살려달라고 부탁했을 때, 가질래 운명, 이미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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