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벼랑 끝 만남
은우는 기 회장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역시나 예상대로 속눈썹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 당당하던 기 회장이 은우의 시선을 회피해 버린 것이다.
“표정은 안 갔으면 싶은데,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죠?”
“어차피 갈 거 아니까. 기왕이면 그 길 고생하지 말라고.”
“제가 아버질 많이 닮았나 보죠?”
“…….”
은우의 뼈아픈 한 마디에 기 회장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언론에서 보던 그 도도하고 기품 넘치던 아우라가 어느새 사라졌다. 그저 깊은 회한만이 그늘처럼 그득했다.
사실 은우는 그동안 좋은 어른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딱히 예의란 걸 차려본 적도 없다. 하지만 오늘은 닭발집 할머니 이후 처음으로 어른다운 어른을 만난 것 같아서 오랜만에 진심을 전했다.
“고맙습니다.”
병실 문을 나서기 전, 은우는 기 회장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고개 숙인 기 회장은 목이 멘 듯 낮은 음성을 흘렸다.
“대신 너무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줄래?”
은우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조차 할 수 없었다. 기 회장의 그 한 마디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질래가 많이 아프구나.’
멘탈은 흔들렸지만 은우는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기 회장을 똑바로 응시한 후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기 회장의 전화 통화 한 통으로 질래를 볼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힘. 질래를 위해서라도 그런 힘의 가져야겠다며 주먹을 꽉 말아 쥔 은우였다.
***
태윤이 병실을 비운 사이, 줄래가 언니 곁을 지켰다. 언니는 저와는 달리 뽀얀 피부,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환자복을 입고 있어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특유의 묘한 매력이 있었다.
“언니가 싫어, 내 맘 알면서도 잘해줘서 더 싫어. 나만 악역이잖아. 차라리 죽었으면….”
차마 끝말을 잇지 못했다. VIP 병실 거실 쪽에서 통화하던 태윤이 때마침 방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질래는, 별일 없고?”
“또 질래야? 뭐가 그렇게 불안해? 대체 무슨 감정이지?”
태윤은 저를 두고도 늘 가질래의 안위만 물었다. 줄래는 사실 작년 크리스마스, 태윤과 뜨거운 아침을 보냈던 그 시간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태윤은 생각이 다른 듯 고개는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로 무심하게 줄래를 주시했다.
“질문의 요지가 뭐지?”
작년 크리스마스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태윤에겐 ‘수치’였다. 그래서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줄래 역시 그날의 낯 뜨거움을 잊고 얼른 좋은 남자를 만나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런 태윤의 마음을 줄래가 용케도 캐치했다.
“그럼 좀 더 쉽게 질문할게, 요즘 재벌 저격한 테러 말이야, 안 무서워?”
“글쎄, 내가 무서워해야 하나? 대체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지?”
태윤도 사실 그 질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강화그룹 가 회장과 GH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이은구 사장이 테러로 사망하면서 최근 준재벌들 사이에선 경호 업체 선점 경쟁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답변을 기다리던 줄래가 다시 한 번 의미심장한 질문을 꺼내놓는다.
“그냥,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누굴 구할까 해서, 나랑 언니 한 사람만 구해야 한다면 누굴 구할래?”
“…정말 몰라서 물어? 나한테 뭘 기대해.”
“살아 있는 나야, 식물인간인 질래 언니야.”
줄래가 좀 더 단도직입적인 말로 태윤을 압박했다. 하지만 좋은 방법은 아닌 듯, 남자는 여자에게서 멀리멀리 도망쳤다.
“상식적으로 내 아내부터 구하지 않겠어?”
“진심이야?”
줄래의 갈색 눈썹이 활처럼 휘었다. 내심 강화그룹이 탐나서 언니와 결혼한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입으로는 저를 싫다고 했지만 실은 제 몸을 원하고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줄래에게 태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과도 같았다.
“너랑 나, 분명히 해. 난 가질래를 갖고 넌 네 아버지 지분을 받고, 우린 비지니스 파트너라고. 아! 형부와 처제, 그게 더 맞겠네.”
“쓰레기!”
“몰랐어?”
“왜 다들 질래 언니만 예뻐해? 어떻게 식물인간한테 지분을 다 넘기고 갈 수 있지? 아빠도 제 정신은 아니야.”
불과 한 달 전. 정염에 휩싸여 함께 헐떡이던 둘의 호흡에 간극이 생겼다. 정사로 빠르게 뛰던 맥도 어느새 굳어 버렸다. 화(火)로 겹겹이 쌓인 줄래의 분노가 급기야 폭발했다.
“그거 사랑 아니야! 못 가지니까 발악하는 거지. 오빠 예전부터 그랬잖아. 갖고 싶은 거 있음 꼭 갖거나, 아니다 싶음 아예 없애버리거나.”
“너도 언니 건 꼭 뺏고 싶지? 그냥 너로 살면 안 돼?”
불장난 갖던 말싸움이 순식간에 온 병실을 태우는 화마로 변했다.
“난 오빠가 더 이해가 안 가. 그럼 나랑 왜 자? 가질래는 뭐가 달라? 언니는 되고 왜 난 안 되는데.”
“비참해? 내 맘 못 가져서?”
“결국, 언니 때문에 비참해진 거 나한테 풀었다는 거네.”
“씨발! 어쩌라고.”
태윤이 이렇게까지 큰 목소리로 성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줄래의 태도에 수틀린 듯 그가 진짜로 분개했다.
줄래가 태윤에게서 한발 물러서자 태윤이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호흡은 가다듬었다.
“나도 그런 날이 있어. 원치 않게 비참해지는 날. 근데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네가 생각이 났어. 분명한 건, 사랑은 아니야.”
줄래가 태윤의 확실한 거절 의사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달 전 일은 내가 미안해. 너나 나나, 되게 불쌍하다. 알아?”
사실 태윤은 스스로에게 화나 있었다. 남들 앞에서 가질래를 제 아내라고 선포했음에도 마음 한편은 여전히 허했다. 가질래란 여자는 늘 그런 식이었다. 의식불명인 상태에서조차 패배감을 주는 그런 여자였다.
“8년 전, 오빠가 내 처음을 앗아갔던 건 생각나?”
“…….”
“왜, 그것도 또 미안하다고 사과하게?”
8년 전 그와 처음 관계를 맺었을 땐 뭣도 모르고 모든 게 좋았다. 줄래에게 적어도 태윤은 사랑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난 후 태윤의 본심을 알게 됐다. 그가 마음에 품은 사람은 저가 아니라 가질래, 제 언니였다는 것을. 그래서 술김에 저를 가질래로 착각하고 잤다는 사실도 훗날 알게 되었다.
이후 애인이 생기면서 줄래는 태윤에 대한 미련을 버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 여전히 그의 곁을 공전하고 있을까. 육체적 관계는 없었지만 술친구가 되어주거나 태윤이 질래 언니한테 데이트를 거절당한 날엔 꼭 둘만의 어설픈 데이트가 이어졌다. 그리고 작년 크리스마스 아침, 오랜만에 태윤과 잠자리를 가졌다. 연말이니까 거의 8년 만이었다. 거기서 줄래는 그간 만났던 남자들에게서 느꼈던 육체적 결합과는 확실히 다른 감정을 깨달았다. 차라리 그날 찾아오지나 말든지, 이젠 태윤이 미치도록 갖고 싶어졌다.
어쩌면 이 모든 건 장녀 가질래 그늘에 가려져 살았던 동생의 자격지심, 혹은 한 남자의 왜곡된 마음이 만들어 낸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와 은밀한 부위를 나누던 그날, 윤태윤이 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언니가 식물인간이 된 덕에 시간이 흐를수록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도, 강화그룹의 유산도 다 기다리기만 하면 제 손안에 들어올 거라 확신했기에 줄래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활활 불타오른 태윤과의 감정싸움을 진화시켰다.
“배고프다. 밥 정돈 먹을 수 있잖아. 형부랑 처제가.”
“그래. 밥 정도는 먹을 사이지. 참! 방금 기 회장한테 전화 왔었어.”
“GH그룹?”
“상무가 온다던데? 대신 인사 보낸다고.”
“회장이 직접 오는 것도 아닌데, 그게 문제가 돼?”
“그럼 질래는 누가 지켜?”
하! 지겹다. 저 남자의 가질래 집착이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육체만큼은 언니보다 먼저 가져본 남자 아닌가. 줄래는 애써 평안함이 만개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나저나 기 회장은 왜 그런대? 하나 남은 장남 잃고서 정신줄 놓은 거야? 갑자기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손을 뻗질 않나. 할머니가 노망난 건가?”
“뭐 먹을래, 처제!”
태윤이 줄래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줄래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아무렴, 가질래 그늘에 가려져서 그렇지 그녀 역시 강화그룹의 둘째 딸 아닌가.
“거기 지나 있던 회사 아니야? 나 만나기 전에 지나 만났다며. 둘이, 했어? 하긴 오빠가 아무하고나 자진 않지.”
“알고 싶은 게 뭐야?”
“요새, 지난 뭐한대?”
순간, 태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안색이 어두워졌다. 급기야 줄래에게 다정해지는 게 아닌가.
“처제! 맛있는 거 사줄게. 일단 나가자. 뭐 먹고 싶어?”
꼭 뭔가가 찔리면 한없이 친절해지는, 윤태윤 이 나쁜 새끼의 매력에 또다시 말렸다. 사실 가질래나 개무시하지 윤태윤은 누구라도 탐낼 만한 괜찮은 남자긴 했다.
줄래 역시 태윤을 보며 언제 화났냐는 듯 입꼬리를 금세 씰룩였다. 한쪽 볼에는 수줍음이 담긴 싱그러운 보조개도 생겼다. 태윤이 술 취할 때마다 칭찬했던, 질래와 묘하게 닮았다는 그 미소였다.
잠시 후 태윤이 먼저 병실에서 나갔다.
VIP 병동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GH그룹에서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일러둔 후 뭔가 켕기는 사람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복도를 걸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서 몇십 걸음 뒤, 줄래가 멀찌감치 떨어져 그의 발자취를 되밟았다.
어쩌다 보니 질래만 남겨둔 채로 모두가 VIP 병실을 떠나버렸다.
***
그 시간 은우는 기 회장의 신임하는 GH그룹 육 상무와 함께 서울아신병원 VIP 전용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의 수행비서와 함께 양손 가득 병문안용 선물을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가만 보니 서울아신병원 안에도 명확한 계급이 존재했다.
하긴 육 상무랑 온 것도 있지만 기 회장의 차를 타고 온 덕에 좀 더 특급 대우를 받는 것만 같았다.
VIP 주차장에서 병실로 이어지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드디어 질래에게로 향했다.
어쩌다 보니 뜻하지 않게 한 달 만의 재회였다.
온몸의 맥이 휘모리장단 치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나대는 심장만이 은우가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알려줬다.
육 상무와 함께 신분 확인 절차를 거친 후 그녀가 누워 있는 병실 문 앞까지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그 몇 분이 은우에겐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일분일초가 1년처럼 흘렀다.
드르르륵.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드디어 열렸다.
뚜벅뚜벅, 거실 소파까지는 육 상무와 동행했다. 하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서자 육 상무가 거실에서 걸음을 뚝 멈췄다.
“만나고 오시죠, 전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윤 본부장이 잠시 자리를 비웠나 보네요.”
은우는 그와 눈을 마주친 후 진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긴장해 본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병실로 이어진 저 문턱이 벼랑 끝처럼 느껴졌다.
혹 질래가 너무 망가졌을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뚝배기 안 비빔밥처럼 뜨겁게 뒤섞였다.
드디어 문을 열고 그녀와 만나기 직전,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육 상무의 묵직한 한 마디가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유감스럽게도 가질래 씨는 지금, 식물인간 상태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