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황당한 기적
남 실장이 할머니 쪽으로 몸을 틀어 은우의 상태를 보고했다. 그제야 반쯤 감긴 눈으로 침울한 표정을 유지하던 할머니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은우는 그 순간까지도 모든 상황이 의아하기만 했다. 이사님이라고? 내가 왜?
혹, 남 실장이 왕비처럼 떠받들던 그 톱스타 지나의 자리를 말하는 건가?
더욱 당혹스러운 상황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설핏 봐도 전신을 돈으로 치장한 할머니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리스마를 내뿜던 그 어르신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은우에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은우는 그 종종걸음마저 매우 부담스러웠다.
“내 새끼 깼어? 흐윽, 감사합니다. 으흐흐, 감사합니다.”
뭐 내, 새, 끼? 내가 왜? 당신 새끼야.
“질래는요?”
의식이 회복되자마자 감사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는 할머니에게 은우가 꺼낸 첫마디였다.
“질래?”
“저랑 어떤 여자 같이 실려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팔자주름이 깊게 팬 할머니의 심기라도 보좌하는 듯 남 실장이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사님 혼자 실려 왔습니다만.”
“어, 어디서요? 한남대교 밑에서 그니까….”
버퍼링에 걸린 컴퓨터처럼 버벅거리자, 남 실장이 얼른 은우의 말을 정리했다.
“네, 한강에서 건져 올렸죠. 당시 기록적인 한파였다는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말일까? 갑자기 극존칭을 쓰는 남 실장은 제쳐 두고서라도 현재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은우는 난감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수많은 의문점들을 해결할 틈도 없이 병실 안은 어느새 이산가족 상봉식장이 되고 말았다.
제 곁으로 와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엉엉 울고 있는 할머니를 시작으로 은우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의료진들이 연이어 떼로 습격했다. 공황장애라도 걸린 것처럼 일시에 호흡곤란이 올 것만 같았다.
대체 얼마나 다친 걸까. 그런 의문점이 무색할 만큼 담당 의사는 은우를 두고 ‘기적’. 이 두 글자로 모든 걸 정리했다.
더욱이 놀라운 건 다리에서 추락하고도 골절상 하나 없이 의식만 잃었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모델 에이전시 서열 피라미드에서 바닥을 기던 찌질이가 한 달 만에 이사로 초고속 승진했다. 하루아침에 강화그룹보다 재계 서열이 높은 GH그룹의 핏줄로 신분 상승까지 한 셈이다. 이게 무슨 로또 1등에 당첨된 것도 아니고 은우는 모든 상황이 갸우뚱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상황을 다 제쳐 두고서라도 은우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질래를 되찾는 일이었다. 사고 이후 질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는 게 더 급선무였다. 그것 말고는 은우에게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니?”
은우가 제 몸에서 링거를 뽑았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약 한 달 만에 땅에 발을 디뎠다. 순간 머리가 팽 도는 줄 알았다. 역시나 오랜만에 몸이 가동해서 그런지 움직임이 뻑뻑했다.
“남 실장 잡아! 뭐해?”
병실을 탈출하려는 은우를 막아선 건 이리저리 잘도 붙어 다니는 박쥐 같은 남 실장이었다.
물론 아직 몸 기능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닌지라 저보다 덩치 작은 남 실장의 철벽 수비에 몸이 흔들렸다. 그 틈에 GH그룹의 기 회장, 그러니까 제 친할머니라는 사람이 엄숙한 표정으로 은우 코 밑까지 바짝 다가왔다.
“혹시, 강화그룹, 가질래를 묻는 거니?”
하긴, 재벌가에서 가질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드디어 가장 궁금해했던 진실의 문이 조금씩 열리는 것만 같아서 은우는 얼른 할머니의 질문에 맞받아쳤다.
“질래 어떻게 됐어요? 전 질래부터 만나야겠어요.”
“…걔는 잊어라.”
“무슨 소리예요, 어떻게 됐냐니까요?”
“그 아이 안 보는 게 좋을 거다.”
“무슨 일 생긴 거예요, 네?”
은우가 흥분해서 재차 물어보자 대답을 망설이던 할머니가 끝내 시선을 회피했다. 왜지? 질래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숨이 턱턱 막혀왔다. 설마… 사고 때문에?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며 정신이 혼미해지던 그때, 은우의 표정을 본 할머니가 어렵사리 주름진 입술을 들썩였다.
“…결혼했어.”
“말도 안 돼.”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은우가 미간을 급격히 좁혔다.
“결혼했다고, 너랑 인연 아니야.”
“사고 난지 한 달밖에 안 됐다면서요, 근데 무슨 결혼을 ….”
“사실입니다.”
은우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젓자 남 실장이 굳이 확인 사살까지 시켜줬다.
이때부터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혹시 꿈은 아닐까. 지금 제 앞에 놓인 말도 안 되는 신분 상승 스토리도 황당했지만 질래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더 믿기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비록 하룻밤에 불과했지만, 꽤나 농도 깊은 사랑이라고 믿었다.
순간 실물로는 처음 본 친할머니라는 존재, 그러니까 대한민국 누구도 쉽사리 만날 수 없다는 기훈희 회장한테 은우는 괜한 반항심이 생겼다.
“당신이 누군데 이래요, 내가 왜 당신 손자인데?”
그러자 기 회장이 탁상 위에 놓은 핸드메이드 명품백을 열어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보아하니 잘 접힌 종이 두 장. 아무래도 그 안에 엄청난 내용이 실려 있는 것만 같았다.
“모계유전, 부계유전 다 일치하는 거로 나왔다.”
“와! 의식불명인 사람 두고 유전자 검사까지 했다고요? 여태껏 뭐하다가 왜 이제 와서 찾은 건데요?”
“…….”
기 회장이 소파에 앉아 거죽만 남은 주름진 손을 깍지 끼워 교차시켰다. 얼굴에는 꽤나 신중함이 깃들여 있었다. 심사숙고하듯, 눈썹을 한 차례 치켜뜨더니 시선을 천천히 은우에게로 돌렸다.
“그러게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네가 존재하는지도 몰랐으니까. 내 죽은 아들 이은철….”
아들의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갑자기 목이 멘 듯 뒷말을 잇지 못했다. 금세 기 회장의 어두운 얼굴에 침울함까지 습격했다.
은우의 어안은 벙벙했다. 사실 좀 기막혔다. 가끔 TV에서 비운의 재벌 러브스토리로 떠들던 그 주인공이 제 부모님이라니.
‘그래, 어차피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이은철이란 사람의 아들이란 건 그렇다 치더라도, 질래를 만나기 위해선 일단 이 병원부터 탈출해야 해.’
실제로 이 병실에서 눈뜨기 전까지만 해도 질래와 세기의 사랑을 꿈꾸지 않았던가. 연애 팔자마저 친아버지란 작자를 닮은 건지, 은우는 이 모든 상황이 매우 불길했다.
“전 질래부터 꼭 만나야겠어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그래? 휴대폰 빌려줄까? 백날 연락해 봐라, 없는 번호로 나올걸?”
“무슨 의미죠?”
없는 번호라니. 그러고 보니 은우는 질래의 휴대폰 번호조차 몰랐다. 하긴. 우연히 만나서 사랑을 나눴고 새벽 내내 함께했으니 딱히 연락처를 주고받을 타이밍이 없었다.
게다가 저 할머니, 그러니까 GH그룹의 기훈희 회장이 알고 있다는 진실이 뭐길래 자꾸 저와 그녀 사이에 비극적인 미래를 꺼내놓는 걸까. 보이지 않는 불안감이란 악마가 은우의 마음을 점점 옥죄어왔다.
“고집도 꼭 지 애빌 닮았어.”
기훈희 회장은 은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지금, 이 아이!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구나. 괜히 저 아이의 의지를 꺾었다간, 지난날 아들을 잃어버린 슬픔이 반복될까 봐 오히려 두려움이 몰려왔다. 조심스레 지분대던 입술을 서서히 열었다.
“후회할 텐데.”
“그건 제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요.”
“그 질래란 아이, 지금 정상이 아니야!”
그 한 마디가 쿵쾅쿵쾅, 뛰어대는 은우의 심장을 거세게 강타했다. 설마하니 많이 다친 건가? 그날 사고 때문에?
“찾지 마라. 때로는 적절한 때에 끝내야 아름다운 인연도 있어. 그건 할미가 잘 알아!”
“그래서 어디 있는데요?”
“그 집안이면 어디에 입원하겠니!”
그제야 멈춰 있던 뇌가 작동하는 기분이었다. 강화그룹이면 서울아신병원이겠군. 서울아신병원은 강화그룹 재단에서 세운 병원이니까. 다만 기 회장이 생각보다 순순히 질래가 있는 곳을 알려준 게 좀 의외긴 했다. 혹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은우는 모든 상황이 의심스러웠다.
“제가 회장님 손자인지 뭔지 그런 건 관심 없고요. 질래 좀 만나야겠어요.”
“꼭 그래야만 하겠니? 이미 결혼한 애를?”
“병원에 있다는 사람이 한 달 새 결혼이라니, 누가 들어도 황당하지 않나요?”
은우의 팩트 폭격에 기 회장의 눈썹이 순시에 아래위로 꿈틀거렸다. 보면 볼수록 제 죽은 아들 은철이와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24년 전에도 그랬다.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한테 간다고 했지만 그걸 가로막은 게 저였다. 끝끝내 집을 뛰쳐나간 아들의 뒷모습. 그게 기 회장이 기억하는 은철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지난날의 아픔이 눈물샘을 자극했다. 건조했던 눈가가 투명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순식간에 습도가 높아졌다. 다시는 지난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기에….
기 회장은 극적으로 만나게 된 아들의 유일한 핏줄, 은우를 바라봤다.
“그래! 딱 이틀 줄게. 원래 살던 이은우로 살 기회.”
“누가, 누구 삶에, 무슨 자격으로 기회를 줍니까? 존재도 몰랐다면서요. 어떻게 찾은 건데요?”
VIP 병실 안에는 고고한 자태의 대리석이 뿜어내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네가, 닭발집에 찾아왔잖아. 거기 네 애비 신혼집이었어. 자세한 건 이틀 뒤 GH그룹 일가로 돌아오면 설명해 주마.”
그 닭발집이 아버지 신혼집이었다고? 그럼 요리해 주던 그 할머니는 누군데? 은우는 갑자기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남 실장.”
그사이 기 회장이 남 실장을 불렀다. 그녀는 그에게 시선을 옮긴 후 엄숙한 표정으로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남 실장은 알았다는 듯, 비번이 걸려 있는 붙박이 옷장을 덜컥 열었다. 그 안에서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쇼핑백 하나를 꺼내 들은 후 은우 앞으로 쓱 내밀었다.
“이 안에 차 키와 호텔 카드 키, VIP 전용 카드 등 다 들어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쓰십시오.”
순간 은우는 고민이 됐다. 저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데 스스로가 빈털터리임을 금세 인정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제 신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과거가 원망스러웠다.
서울아신병원에 갈 차비조차 빌려야 하는 게 방금 전까지 환자였던 제가 인정해야 할 현실이었다.
“제 옷은요?”
“버렸습니다. 어차피 너무 엉망이 돼서 챙길만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지갑은 새로 산 지갑으로 교체했고, 운전면허증 등 신분증은 모두 새 지갑에 넣어뒀습니다.”
“…암만 머리를 굴려 봐도 쇼핑백을 받아야 하는 이유들만 늘어나네요.”
은우는 남 실장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낚아채듯 빼앗았다. 이내 정말로 제가 GH 일가의 혈통이라면 이만한 보상은 받아도 된다며 이 상황을 스스로 합리화시켰다. 그간 개고생하며 살아왔던 삶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왜 제 인생은 항상 재벌가와 바닥 사이를 오가는 건지 기구하다고도 생각했다.
“휴대폰도 새로 개통해서 쇼핑백에 넣어뒀습니다. 단축번호 1번엔 기훈희 회장님 번호가, 2번은….”
“2번은요?”
“…접니다. 문제 생기면 언제든지 저한테 연락 주십시오.”
하루아침에 재벌가 패키지에 당첨된 것도 모자라 늘 자신을 무시하던 남 실장이 갑자기 굽실대는 모습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솔직히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일단 질래 생각부터. 어차피 이틀 뒤, 과거 이은우를 졸업한 후에 모든 걸 알아도 늦지 않으리라.
은우가 환자복 차림으로 병실을 나서려 하자 기 회장이 남 실장에게 고개로 신호를 줬다. 그러자 남 실장이 잽싸게 벽장으로 가 구두 상자와 슈트 한 벌을 꺼내왔다.
“옷이랑 신발, 준비했습니다.”
뭐지 이게? 이런 게 바로 재벌의 삶이라는 걸까? 제가 고민하지 않아도 할머니 고갯짓 한 번이면 알아서 척척, 도깨비 방망이 휘두르듯 필요한 게 눈앞에 뚝딱 나타났다. 저에게 잡일이나 시키던 남 실장이 어느새 은우 밑에서 심복처럼 굴었다.
“지나는 어쩌고 저한테… 참! 사람 일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더니. 그죠?”
고개 숙인 남 실장 앞에서 은우는 일부러 거들먹거리며 그의 손에 들린 구두 박스와 옷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남 실장의 목울대가 한 번 꿀렁이는 걸 보니 무척이나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 후 남 실장의 입에서 조용한 한숨이 새어나온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은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마치 중요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는 사람처럼 눈빛이 은근 강렬했다.
“모르시나 본데요.”
“뭔들, 알 리가 있겠어요?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사라졌어요, 그분.”
“네?”
남 실장이 은밀한 비밀이라도 꺼내놓으려는 듯, 은우의 귓가로 바짝 다가왔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이는 게 왠지 소름 끼쳤다. 이내 기 회장 귀에 안 들릴 정도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은우에게 속삭였다.
“이사님 사고 난 그날, 실종됐다고요.”
“…….”
“다, 우연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