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길 위에서 길을 묻다
“가자마자 각오해. 가질래 침대에서 한 판 할 거니까.”
“이거나 입어, 이거 너 꺼 맞지?”
질래는 검은 봉지 안에서 남자 속옷을 꺼내 은우 쪽으로 던져줬다.
“가게 가서 빠뜨린 거 없나 한 번 더 확인하자.”
패딩 안을 피팅룸 삼아 은우가 준 내의를 몰래 입던 질래가 제 손을 보고선 화들짝 놀란 듯 두 눈이 동그래졌다.
‘반지.’
질래는 내의 위에 패딩을 걸친 채로 얼른 가게 쪽으로 뛰쳐나갔다. 가게 안은 오늘 새벽 누가 와서 먹고 갔나 싶을 만큼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그러던 중 은우도 가게로 나와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닌가. 의자 밑을 샅샅이 살펴보더니 급기야 바닥에 무릎까지 꿇었다.
설마 내 반지를 찾고 있는 걸까? 서로 머리를 맞댄 채 가게 바닥을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찾는 물건이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황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각자의 물건을 찾다가 우연히 눈이 맞았다. 누가 봐도 얼굴 가득 황망함이 가득 차 있었다.
“은우야.”
“응?”
“없어졌어.”
“나도, 못 찾겠어, 지나 휴대폰.”
“아니, 반지가 없어졌다고.”
“반지가?”
잃어버린 반지 때문에 사색이 된 질래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가게에서 없어진 게 확실했으므로 범인을 굳이 꼽자면 할머니밖에 없었다.
하지만 은우는 할머니가 그걸 탐낼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혹 잃어버릴까 봐 보관했으리라, 그리 믿기로 했다.
은우가 가게에 있는 메모지에 휴대폰과 반지를 찾으러 오겠다는 메시지를 남길 동안 질래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할머니가 들어왔을 것으로 예상되는 방 옆, 미닫이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혹 할머니 집과 이어진 공간은 아닐까 하는 헛된 바람에서였다.
아무리 대한민국 탑 쓰리 안에 드는 재벌녀라 해도 수십억 원에 달하는 다이아 반지를 잃어버린 후 태연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건 은우가 준, 은우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 아닌가.
하지만 기대와 달리 문밖에 세상은 그저 어두운 골목길일 뿐, 딱히 집으로 이어진 비밀 통로는 없었다. 가로등만이 쓸쓸하게 텅 비어 있는 골목길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할머니는 대체 어디 사시는 거지?”
“글쎄, 저 뒤에 있는 집들 중에 하나 아닐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일단 내가 다시 올 거니까 그때도 없음 그때 걱정하자! 분명히 할머니가 보관하고 있을 거야.”
저녁이 가고 아침이 마중 오는 시간. 골목길에도 어둠이 서서히 걷혔다.
질래의 시선에 다가구 주택부터, 주상복합 상가와 빌라촌, 골목 끝에 있는 대저택까지 다양한 집들이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당장 할머니 집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직감으로 찍기엔 선택지가 너무 많았다. 당황한 질재를 은우가 꼭 안아 주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꼭 찾아낼 게.”
“미안해서….”
“나만 믿어, 찾아서 다시 정식으로 프러포즈할게.”
제가 준 물건을 잃어버린 여자를 오히려 위로하는 이은우란 사람이 그 순간 커다랗게 느껴졌다. 간혹 나이나 외모와 상관없이 존재만으로도 거대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은우였다.
그런 멋진 사람이 질래를 들어 오토바이 의자에 친절하게 앉혀 주었다. 제가 써야 할 헬멧도 알아서 씌워줬다.
큰 죄를 짓고도 더 큰 사랑으로 용서받는 기분이었다. 은우에게 느낀 고마움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질래였다.
“봐도 봐도 귀엽네. 얼른 맛봐야겠다. 우리 질래.”
그 믿음직스러운 남자가 그녀의 콧방울에 쪽, 입술에 쪽, 키스를 내렸다. 순시에 칼바람이 몰고 온 추위를 녹이고는 질래의 마음에 모닥불까지 지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의 허리를 꼭 감싸 안게 만들었다.
어느새 그와의 두 번째 질주가 시작된 것이다.
쌩하고 오토바이가 겨울바람을 갈랐다.
대기의 차가운 공기가 격렬하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탄 오토바이가 한남대교에 진입했다.
인적이 드문 이른 아침. 웬일인지 대교 위가 한산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게 완벽했다.
은우가 적어도 역주행 중인 덤프트럭을 발견함과 동시에 멀쩡했던 오토바이의 양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단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질래와의 세상은 지상에 존재할 수 없는 낙원 그 자체였다.
하지만 무릉도원에서의 행복은 찰나였다.
온 세상이 새까맣게 변하길래 은우는 길 위에서 길을 물었을 뿐.
길이 없었다.
그야말로 풍전등화. 바람 앞에 선 위태로운 등불, 딱 그 처지였다.
비틀비틀, 이리저리 폭주 중인 덤프트럭이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믿기 힘든 현실이 펼쳐진 것이다.
음주운전일까? 혹 졸음운전?
어떻게 다리 위에서 이게 가능하지?
무슨 까닭인지 거대한 화물차가 역주행 중이었다.
순간 은우는 꿈꾸는 것만 같았다.
이 상태로 갔다간 저 덤프트럭 밑에 깔려 바로 지옥행으로 직행할 게 뻔했다.
그래서 이를 피하기 위해 브레이크를 급히 잡아봤지만, 양쪽 다 말을 듣질 않는다.
엔진브레이크? 그 방법을 쓰기엔 너무 늦었다. 이미 가속도가 붙어 버린 상황이었다.
좀 전까지 멀쩡했던 오토바이의 양 브레이크가 동시에 고장 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 누군가 고의로 고장 내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대로 모든 게 끝나 버리는 걸까?
아무것도 모른 채 제 허리를 꾹 붙잡고 있는 여자 때문이라도 은우는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사실상 황천길 앞에서 은우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야 생의 길일까?
덤프트럭으로 그대로 돌진? 아니면 그나마 대안으로 저 차디찬 강물 속으로 풍덩?
잔혹한 현실이었다.
그 순간까지도 은우는 온통 질래 걱정뿐이었다.
처음으로 질래를 가진 게 후회됐다.
괜히 거지 같은 제 인생에 끌어들여, 그녀마저 위험에 빠뜨린 것만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얼굴에 길을 냈다.
그 방울, 방울이 날아가 질래 얼굴로 떨어졌다.
“으누야!”
질래는 비가 내리나 싶었다.
남자 등을 피난처 삼아 차디찬 바람을 피하던 중 제 얼굴에 부딪힌 물방울을 느꼈다. 동시에 맞은편에서 쏘아대는 강렬한 상향등에 고개가 들렸다.
차라리 보지나 말걸.
더욱이 소름 끼치는 건 누가 봐도 곧 저 덤프트럭과 자신들이 충돌할 거란 사실이었다.
여기서부터 남녀의 머릿속엔 각각 다른 생각이 지나갔다.
‘고마웠어, 이은우.’
질래는 그래도 사랑 엇비슷한 걸 한 번쯤 해본,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다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을 나눈 사람과 함께 생을 마무리하는 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다만, 꽃다운 나이에 저와 함께 죽음으로 향해가는 은우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미안해, 질래야.’
감사를 곱씹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미안했다. 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도 어떻게 하면 질래만은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을지, 편각에 드는 생각이라곤 그것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은우는 결정해야만 한다.
뭐든 최악의 선택이겠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붙든 채….
핸들을 꺾어 곡예 하듯 난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오토바이에서 몸이 자연스레 분리됐다. 전신이 허공에 붕 떴다. 몸을 돌려 어떻게든 질래를 안고 싶지만 그녀가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 둘은 손끝만 닿은 채 그대로 풍덩! 차디찬 한강 물로 곧바로 떨어졌다.
너무 일순간이라 비명 외에 어떤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끝끝내 그녀를 잡지 못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고요한 새벽, 한강 물엔 거센 파동이 일었다. 그들이 뛰어든 자리엔 넘실대는 하얀 물결만이 누군가의 추락을 알 릴 뿐, 두 사람은 물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이별이었다.
***
[연초부터 대한민국 재벌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의문의 테러 사건으로 GH그룹과 강화그룹 후계 구도에 큰 혼란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연이은 사건 사고로 GH그룹 기 씨 일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냐며 각종 저주설까지 유포되고 있어, GH그룹에서는 법정 대응에 나선 실정입니다.]
기자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무슨 뉴스 내용 같기도 하고, 꿈같기도 했다.
“남 실장, TV 꺼! 듣기 싫으니까.”
이번엔 연세 지긋한 노인네의 칼칼한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음성이었다.
온몸이 뻐근한 게, 은우는 눈뜨기가 두려웠다.
너무도 생생하고도 길었던, 잔혹 동화 같은 한 겨울밤의 꿈.
크리스마스의 악몽 같기도 하고 크리스마스의 환상 같기도 했다.
일단, 무엇이 진실인지 확인하고자 몽롱한 정신 속에 갇힌 스스로를 현실로 끄집어냈다.
먼저 손가락 끝부터 까닥여 본다. 발가락도 움직였다. 허리도 한 차례 들썩였다.
제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는 걸 보니 장애에 대한 우려는 한시름 놓았다.
그래서 서서히 세상을 향해 눈을 떠 보았다.
깜빡, 깜빡!
뿌옇던 세상이 눈꺼풀의 움직임 따라 제 색깔을 찾는다. 색감도 점점 짙어졌다.
새하얗게 보이던 실루엣의 실체는 다름 아닌 천장이었다. 쾌적한 공기마저 은우에겐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찌뿌둥한 머리를 천천히 돌려보니, 온 벽이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병실 아니겠는가.
설마, 꿈속의 사고가 진짜였던 걸까? 가질래와의 하룻밤도 모두 사실이고?
청담동 사무실 집에서 뛰쳐나온 것도, 다?
그러기엔 지금 보이는 현실이 매우 비현실적이긴 했다.
아무리 봐도 이곳은 제가 누워 있을 법한 병실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이런 곳은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강화그룹 가길래로 살았을 때 외에는 와 본 적이 없었다. VIP 병실. 최상급 호텔보다 더 럭셔리한 곳에 제가 환자로 누워 있다니.
몇 시일까? 크리스마스는 벌써 지난 걸까?
맞아! 질래가 날 여기에 입원시켰을지도 몰라! 그럼 질래는 괜찮은 건가?
별의별 추측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던 그때였다.
은우의 프레임 속에 꽤나 고집스럽게 생긴 할머니가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사람에게선 느껴보지 못한 아우라를 갖고 있었다. 특유의 카리스마와 귀티랄까. 아무래도 좀 전에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 같았다.
세상을 잃은 듯 허망한 표정으로 넋 놓은 채 창가만 바라보고 저 할머니, 대체 누굴까?
아는 사람? 아니, 암만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 옆에는 수행비서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어라? 남 실장? 남 실장이 여긴 왜?
어쨌든 낯익은 얼굴이 보이자 은우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저기….”
남 실장의 시선이 곧바로 은우에게로 향했다. 마치 중요한 사람이 깨어난 양, 지나에게 보였던 충견의 눈빛을 은우에게 보였다. 매우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진짜 반전은 그 이후부터였다.
“회장님, 이사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