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룰 좀 깨고 가자
“꺄악!!!”
여자가 소리를 지를 만큼 갑작스레 속도를 높였다.
그런데 질래의 목소리가 왠지 겁먹은 사람의 외침처럼 들리지 않았다. 분명, 자유를 만끽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은우는 저를 꼭 붙잡고 있는 그녀에게 큰 목소리로 물었다.
“무서워?”
“아니! 좀 더 빨리 달렸음 좋겠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 추운데, 추워서 좋아.”
“오케이, 알겠어, 그럼.”
은우가 올림픽대로를 타자, 바이크의 속도를 점점 더 높였다.
“날자! 가질래.”
“정말 날고 싶다, 내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우리, 이제 막 시작했는데 무슨 소리야!”
“좋다는 소리? 이은우, 넌 내가 그렇게 좋니?”
부우우웅.
은우가 바이크의 속도를 무한대로 끌어 올렸다.
박진감 넘치는 남자의 고백에 질래는 더욱 용감해졌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양팔을 허공에 활짝 벌렸다.
도로 위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랄까. 마치 날고 있는 것 같았다.
“은우야 우린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속도로 알려줄게.”
은우는 바이크의 속도를 높였다. 미끄러지듯 도로를 질주할 만큼. 시속 몇 킬로미터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그녀를 향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바이크가 낼 수 있는 속도의 최대치를 냈다. 차가운 칼바람에 얼굴이 베일 듯 따끔거렸지만 은우는 지금의 심정을 질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가질래!”
“응?”
“죽어도 좋을 만큼….”
그들 주변으로 순식간에 지나가는 어여쁜 불빛들이 쥐불놀이라도 하듯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사랑해.”
어둠을 밝히는 조명들이 별똥별처럼 떨어졌다. 질래의 어두운 마음에도 환한 불빛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분명 겨울바람은 찬데, 마음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쏜살같이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 질래는 은우의 사랑 고백에 두려움도 잊었다.
청담동에서부터 누군가가 저들을 뒤쫓아 오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두 사람을 태운 바이크는 도로를 달구며 뜨겁게, 무한 질주 중이었다.
잠시 후 은우와 도착한 곳은 한강 공원 근처에 위치한 허름한 닭발 전문점이었다. 크리스마스 새벽에 이곳을 찾은 사람은 은우와 질래 뿐이었다.
윤태윤을 만났다면 절대 와보지 못할 가게였다. 그만큼 질래에게 장소도, 메뉴도 신박했다.
잠시 후 불판 위에 양념에 재운 닭발이 올려졌다. 지글지글, 익을수록 발가락을 오므리는 닭발이 왠지 괴팍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뼈 없는 닭발이었다는 점?
“한번 먹어봐.”
은우가 잘 익은 닭발 하나를 제 입가에 가져가 호호 불어 열기를 식힌 후 질래의 입 안에 쏙 넣었다.
갖은 양념으로 빨갛게 옷 입은 닭발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게 할 만큼 극강의 매움을 선사했다. 그렇게 강렬했던 첫맛과 달리 끝 맛에는 희한하게 여운이 남았다.
계속 먹고 싶게끔 끌어당기는 맛이랄까?
“이런 것도 잘 먹네. 예쁘다.”
“20대 때 먹어봤거든. 맛있어. 매운 거 오랜만이다.”
“아직도 저염식으로만 먹어?”
질래는 쫀득해 보이는 닭발 하나를 입에 넣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나만 아는 맛집이야. 사람들은 잘 몰라.”
인테리어만 봐도 세월감이 물씬 풍기는 가게였다. 텅 비어 있는 주변을 빙 둘러본 질래가 매움을 중화시켜주는 음료수를 마신 후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네. 왜 모르지? 이렇게 맛있는데.”
“가게가 숨어 있잖아. 가질래처럼.”
“응?”
“만날 도도하게 업무 지시만 내리니까 사람들이 잘 모르지. 가질래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인 거.”
은우의 손이 질래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만큼은 보호받는 기분이었다.
“…….”
한편으로는 헷갈렸다. 철의 여인이라 불렸던 가질래가 제 모습인지. 은우의 말대로 알고 보면 사랑스러운 사람인 건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그런 혼란을 뚫고 은우가 질래의 진짜 모습을 다시 한 번 언급해줬다.
“어릴 때도 매운 음식 좋아했잖아. 근데 참더라? 아버지가 싫어해서지?”
‘순간 그걸 기억해?’라고 되물을 뻔했다. 대신에 그녀의 입에선 좀 더 솔직한 말이 꺼내졌다.
“…와! 술 땡긴다.”
“조금만 마실래?”
“안 돼, 음주운전은.”
“난 안 마셔. 쨘! 해 줄 테니까 혼자 마시라고.”
질래는 고개를 저으며 닭발을 입에 넣었다. 그 쫄깃한 식감을 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오물오물 음미했다.
“그거 알아? 매운데, 달아. 달콤해서 매운 걸 견딜 수 있는 거 같아. 그런 거 같아.”
“…나도 그런데.”
은우는 질래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저 맵기만 한 닭발이 달큼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질래가 닭발을 달콤하다 평한 건 우리의 관계에 대한 암시였다.
둘 앞에 놓이게 될 극한 현실도 달달한 사랑으로 견뎌내겠다는 그녀만의 고백이었다.
“먹다 보니 은근 중독되네.”
“그래서 나도 여길 못 끊어. 자꾸 생각나거든.”
은우가 이 가게와 인연은 맺은 건 한 3년 전쯤이었나? 늦은 새벽, 라이딩 중 이곳에 오면 항상 혼자일 수 있어서, 늘 혼자 와서 먹고 마시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주인 할머니는 닭발을 내준 후 항상 뒷문으로 사라지곤 했다. 아무래도 집이 가게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술 한 잔 마실 때면 주방 옆에 딸린 작은 방에서 한숨 자고 난 후 먹은 값보다 더 넉넉하게 현금을 두고 가길 반복했다. 대화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지만, 3년 동안 닭발집 할머니와의 은우 사이엔 은근한 친밀감이 형성돼 있었다.
그런 저만의 공간에 질래와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은우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그래서 마주 보고 있는 질래를 향해 테이블 밑으로 긴 팔을 몰래 뻗었다.
질래는 남자의 손이 오는 줄도 모르고 음료수 한 잔을 들이켠 후 은우를 향해 조잘댔다.
“오늘, 왜 이렇게 신나지?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재밌는 날이었어? 이참에 오토바이도 몰아… 어?”
손끝이 닿았다. 묘한 찌릿함에 남녀의 눈빛이 오갔다. 괜스레 민망해서 질래가 먼저 어색함을 깼다.
“팔, 안 불편해?”
“아니. 하나도.”
덥석, 질래의 손이 잡혔다. 눈매가 동그래진 질래와 달리 은우의 입술은 초승달을 그렸다.
“많이 불편해 보이는데.”
“그럼, 방법이 있지.”
끼이익, 쇠 긁는 소리다. 평소 같으면 눈살을 찌푸리게 할 의자 끄는 소리가 둘 사이의 오작교를 놓았다.
“이렇게.”
은우가 질래 옆으로 바짝 다가가 그녀의 손에 깎지를 끼웠다. 난방이 안 돼서 그런지 유독 손끝이 시려 보였다.
순간 질래는 젓가락을 앞 접시에 놓았다. 입안에 화재를 일으킨 매운 닭발보다 강렬한 심장 태움에, 오묘한 떨림에, 시간이 멈춘 듯 저도 모르게 은우를 응시했다. 그러자 은우의 붉은 입술이 들썩였다.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서, 어떡하지?”
“망했어. 너 때문이야.”
“응?”
“일시적인 유혹에 속지 말자, 일시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말자. 그게 내 삶에 가장 큰 룰이었는데.”
질래가 저만의 소신을 밝힐 동안 은우의 손은 꽤나 분주했다. 비어 있는 한 손으로 오른쪽 주머니에 있는 무언가를 찾아 질래 쪽에 맞닿아 있는 왼쪽 주머니로 몰래 이동시켰다. 지하 사무실 집을 나올 때 은우가 가장 먼저 챙긴 물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성공할 때까진 여자랑 엮이지 말자, 이건 내 룰이었고.”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남녀의 입가에선 웃음이 흘렀다. 대신 깍지 낀 남자의 손이 질래의 손을 더욱 꼭 붙들었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무언의 시그널이기도 했다.
“은우야, 왜 그래야 해? 너 인기도 많았을 거 같은데.”
“…극도로 외로워 본 사람은 마음을 함부로 못 주거든.”
“외로우면 오히려 누군가를 원하지 않나?”
“…어릴 때 처음으로 맘 준 여자랑 생이별을 해봐서 그런가, 맘 주는 거 무섭더라.”
“…….”
“그래서 가질래는 왜 여태 혼자였는데?”
글쎄, 왜 지금까지 혼자였을까? 아마도 자라온 환경이 알려준 교훈 때문은 아니었을까. 영원한 마음 따윈 세상에 없다고. 그래서 쓸데없는 감정 소모로 상처받지 말자고. 어차피 윤태윤과의 결혼은 가질래 인생에 있어서 바뀔 수 없는 룰 같은 거였으니까.
“가질래, 이번엔 같이 용기 내보자. 절대로 놓고 싶지 않아.”
은우는 질래의 손을 제 점퍼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질래도 자연스레 그의 팔뚝에 머리를 기댔다. 이번에는 여자가 자발적으로 먼저 다가왔다.
“살아보니까 이 세상에 영원한 룰도 없더라. 바뀌라고 있나 봐. 그치?”
제게 확고한 마음을 전해 준 여자의 진심이 은우는 고마웠다. 그래서 청담동 집에서부터 결심했던 그 일을 지금 시행하고자 한다. 제 주머니 안에 있는 질래의 작은 손에서 네 번째 손가락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주머니 깊숙이 숨겨뒀던 반지를 질래의 약지로 밀어 넣었다.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질래의 시선이 자연스레 은우에게로 향했다.
“이게 뭐야?”
“봐봐. 내가 유일하게 물려받은 거.”
질래가 주머니 속에서 제 손을 빼 활짝 펼쳐 봤다. 가녀린 약지에는 세상에 하나뿐인 크고 묵직한 보석이 누추한 가게와는 어울리지 않게 반짝반짝하며 위엄을 드러냈다.
“내 전 재산 걸게, 가질래한테.”
“이거 설마 네 어머니 거….”
그 순간 은우의 눈에 들어온 건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아니었다. 다이아보다 빛나는 여자의 눈동자. 붉은 입술. 상기된 볼. 갑자기 목이 메었다. 은우는 재빨리 얼음이 든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켠 후 질래의 말꼬리를 잘랐다.
“룰은 바뀌는 거랬지?”
“어?”
“봐봐! 여기 아무도 없어.”
“그게 뭔 상관… 어머.”
은우가 질래의 턱을 감싼 후 시선을 그녀에게로 고정시켰다. 잠시 동안 둘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은우가 질래의 붉은 입술을 엄지로 쓸어낸 후 비장한 표정으로 잇새를 갈랐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룰 좀 깨고 가자.”
“뭐? 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