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유혹하지 마, 못 참겠으니까
가질래?
명품 속옷의 주인이자 윤태윤과 이은우를 홀린, 그 대단한 여자의 실체가 가질래라고?
윤태윤의 약혼자 아니었나? 지나는 질래의 등장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합죽이밖에 될 수 없었다.
윤태윤처럼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세계의 사람. 평범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다가갈 수 없는 신계의 영역.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재벌 일가의 위인들이었다.
또 한 번 자존심 따윈 고이고이 접어둔 채로 지나는 고새 만취한 척, 침대와 일체형 옵션인 양 연기했다.
그 사이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은우가 양손 가득 제 옷들을 들고 나왔다. 흰색 롱패딩과 점퍼, 트레이닝 복. 종류도 제각각이었다.
“질래야, 아까 그 말 다 들었어. 좀 멋있긴 한데, 그럴 필요 없다고, 내가 내 자력으로, 유리천장을 뚫을 거거든. 가질래가 나한테 기댈 수 있게.”
희한하게 저 허무맹랑한 말이 믿겨졌다. 은우라면 정말 그런 기적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벗은 몸으로 그에게 기대어 울어봤으니까. 제 처음을 내어 준 남자니까. 그래서인지 믿어졌다.
“밖이 추울 거야. 일단 내 거로 꽁꽁 싸매자. 롱패딩도 입혀줄게.”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좀 전까지만 해도 카리스마 넘치던 질래가 수줍은 얼굴로 은우를 바라봤다. 은우는 그런 팔색조 매력을 가진 여자 친구가 좋아서 입매를 활짝 찢었다.
봐도 봐도 여자를 설레게 하는 다정한 미소였다.
“할 수 있든 없든, 해주게 내버려 둬. 그런 거 할 줄 몰랐던 남자가….”
“…….”
“하고 싶대. 가질래한테.”
순식간에 판세가 뒤집혔다.
벽장 속에서 홀로 가슴 졸이던 질래는 환하게 웃었고 빽빽대던 지나는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 관자놀이나 지압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우는 질래의 만류에도 굳이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정성스레 채워줬다. 언제 준비했는지 두툼한 목도리로 질래의 목을 빙빙 두르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눈사람으로 만들었다.
“앞이 하나도 안 보여. 너무 무식하게 두르는 거 아니야?”
“내가 있는데 그걸 왜 걱정해. 안 보여도 어디든 갈 수 있어, 가질래는.”
은우가 질래의 목도리를 꽉 잡아당겼다.
“살살해줘. 너무 낀단 말이야.”
“내가 아까 느꼈던 거네, 엄청 좁더라.”
“뭐?”
미소를 머금고 있던 질래가 순시에 정색하며 은우의 가슴팍을 퍽퍽, 두드렸다. 그렇지만 아프지 않을 만큼의 강도였다. 제 가슴을 치는 질래의 가녀린 손목을 은우가 낚아챈 후 순식간에 그녀를 안아 들었다.
“뭐야!”
“나가자, 이 거지 같은 집구석.”
질래를 바라보는 은우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
“가질래 안고, 같이 탈출하는데 당연히 좋지.”
현관문으로 다가가는 순간까지 질래는 롱패딩 안에서 작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이 은우의 눈엔 새하얀 천사처럼 보였다.
“이러니까 진짜 연애하는 거 같다. 그치?”
“그래서?”
“내 얼굴 봐, 이런 표정이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이라고.”
“사랑이 식으면?”
“식나 안 식나 잘 지켜봐.”
은우가 질래의 얼굴에 입술을 내려 뽀뽀 한 후 침대 쪽으로 동선을 틀었다.
탁상까지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훅, 입으로 바람을 불어 방 안에 유일한 조명인 촛불을 꺼버렸다. 은우가 깜깜한 암흑 속에서 손을 더듬더니 무언가를 챙겨 제 옷 주머니 속에 쏙 넣었다.
“최지나 씨. 촛불이 꺼졌네요. 정신 좀 차리세요. 영원한 톱스타는 없으니까.”
“…나쁜 새끼.”
양주를 들이켠 후라 머리도 아프고, 속도 해일처럼 거세게 울렁였다. 윤태윤에게 까이고 이제 후배한테까지 차이다니. 가질래와의 이은우 쟁탈전에서 지나가 완벽하게 패배한 것이다.
훨훨 타오르는 승부욕을 철저히 감춘 채 지나는 다음 스파링을 기약했다.
은우한테 안겨 밖으로 직행하던 질래도 주먹을 꽉 쥐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
함박눈은 멈췄지만 여전히 살갗을 아리는 추위가 살벌하기만 한 크리스마스 새벽.
어두운 골목길에 선 남녀는 몇 시간 전과는 다른 관계가 됐다.
남자를 밀어내던 여자의 손이 이제 그의 주머니 안에서 그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의 물건이 제 가랑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던 장면이 떠오를 만큼 충분히 깊어졌으나, 여전히 작은 스킨십에도 맥이 정신없이 뛰는, 심장을 예민하게 만드는 그런 관계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설렘으로 추위를 극복해 보려던 그때, 은우의 반대편 주머니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전화 온 거 같은데?”
“내 폰 아니야.”
“그럼?”
“그 여자 거.”
“설마 그 여자가 지나야?”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생겼거든.”
지나의 휴대폰을 들고 왔다는 말에 질래의 가지런한 눈썹이 찌푸려지자 은우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걱정 마, 돌려줄 거야.”
사실 은우는 집에서 나오기 직전 촛불을 끈 후 탁상 위에 둔 지나의 휴대폰을 몰래 갖고 나왔다.
지나가 갑자기 찾아와 들이댄 데는 분명 이를 지시한 배후 세력이 있을 거란 확신에서였다. 아마도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남자가 분명할 것이다.
키가 큰 덕에 은우의 시각에 저 멀리 서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포착됐다. 차 뒤로 몸을 얼른 숨겨버린 남자. 하지만 은우는 자신이 발렛 파킹한 차를 똑똑히 기억했다. 그가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급한 대로 지나의 휴대폰의 동영상 기능을 켰다. 그리고는 질래의 머리에 헬멧을 씌워줬다. 최근에 겨울용 헬멧을 잃어버린 탓에 유감스럽게도 귀가 오픈된 하프 페이스 헬멧이었다.
은우 눈에는 눈사람 패션에 헬멧까지 쓴 질래가 귀여워 죽겠지만 그녀의 얼굴은 잔뜩 얼어 있었다.
“정말 이거 타는 거야?”
상류 1% 무리 중에서도 퀸으로 불렸던 질래에게 왕관 대신 바이크 헬멧이 씌워지자 나온 그녀의 첫 마디였다.
새하얀 입김과 함께 나온 질래의 목소리가 마치 기계음처럼 송출됐다. 눈동자마저도 추위에 떨고 있는 듯,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응, 오토바이 타봤어?”
“아니. 그래도 아까 눈도 내렸는데, 위험하지 않을까?”
“탈래? 말래. 싫으면 택시 타고 가고.”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치열하게 갈등 할 수 있나 싶을 만큼 질래는 고민됐다.
솔직히 택시가 편할 것 같은데 오토바이를 타면 이 추위가 평생 뇌리 박힐 것만 같았다.
어차피 시작된 모험이니까, 은우 말대로 가볼까? 두려운 와중에도 그녀의 눈빛만큼은 반짝반짝 빛났다.
“얼마나 타야 해?”
“그냥 쭉 달리면 용산까지 20분?”
“쭉 안 달리면?”
“글쎄. 야식 타임?”
“이 시간에?”
어릴 때부터 웃는 모습이 타고나게 예쁜 아이였다. 은우가 저를 보며 활짝 웃을 때면 질래의 딱딱한 마음이 무디어졌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추위를 녹이는 화끈한 야식 있는데.”
은우가 빨갛게 얼어붙은 질래의 귀에 제 따뜻한 양손을 갖다 댔다. 그리곤 질래를 바라보며 좋아 죽겠다는 듯 그녀의 콧등에 입맞춤을 내렸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치겠다. 진짜.”
“알겠어, 타면 되지? 까짓것 타 보지 뭐.”
“예쁘다는 말, 이상하게 해석하네.”
들어도, 들어도 기분 좋은 마법의 단어, 예쁘다는 말. 하지만 밀려오는 민망함에 질래가 말미를 돌렸다.
“하루 종일 굶어서 그런가, 배가 고픈데 배부른 기분이야. 알아?”
“응, 알아, 보기만 해도 배부른 기분. 방금 알았어.”
은우가 고개를 주억이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가끔은 어떤 상황에서도 저를 부둥부둥 해줄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은우가 그렇게 꿈처럼 다가왔다.
봉실봉실, 귀엽게 웃는 여자의 입술이 갖고 싶어서 남자는 제 패딩이 질질 끌리든 말든 눈사람이 돼버린 질래를 꼭 안았다.
“유혹하지 마, 못 참겠으니까.”
“내가 언제 유혹했다고 그래.”
돌연 고개를 꺾어 그녀의 상기된 귓바퀴를 사분사분, 타액으로 녹여낸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야릇하게 소곤댔다.
“지금 엄청 박고 싶거든, 또 섰어.”
“조건 벌써 잊었어? 안 되겠다. 야한 농담도 금지야!”
당황한 질래가 나름 목에 힘을 주어 강단 있게 말했다. 하지만 여자를 품은 은우가 그녀를 더욱 꽉 안아버렸다.
“어떡하지? 이런 모습도 너무 귀여운데. 참아야겠지?”
“오토바이, 안 타?”
“타면 알아서 죽으려나? 가질래가 남자친구 여러 번 죽이네.”
남자친구라니. 질래는 그 풋풋한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그 사이 은우가 저를 번쩍 들어 뒷좌석에 조심스레 앉혔다. 항상 가식적인 대접에만 익숙했던 그녀였기에 은우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을 관통한 듯 따사롭게 느껴졌다.
썸탈 때 그렇게 설렌다더니. 뭐, 이런 감정인 걸까?
이미 할 거 다 해놓고도 혼자 헤죽거리는 걸 보니 꼭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애틋함이 남달랐던 은우가 정말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 같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사이 오토바이는 천천히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칼바람의 실체와 마주하진 않았다.
사실 은우도 평소보다는 좀 더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누군가를 태우고 라이딩 해본 건 처음이라서 혼자 탈 때보다 묵직해진 승차감에 괜스레 긴장감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제 허리를 감싸 안은 그녀를 신경 쓰면서도 한 손으로는 골목 끝에 주차된 차와 그 주변으로 얼쩡거리는 남자를 남몰래 촬영했다.
그리고 골목길을 벗어난 순간, 박진감 넘치는 진짜 라이딩이 시작됐다.
“꺄악!!!”
여자가 소리를 지를 만큼 갑작스레 속도를 높였다.
그런데 질래의 목소리가 왠지 겁먹은 사람의 외침처럼 들리지 않았다. 분명, 자유를 만끽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은우는 저를 꼭 붙잡고 있는 그녀에게 큰 목소리로 물었다.
“무서워?”
“아니! 좀 더 빨리 달렸음 좋겠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 추운데, 추워서 좋아.”
“오케이, 알겠어, 그럼.”
은우가 올림픽대로를 타자, 바이크의 속도를 점점 더 높였다.
“날자! 가질래.”
“정말 날고 싶다, 내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우리, 이제 막 시작했는데 무슨 소리야!”
“좋다는 소리? 이은우, 넌 내가 그렇게 좋니?”
부우우웅.
은우가 바이크의 속도를 무한대로 끌어 올렸다.
박진감 넘치는 남자의 고백에 질래는 더욱 용감해졌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양팔을 허공에 활짝 벌렸다.
도로 위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랄까. 마치 날고 있는 것 같았다.
“은우야 우린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속도로 알려줄게.”
은우는 바이크의 속도를 높였다. 미끄러지듯 도로를 질주할 만큼. 시속 몇 킬로미터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그녀를 향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바이크가 낼 수 있는 속도의 최대치를 냈다. 차가운 칼바람에 얼굴이 베일 듯 따끔거렸지만 은우는 지금의 심정을 질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가질래!”
“응?”
“죽어도 좋을 만큼….”
그들 주변으로 순식간에 지나가는 어여쁜 불빛들이 쥐불놀이라도 하듯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사랑해.”
어둠을 밝히는 조명들이 별똥별처럼 떨어졌다. 질래의 어두운 마음에도 환한 불빛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분명 겨울바람은 찬데, 마음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쏜살같이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 질래는 은우의 사랑 고백에 두려움도 잊었다.
청담동에서부터 누군가가 저들을 뒤쫓아 오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두 사람을 태운 바이크는 도로를 달구며 뜨겁게, 무한 질주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