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빈 몸으로 와
“어떤 여자니? 이은우 침대를 헤집은 년. 궁금하다.”
제가 찍은 지망생 중 유일하게 저와의 잠자리를 거부한 이은우와 저를 닭 보듯 바라보는 남자 윤태윤을 들었다 놓는 여자라니, 지나의 데이터상으로는 예측이 안 됐다. 태윤이 약혼 전에 진심으로 사랑했던 세컨드쯤 되나보다 생각했다.
세상 부러운 년. 면상이 궁금해진다.
그렇다고 의문의 여자에 대해 딱히 정보를 들은 것도 없었다. 그 여자가 누군지 알게 되더라도 침묵하는 조건으로 태윤과 거래했기에 그저 은우만 유혹하면 됐다. 혹 잠자리에 실패하더라도 지금 이 공간에 숨어 있는 여자에게 이은우에 대한 불신을 팍팍 심어주면 그만이었다.
“속옷은 제법, 명품이네.”
허우적허우적, 술에 취해 바닥에서 헤엄치던 지나가 제 손에 들린 브래지어를 보고 단번에 눈치챘다. 허세든, 타고난 부자든, 분명한 건 돈을 쓸 줄은 아는 여자란 사실이었다.
그런 지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남자가, 인내심이 바닥난 듯 지분대던 입술에서 낮은 저음을 내보냈다.
“이사님! 남 실장님한테 전화 넣어 드릴까요?”
남 실장은 지나의 매니저이자 심복 중의 한 명이었다. 지나와 분명하게 선을 긋고자 은우는 업무 처리하듯 딱딱한 말투로 그 의지를 힘껏 드러냈다. 그러자 오만상으로 충분히 못생겨진 지나가 더더욱 미간을 찡그렸다.
“야! 뭔데 날 거부해! 이렇게 대놓고 주겠다는데!”
“죄송한데, 대놓고 주는 거 먹을 만큼 배고프지가 않아서요.”
“방금 쌌어? 시간 좀 줘?”
“설마 했는데, 미친 거 맞네.”
은우의 무미건조한 답변이 지나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녀의 승부사 기질을 건드린 것이다.
“신인이 배가 불렀다. 벌써부터 그렇게 야성을 잃으면 되겠어? 이은우?”
어쩌다 젖은 캐시미어 코트 하나 달랑 들고 벽장 안에 숨게 된 질래는 밖에 있는 둘의 대화를 듣는 게 점점 거북해졌다.
다만 그 와중에도 신경 쓰이는 건 대한민국 최고의 섹시스타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 손놀림 하나하나가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지나라는 여자, 그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
조명이라곤 촛불 하나가 다인 누추한 공간에서도 맥심 화보를 찍어내다니. 벽장에 갇힌 질래는 그녀의 농염한 자태에 위축되고 말았다.
그사이 마른 바닥에서 수영 중이던 지나가 뭉그적뭉그적 기다시피 침대로 등반했다.
방금 전까지 은우와 사랑을 나눴던, 제 애액이 마르지도 않은 그런 특별한 침대 아닌가. 그런데 다른 여자가 그곳을 침범해 대자로 뻗어선 허공에 긴 한숨을 흩뿌린다.
모르긴 몰라도, 그 숨결이 어두운 방 안을 더욱 시커멓게 짓눌렀다.
“이사님, 무슨 일 있어요? 왜 이래요, 죄송한데 오늘은….”
“은우야, 저 초는 몇 시간짜리니?”
“예?”
지나가, 탁상에 놓인 향초를 가늘게 뜬 눈으로 하염없이 주시했다.
“난 말이야, 오늘 다 태웠다! 내 자존심.”
하…. 지나가 길게 몰아쉬는 날숨엔 보이지 않는 설움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은우는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에게 동병상련을 느낄 처지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까지 질래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읊조리던 그런 남자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지나 곁에 멀찌감치 떨어져 조심스레 운을 뗐다.
“이사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제가 다음에 다 들어드릴게요, 오늘은….”
“그냥 네가 좀 위로해 주면 안 돼?”
“네?”
“너, 이 위에서 방금 한 거. 나도 해주라.”
지나가 코를 킁킁대며 침대를 물들인 붉은 혈흔을 찾아 검지로 꾹 눌렀다.
“설마, 처음인 여자랑 잔 건 아닐 테고, 피 흘리는 여성분 어디 계시려나.”
순간 귓바퀴까지 빨개진 은우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찬물 한잔 갖다 드릴게요. 많이 취하신 거 같은데.”
은우는 태연한 척하느라 괜히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는 지나의 휴대폰도 탁상 위에 올려 뒀다.
질래는 저 둘의 대화를 엿듣는 것만으로도 호흡곤란이 올 지경이었다. 비좁은 벽장 탓만은 아니었다. 제 처음의 흔적을 찾아낸 지나 때문에 몰려오는 민망함을 홀로 견뎌냈다.
어쩌면 자신보단 저 둘의 조합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별의별 생각들이 질래를 마구마구 괴롭혔다. 오만가지 상상의 나래가 오해의 구렁텅이로 그녀를 처박았다.
그 사이 은우는 딱히 거실이라 할 것도 없는 공간에 성의 없이 놓여 있는 중고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냈다. 찬장에서 물컵을 내리는 동안 지나는 알코올에 잠식돼 무디어진 손끝으로 제 코트 단추를 정성스레 풀어냈다.
물론 그녀에게서 등진 은우는 이 상황을 알 턱이 없었다. 그걸 고스란히 벽장에서 숨어 보는 질래는 째깍째깍 시한장치가 달린 다이너마이트가 심장에 설치된 듯, 질투라는 심지가 점점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숨어? 뭔 죄를 지었다고, 왜 이 꼴을 봐야 해?’
당장이라도 벽장에서 나가고 싶지만, 은우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데 괜히 성급히 나섰다가 남자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는 건 아닌지….
선택지는 뻔한데, 아무것도 고를 수가 없었다.
그저 사랑 고백받은 날치고는, 지켜 온 순결을 깨뜨린 날치고는, 마무리가 막장이다 싶었다.
남자가 스쳐 간 몸 곳곳의 열기가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흠뻑 젖은 꽃잎은 여전히 애액으로 흥건한데…. 어디서 뻔뻔한 호박벌 같은 게 날아와서 제 것이라며 영역표시를 하는지 솔직히 화도 났다.
그런 열불 나는 제 속도 모르고 찬물에 얼음까지 띄워서 지나에게로 향하는 은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가 슬슬 미워지려던 찰나, 코트를 벗어 던진 지나가 이번에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냈다.
그러니까 세 번째 단추. 막 육감적인 가슴골이 보이기 직전이었다.
“적당히 좀 하죠. 벗는다고 다 꼴리는 줄 아세요?”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지.”
은우가 얼음물을 탁상 위에 올려 뒀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잽싸게 주워 지나 쪽으로 던졌다. 그녀의 나체에 관심이 없음을 나름대로 기분 나쁘게 표현한 것이다
“상사로서 예의 차릴 수 있을 때, 그만합시다.”
“어디 있니?”
“뭐가요?”
“그 여자 말이야, 뭐가 구려서 숨겨 놨는데?”
“개인사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요.”
잠시 둘 사이에 한두 차례 총성이 오갔다. 생각보다 팽팽한 접전에 지나가 먼저 무리수를 투척했다.
“너랑 나 꽤나 깊은 사이인 건 알아? 그날 좋았는데.”
“뭔 개소리입니까? 저 오늘 여자랑 처음 잤는데.”
“뭐?”
지나가 말렸다. 하긴 이은우가 인기는 많아도 누군가랑 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처음으로 사귄 여자랑, 처음으로 자봤다고요. 못 알아들어요?”
“…말도 안 돼.”
지나가 당황한 사이 질래는 벽장 안에서 천국을 경험했다. 은우도 처음이라니.
은우의 표정과 지나의 반응을 보니 누가 거짓을 말하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분명해졌다. 체한 듯 꽉 막혔던 가슴이 순시에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은우가 벽장에서 메말라가는 질래의 마음에 오아시스를 선물했다.
“근데 저랑은 언제 깊은 사이였습니까. 오늘 저 어떻게 사는지 처음 보셨잖아요.”
“그때, 술자리에서 분명히, 내가.”
“잠자리 거부했던 거 잊었습니까? 적어도 첫 경험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너, 여자한테 관심 없다며.”
“관심, 없었는데 매달리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요.”
은우의 반격에 흥분한 지나가 이불 속에서 꿈틀대더니 발로 과감하게 이불을 걷어찼다. 그러자 브래지어 하나 달랑 걸친 그녀의 야한 상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네 눈으로 봐, 뭐가 더 명품인지.”
“아이씨! 진짜, 좋은 말 할 때 좀 입으시죠.”
브라운관에서 봤을 때보다 더 육감적이고 탱글탱글한 가슴이었다. 예쁘게 떨어진 어깨라인과 오목한 쇄골, 잘록한 허리. 괜히 톱스타가 아니다 싶을 만큼 질래 눈에도 짜증 날 정도로 매혹적인 몸매였다.
고혹미랄까? 다만 이 패배감 속에서도 위안이 되는 건 그런 매력적인 여자를 정말 영혼 없이 바라보는 은우의 무뚝뚝한 시선이었다. 질래의 쓰라린 마음을 부드럽게 다독여주는 지독히도 무심한 눈빛이었다.
“돌지 않고선 직원 앞에서 옷 벗는 상사는 없겠죠.”
은우가 포악해지자, 도리어 제 브래지어를 풀어서 승부수를 띄우는 지나였다. 터질 듯 풍만한 가슴이 출렁이며 남심을 공격했다.
“이은우, 한번 해 나랑! 그럼. 이 건물. 네 성공. 다 보장해 줄게.”
“미쳤어요?”
“말했잖아. 자존심을 팔고 왔다고. 내 자연산 가슴이 그 정도의 가치는 있지 않아?”
은우가 씁쓸한 비소를 흘렸다. 동시에 방 안에는 쫀쫀한 긴장감이 조성됐다.
“그런데 어쩌죠? 자연산이든 양식이든, 뭐든 전 거절인데.”
“야! 나란 여자가 네 자존심만도 못해?”
지나의 발악에 은우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벽장 쪽으로 향했다. 만약에 질래와 재회하지 않았다면 솔직히 오늘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이 건물,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 그 모든 게 탐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개새끼에서 사람이 되겠다고 고백한 지 얼마나 됐다고, 더 이상 벽장 속에 숨어 있는 질래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 미친 여자를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혹 많은 것을 잃을 지라도 지금은 가질래 보다 소중한 게 없으니까.
“계약 해지입니다. 꺼져주세요. 아니다. 내가 꺼질게. 원래 네 거였지? 이 집.”
“뭐라고? 너 지금….”
은우가 탁상에 둔 얼음물을 지나 앞으로 빠르게 이동시켰다. 순간 얼음물이 넘실넘실, 지나 쪽으로 요동쳤다.
“깜짝이야, 너 얼음물 붓기만 해.”
“요즘 같은 시대에 갑을 관계에 따른 성추행, 이슈되는 거 몰라서 이러나? 얼음물을 먹든, 맞든 정신 좀 차리지?”
“뭐라고? 성추행?”
그러자 은우가 지나의 귓가로 제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이내 낮은 톤으로 그녀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좆도 안 선다고. 다 벗고도 좆도 못 세우는 매력 없는 상사, 비전 없어서 간다고.”
“갈 곳도 없는 주제에. 내일 얼마나 후회하려고, 어? 너한테 투자한 교육비랑 계약금. 어?”
끼이이익!
그때였다.
은우는 정말이지 이 타이밍에 굳건하게 잘 닫혀 있던 저 벽장 문이 열릴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맨몸에 젖은 캐시미어 코트 하나 걸친 여자 때문에. 그 앞섶 사이로 보일락 말락, 키스마크가 새겨진 고운 살결이 보일 것만 같아서, 은우의 하체가 팽대 강직 현상을 일으킬 뻔한 사실이었다.
“은우야, 우리 집에 가자. 여기서 더 챙길 거 있니?”
차분함과 도도함이 깃들여진 누구보다 섹시한 목소리 톤.
질래의 물음에 은우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등장만으로도 최지나를 버림으로써 생기는 두려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은우가 미소 짓자 경직돼있던 질래의 입가도 한층 싱그러워졌다.
“이은우, 빈 몸으로 와, 없는 건 내가 다 사줄 테니까.”
그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질래의 타깃이 바뀐 것이다.
그 사이 은우는 옷을 가지러 창고 방으로 사라졌다. 이를 확인한 질래가 지나의 흔들리는 속눈썹을 포획했다.
“최지나 씨? 지금부터 이은우 씨와 관련된 모든 법적 책임, 위약금 등등. 강화그룹 자율주행팀 팀장 저 가질래가 위임받아 처리합니다. 이번에 나온 그랜듀 신모델, 출연하는 드라마에 협찬 들어가는 거로 아는데, 유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