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야한 손님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복도 맨 끝에 있는 펜트하우스.
지나도 그곳은 처음으로 입성해 보는 거였다. 거대한 비밀의 문이 열리자 그 고고하기만 했던 윤태윤 본부장이 꽤나 취했는지 옷매가 흐트러져 있었다.
“박 사장 수준하고는. 보낸다는 게 여자였어?”
“왜요? 계약서라도 들고 오길 바랐어요?”
한껏 도도하게 들어선 지나는 태윤의 싸늘한 반응에 한 방 맞은 듯 얼얼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법. 제가 누구인가. 대한민국 최고의 톱스타이자,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목적을 불사하는 백전백승의 여인, 최지나 아닌가.
“크리스마스이브에 경쟁업체 사람이 만나고 싶으세요? 이 밤에? 갑자기?”
“갑자기 연락한 게 누군데. 쓸데없는 이야기 할 거면 나가고. 원래 이런 날 일 얘기만큼 재밌는 게 없지.”
“많이 취한 거 같은데, 계약서에 사인이라도 잘못하면 어쩌시려고.”
지나가 태윤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그의 빈 잔과 제 잔을 채웠다. 은근하게 가슴골을 어필했음에도 태윤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재벌 자제들을 만나봤지만 윤태윤은 뭐랄까. 분위기부터가 남달랐다. 왕족 중에서도 성골의 느낌이랄까. 늘 목적과 수단을 위해 남자를 이용했던 최지나 인생에 진짜 갖고 싶은 남자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정복욕이 들끓었달까. 국내 TOP5 안에 드는 TY 그룹의 후계자인 것도 그러했지만 외적으로나 풍기는 분위기가 배우 못지않게 훌륭했다.
“약혼자분은….”
“그 얘긴 꺼내지 말지. 내가 오늘 어떤 여자 때문에 많이 다쳤거든.”
취기가 오르자 태윤은 갑자기 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제 신세가 닭 쫓던 개만도 못한 것 같아 솔직히 서러웠다. 그래서 차마 제 약혼자 가질래 때문이란 걸 밝히지 못한 채 가상의 연인이 존재하는 양 속내를 털어놨다.
제 열등감을 누군가에게 표출한다는 게 태윤 역시 어색했지만 지나는 상대로 하여금 솔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다만 술 접대부처럼 몸을 과도하게 밀착시키는 게 유일한 단점이랄까.
“본부장님, 기분 더럽죠.”
“대체 그 자식, 매력이 뭘까?”
“그럼, 본부장님도 복수하세요. 솔직히 화나잖아요.”
“복수? 내가 뭘 해야 복수가 되는 거지? 그냥, 그 자식이 내 여자 옆에서 떨어져 나갔으면 좋겠어. 아니, 그녀도 나 때문에 아파봤음 좋겠어.”
“그래요? 생각보다 간단한데.”
윤태윤 옆에서 치근덕거리던 지나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입고 있던 스커트가 바닥으로 툭, 추락함과 동시에 그녀의 기막힌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름다운 항아리 골반이 빛을 발하는 찰나였다.
“기분 전환엔 이만한 것도 없을 텐데.”
그러더니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로 태윤에게 엉덩이를 들이미는 과감함까지. 성난 듯 탄탄하게 바짝 선 힙에서 그대로 허벅지까지 자연스레 연결된 고탄력 허벅지. 얇은 종아리 밑으로 뻗은 극세사 발목과 섹시하게 마감된 아킬레스건까지. 가히 최고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그림 같은 잘빠진 몸매가 태윤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 어떤 여자도 가질래를 대신할 수 없었다.
“당장 옷 안 입어? 발가벗긴 채로 쫓겨나고 싶어서 그래? 얘기 좀 나눴다고 나랑, 장난해?”
자신만만했던 지나의 낯빛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저는 그냥 본부장님한테 복수의 기회 좀 드리려고. 나랑 잤다고 하면 그 어떤 여자도 질투심 폭발인데.”
“정말 톱이 되고 싶으면 그 싸구려 기질부터 버려. 정말 개 같은 크리스마스이브야, 안 그래?”
홀딱 벗는 저를 마네킹 보듯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는 태윤 앞에서 ‘저도요. 정말 기분 개 같아요’라고 지나도 답할 뻔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유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까지 엄습했다. 쓰디쓴 패배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를 낼 수도, 기분 나쁜 티를 낼 수도 없는 상대라는 게 더욱더 비참했다. 옷을 챙겨 입은 후 꼬깃꼬깃 구겨진 자존심을 가린 채 다시 태윤 옆으로 가 그의 비어 있는 잔에 채웠다.
“그래서 어쩌려고요?”
태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제 옆에서 마담 노릇을 자처하는 지나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그녀를 향한 동정심도 살짝 어려 있었다.
양주를 한 모금 넘긴 후 지나의 질문에 고민하듯 그는 잔을 든 채로 대답을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그녀가 그 새끼를 경멸할까?”
“누군진 몰라도 윤 본부장님이 많이 사랑하나 보네요. 부럽다.”
“쓸데없는 사족은 집어치우고.”
어떤 말에도 철벽을 치는 윤태윤에겐 도저히 파고들 틈이 없었다. 일단은 후퇴 선언이다. 지나는 유혹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내려놓은 채 그의 귓가에 제 얼굴을 밀착시켰다.
“제가 꼬셔줄까요? 선수는 선수가 붙어야죠.”
“어린 놈 꼬셔서 뭐하게.”
“꼬셨다 버리기. 제 전문인데. 그럼 남자도 여자도 둘 다 아프지 않겠어요?”
“자신 있어?”
“대체 우리 본부장님을 밀어낸 남자가 누구길래 그럴까. 제가 다 궁금해져서, 그 남자 알고 싶네요.”
지나가 태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러자 태윤이 지나의 귓가에 잠긴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순시에 지나의 팽팽한 이맛살이 급격히 구겨졌다.
“설마….”
“아마 지금 둘이 같이 있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설마, 지금 가라고요?”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펜트하우스에 입성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아웃이라니. 옷까지 벗었지만 결국 태윤의 옷깃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럼에도 지나를 충격에 빠뜨린 건 제가 느낀 굴욕감보다 태윤 입에서 나온 그 대단한 놈의 정체 때문이었다.
제길. 처음에는 윤태윤만 꼬시면 그만이었는데 지나의 셈법이 더욱 복잡해졌다. 내뱉은 게 있으니 당장 가긴 해야 할 것 같고. 솔직히 태윤이 언급한 사내를 유혹할 자신이 없달까.
지나는 테이블에 남아 있는 양주를 병 채로 단번에 마셔버린 후 윤태윤을 뒤로 한 채 펜트하우스 밖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늘 그래왔듯 휴대폰으로 제 얼굴 일부가 담긴 사진과 윤태윤이 술 먹는 장면을 셀카에 담았다.
찰칵.
“뭐 하는 거야?”
윤태윤의 불호령에 지나는 얼른 휴대폰을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글쎄요, 같이 술 마셨는데, 사진 한 장 정도는 찍어 줄 수 있잖아요.”
“당장 지워.”
“우리가 뭐 했어요? 그냥 셀카인데요, 뭘. 대신, 요구 조건은 다 수용할게요.”
윤태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지나는 도망치듯 펜트하우스에서 빠져나왔다. 절세미녀라 칭송받는 톱스타의 초라한 퇴장이었다.
***
쾅쾅쾅쾅! 쾅쾅쾅쾅!
“야! 이은우, 문 안 열어? 아님, 문 따고 들어간다.”
은우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가 누군지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왜? 지금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저를 찾아온 걸까?
건물주여서 사무실마다 열쇠를 갖고 있나?
사실 은우에게 사무실 집을 저렴한 월세로 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소속사 이사인 지나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제 공간을 불시에 침범한 적이 없는, 경우 있는 상사였다.
그런데 왜? 선뜻 이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운 지금.
더 큰 문제는 이 새벽 낯선 여자의 방문에 상처받은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질래였다.
“너, 애인 있니?”
흔들리는 촛불보다 더 위태로워 보이는 여자의 눈동자. 하지만 시간이 없다. 문틈으로 이 열쇠, 저 열쇠 다 꼽아 보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왠지 곧 문이 열릴 것만 같은 불길함. 그렇다고 지나한테 질래를 들켜서도 안 될 일이었다. 은우 본인보다 분명 질래한테 흠이 되는, 혹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상황일 테니 말이다.
“우리 기획사 이사님이야. 이 건물주기도 하고.”
“이사님? 이사가 이 시간에 왜? 스폰, 그런 관계야?”
“절대 아니야, 입술도 맞댄 적 없어.”
“근데 왜?”
“일단, 잠깐 숨어 있어. 내가 얼른 돌려보낼게.”
해명을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탓에 오해가 만리장성을 쌓았다.
딸깍, 그사이 맞는 열쇠를 찾았나 보다. 질래는 얼른 제 속옷을 침대 밑으로 밀어 넣은 후 벽장에 몸을 숨겼다.
은우도 재빨리 바지부터 대충 걸친 후 질래의 신발을 숨기려 신발장을 여는데,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다행히 질래의 신발은 잘 숨겼으나, 포즈가 매우 부자연스럽고 어정쩡했다.
“이은우. 뭐야? 왜 있는데 안 열어줘?”
“이사님이야말로 이 시간에 왜 오셨는데요?”
처연한 얼굴로 터벅터벅, 거실로 들어오는 지나가 갑자기 은우 품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그걸 벽장 틈새로 지켜본 질래의 마음 역시 화르르 불타버렸다. 어느새 떨리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취했는데요.”
“너, 성공하고 싶니?”
“성공시켜 준단 말, 믿긴 했죠. 일단 술 깨고. 다음에 얘기해요.”
“방법 알려줘?”
은우는 양주 냄새를 풀풀 풍기는 지나를 부축해서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겨우겨우 앉혔다.
“정신 차리고, 다음에 얘기하자니까요.”
젠장! 누구한테 연락해야 지나를 데리고 갈까. 일단 휴대폰을 찾으러 그녀에게 등지려던 찰나. 덥석, 그의 손이 지나에게 붙잡혔다.
“가지마. 이은우. 오늘 자고 갈 거야.”
“네?”
“너랑, 벗고.”
“미쳤어요?”
은우가 그녀의 손을 빼낸 후 자리를 뜨자 그를 붙잡겠다며 휘청휘청 다가오던 지나가 그대로 침대 옆에 꼬꾸라져 버렸다. 바닥에 철퍼덕 쓰러진 것이다.
“제발 좀, 가만히 있어 봐요!”
은우의 다그침에 이 여자,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는 게 아닌가.
이 모든 상황을 엿보고 있던 질래도 황당했다. 일단 은우를 찾아온 사람이 톱스타 지나란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그녀의 황당한 행동에 첫 경험으로 얼얼해진 내벽만큼이나 어안이 벙벙해져 버렸다. 이대로 있다간 벽장 안에서 질식할 것만 같았다.
“뭐야, 너? 정말 사랑에 빠졌어?”
“무슨 헛소리예요.”
“헛소리? 이은우가 여자를 들여?”
“뭐라고요?”
지나 입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언급되자 그녀를 노려보던 은우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이 침대 밑에서 허우적대던 지나가 하필 우연히 침대 밑에서 무언가를 잡은 듯 계속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발 정신 좀….”
“봐봐, 여자 있잖아. 어디다 숨겼니?”
엎친 데 덮친 격. 나자빠진 지나 손에는 하필 질래의 명품 자수 브래지어가 들려 있었다. 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