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안 아프게 잘 발라줘
지금껏 보여준 진심들은 어떻게든 한 번 더 자기 위해 흘린 인공감미료 같은 달콤함에 불과했던 걸까. 질래는 혼란스러웠다.
그 순간 질구 끝에 맴돌던 귀두가 꽃잎에 쑥 박히는가 싶더니 은우가 허리를 곧추세워 곧바로 뒤로 물렸다. 질래의 가랑이 사이를 매끄럽게 빠져나온 살색 귀두엔 마치 증표처럼 붉은 인주가 요망하게 찍혀있었다.
“도장 찍었다. 3개월간 안 자도 상관없다고. 가질래가 원하면 하고, 원치 않으면 계속 고자 놀이하고.”
“그럼 3개월간 나랑 뭐하자는 건데?”
질문자가 더 긴장했다. 질래는 마른침을 꼴깍 힘겹게 넘겼다.
그러자 도톰한 입술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이 남자. 한쪽 턱을 괸 채 비스듬히 누워 질래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게 아닌가. 심쿵하게.
“연애. 몰라?”
“연애가 뭔데?”
5분 전만 해도 울고불고 난리 쳤던 진중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움칠대던 입술 사이로 픽, 옅은 바람이 새어나갔다. 서로를 보며 실소가 터진 것이다.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던 눈망울도 어느새 서로를 비춰주는 손전등이 됐다.
세상에 연애가 뭐냐니. 질래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온 세상이 인정한 인텔리전트 가질래가 연애를 몰랐구나. 그럼 나랑 해보든가, 나도 잘 몰라서 알고 싶던 참인데.”
“연애 고수께서 연애를 알고 싶다?”
청일하게 빛나는 고아한 얼굴이 아리따웠다. 은우의 시선에 박힌 질래의 모습이 딱 그랬다. 그 선연하고 맑은 기운이 은우를 거듭 솔직하게 만들었다.
“그럴 리가, 사귀자는 말 처음인데?”
“항상 여자가 먼저 대시했나 보네.”
“맞아.”
“맞아?”
“어디까지 취조할 건데?”
은우가 질래의 이마에 입술을 또 질척거린다. 바람을 불며 간지럽히듯 장난치는 남자 때문에 질래의 속만 애끓었다. 모양 빠지게 대놓고 질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 스스로도 왜 이렇게 유치해졌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 찼어. 사귄 적도 없고.”
“사귄 적이 없다고?”
꾹 다물고 있던 여자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바록거렸다. 연인이 되면 별것도 아닌 게 다 별 게 된다더니. 숨길 수 없는 기쁨이랄까. 질래의 양 볼에 핑크빛 로즈가 활짝 피어올랐다. 아주 잠시였지만.
“여자들은 나보고 개새끼라던데, 하도 재수 없어서.”
“그런 개새끼랑 나보고 사귀라는 거야?”
“응, 이참에 사람 좀 돼보려고.”
“이용하는 거네.”
“아니, 이용당하는 거지, 이제 가질래 거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우는 질래의 넘실대는 가슴에 제 얼굴을 뭉갰다. 바짝 선 여자의 유두가 볼에 스칠 때마다 들끓는 욕구 때문에 유독 괴롭던 크리스마스 새벽. 이미 남녀의 얼굴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연인이었다. 끈끈한 시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목구비가 툭하면 승천하여 웃음이 배시시 새어나오는 간질간질한 상태였다.
“3개월 계약 연애, 오케이 한 거다?”
“그럼, 약부터 발라. 계속 신경 쓰여서 내 등이 따끔따끔할 지경이니까.”
“왜, 약 발라줘?”
“아니, 내가 아니라,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은우가 누워 있는 질래의 가랑이를 확 벌린 후, 피 묻은 질구에 페니스를 비비기 시작했다. 이내 그 구멍 속으로 귀두를 슬슬 밀어 넣으려던 찰나였다.
“거짓말쟁이.”
“약 발라달라며. 여기 피가 나잖아.”
“너 등 말이야. 빨리 안 대.”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 꼴리게. 제법 야해졌단 말이야.”
질래가 당황해서 몸을 일으켜 세우자, 은우가 먼저 제 긴 팔을 뻗어 탁상 두 번째 서랍에서 구급상자를 꺼냈다. 그 상자를 여자 손에 쥐여 준 후 질래에게 등지는 이 종잡을 수 없는 남자. 달달하다가도 묘한 긴장감을 끊임없이 선사하는 이은우랑 정말 연애란 걸 해도 되는 걸까?
“가질래.”
“응?”
“오늘 이후로 내가 먼저 등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니까.”
“…그니까, 뭐?”
“안 아프게 잘 발라줘.”
“…….”
절대 떠나지 말란 소리처럼 들렸다. 그 한마디에 여러 의미가 내포된 것 같아서 질래는 답변 대신 행동으로 제 마음을 대신했다. 구급상자를 열어 빨간약으로 그의 상처부터 소독했다.
남자는 이 정도 통증엔 익숙하다는 듯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았다.
물론 질래 몸 곳곳에 남은 사랑의 상흔보다 덜 검붉은 게 며칠이면 새하얀 피부로 돌아올 것만 같은, 생각보다 옅은 상처긴 했다.
그 붉어진 자국에 조심스레 연고를 덧칠한 후 밴드까지 가지런히 붙여주며 드레싱을 마무리할 즈음.
“같이 씻을래?”
“…지금?”
“그럼 내일이겠어?”
촛불 하나, 그 위태로운 조명에 힘입어 서로를 품었던 이 남자와 밝은 곳에서 샤워라니. 생각만으로도 민망함에 얼굴이 후끈후끈해졌다. 상상만으로도 숨 막히던 그 편각에.
쾅쾅쾅쾅!
쾅쾅쾅쾅!
집 문을 누군가가 미친 듯이 두드린다. 마치 온 집 안이 그 애타는 노크 소리에 흔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드는 고요한 새벽. 시계를 보니, 오전 1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이 휴일에 대체 누가 이런 경우 없는 짓을 하는 걸까. 크리스마스를 즐기던 취객의 소행이겠거니 생각하기도 잠시였다.
“야! 이은우.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문 안 열어! 야! 이은우.”
분명 여자 목소리. 그것도 잔뜩 취해 혀 꼬인 여자가 왜 방금까지 저를 유혹해 오던 남자의 이름을 불러대는 건지.
질래의 심장에 구멍이 뻥 뚫리다 못해, 쌔애앵. 장기 사이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극한 시림을 남긴 채 지나갔다.
***
그러니까 2시간 전.
태윤은 거절당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기점으로 한층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질래에게 프러포즈했건만 단번에 까이고 말았다.
상주 노릇까지 했더니, 대가가 이거라니.
하지만, 그에게 포기란 없었다. 망설이기도 잠시였다. 잠시 흔들렸던 멘탈을 되찾은 후 뛰쳐나가는 그녀를 뒤쫓았다. 그런데 주차장 쪽을 달려간 질래가 웬 남자와 마주 서 있었다. 발렛 파킹 아르바이트생하고 아는 사이인가? 이런 의문점마저 우스워지던 찰나. 이후 벌어진 상황들은 태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이 발렛 파킹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남자의 품에 안겨 그대로 자리를 떠버리는 게 아닌가.
제 입술은 무안할 정도로 거부해 놓고 다른 남자와 어디론가 향하는 그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여자는 제가 알던 가질래가 아닌 듯,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태윤은 어느새 그 둘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제 눈을 의심했다. 질래를 품은 남자가 장례식장에서 그녀의 입술을 훔쳐 간 남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제길. 욕이 절로 나온다. 저 새끼는 뭔데 나와 가질래 사이 자꾸 끼어든단 말인가?
눈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 저를 차버린 여자는 한참은 어려 보이는 멀대같은 남자와 가로등 밑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화가 났다. 분노가 전신을 불태웠지만 태윤은 룸으로 돌아와 독주를 마시며 질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제게 다시 돌아와 주기만을 기다리며 한 시간 동안 홀로 독주에 취해 갈 무렵, 그는 현실을 인정했다.
가질래는 저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가질래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
같은 시간 태윤의 옆방에선 향락의 파티가 벌어졌다.
거친 호흡과 술, 남녀가 뒤엉킨 그야말로 동물의 왕국.
3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여자의 은밀한 구멍 속으로 제 페니스를 거칠게 치댔다.
“으악. 너무 세… 요.”
“좋다고 말해.”
“조, 으읏, 아악! 조, 좋아요.”
굶주릴 대로 굶주린 최상위 포식자가 흑마를 포악하게 사냥하고 있었다. 검붉은 페니스가 여자의 속살을 사정없이 짓뭉개자 소파를 짚고 있던 여자의 팔이 덜덜 떨렸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굴욕이었다. 그럼에도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으읏, 우리 사장님 무슨 일로 이렇게 화났을까?”
“윤태윤이라고 알아? 그 싸가지 없는 새끼. 유혹할 수 있겠어?”
“TY그룹의 외동아들 윤태윤 본부장이요?”
“흣.”
순간 무슨 마법이라도 부렸나, 성기가 여자의 내벽에 찰싹 늘러 붙어 쥐어짜는 듯한 극강의 죔에 남자의 다리가 스르르 풀릴 뻔했다.
“해보자는 거야?”
“아마도요? 악!”
엎드린 채로 잔뜩 들려 있는 여자의 보름달 같은 엉덩이를 돌려 남자가 그대로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여자의 벌어진 가랑이가 찰떡같이 알아서 남자의 허리에 둘러맸다.
그녀의 꿀벅지 때문인지 치골이 부딪치는 감촉마저도 다른 어떤 여자와도 비교 불가다. 마치 섹스를 위해 모든 걸 계산한 몸매 같았다.
찔걱찔걱, 음란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가 남자를 격정적이게 만들었다. 물먹은 꽃잎 사이로 페니스를 깊게, 깊게 삽입하자 여자가 개화기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자지러졌다. 덕분에 꿈틀대는 음부는 남자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했다. 평소보다 빨리 사정한 것이다.
“난 년은 난 년이네. 이래서 찾는 건가? 무는 힘이 왜 이렇게 좋아.”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윤태윤? 옆방에 혼자 있대. 내가 크리스마스 선물 보낸다고 연락 넣어뒀으니까, 가봐.”
“그럼 그 CF는?”
“성공하면 무조건 최지나가 해야지. 인증샷 알지?”
그 한마디에 한파로 잔뜩 굳어 있던 여자의 입매에,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룸 한쪽에 구비된 샤워실에서 30대 후반의 남자가 사정한 정액을 씻어낸 후 바닥에 널브러진 속옷과 스커트를 챙겨 입었다. 화장을 고친 후 마치 전장에 나서는 전사처럼 VIP 룸 맨 끝에 위치한 펜트하우스를 향해 또각또각, 하이힐을 힘차게 내딛는 지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