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넣을래, 사귈래
“사귀자.”
은우의 제안에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그의 고백 때문에, 심장을 쥐어짜는 떨림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마음과 다른 말.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아니?”
답변이 이성을 거치고 나니 아주 포악하게 변질됐다. 질래의 손이 어느새 남자의 가슴을 힘껏 밀어냈다.
“나랑, 만만해서 잤어?”
은우가 반문했다. 실망감이 스민 묵직한 목소리에는 얇은 파동이 배어 있었다.
“그런 뜻 아니잖아.”
“그럼, 밀어내지 마. 어차피 안 밀려, 나.”
질래가 거리를 벌려놓으면 은우가 제힘으로 공백을 좁혀왔다. 방금까지 사랑을 나눴던 침대 위에서 그녀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동경했던 사람과 한 번 자보려고 낸 용기도 아니었다.
여기서 가질래를 놓치면 13년 전처럼 이대로 끝날 것만 같아서. 그 불길함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우는 있는 힘껏 여자를 품 안에 가뒀다.
그렇게 질래는 남자의 드넓은 가슴에 도로 푹 묻혔다. 쿵쿵쿵쿵,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가 마치 신경안정제 같아서 이대로 시간이 멈추기를, 가능하면 영원히 머물고 싶을 만큼, 저 앞의 현실을 모른 척하고 싶은 질래였다.
하지만 답이 없다. 새드 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뻔한 결말.
그런 어리석음이라면 피하는 게 맞잖아.
질래가 저를 꼭 끌어안은 남자를 향해 현실의 포문을 열었다.
“은우야, 솔직하게 말할게.”
“그래, 좀 솔직해져 봐, 나한테.”
“맞아, 너 남자로 느꼈어. 네가 처음이라서… 좋았어. 그런데!”
‘남자’라는 단어 때문에 은우의 단단하게 오른 대흉근이 움찔움찔 팔딱였다. 하지만 말미에 붙은 ‘그런데’란 단어는 남자의 마음을 다시 움츠리게 만들었다.
분명 육체적 욕망으로 벌인 단순한 하룻밤이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관통한 온전한 결합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둘 앞에 놓인 드높은 현실의 장벽을 질래는 선뜻 넘어설 용기가 없었다.
“나 삼 개월 뒤에 결혼해. 장례식장에서 봤던 그 남자랑.”
팽팽했던 은우의 미간이 순시에 깊이 주름졌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입에선 헛웃음이 맴도는가 싶더니, 이내 파르르 떨리는 눈매에서 냉철함이 되살아났다.
“하지 마! 그 결혼.”
은우의 강경한 발언에 금세 꺼질 것만 같은 위태한 촛불처럼 질래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갈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욕망에 휩쓸리는 건 딱 여기까지다.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있고, 그럴 수 없는 게 있어, 그런데 결혼은….”
“날 원하고 있잖아. 아니야? 난 가질래 속마음 다 들리는데. 모른 척할 거야?”
“아니, 잘못 들었어. 네가 아직 어려서 감정이 앞서나 본데, 좀 더 살아봐. 누가 옳은지 내일이 알려 줄 거야.”
은우의 품에 있던 질래가 굼틀굼틀, 제 몸통을 돌려 기어이 남자와 등을 졌다. 말캉말캉한 가슴이 은우의 팔뚝을 지나 그대로 그의 손등을 푹, 덮어버렸다.
풍만한 가슴에 비해 군살 없는 여자의 등은 싸늘하게만 느껴진다. 행여나 떠날까 봐 제 손으로 여자의 허리에 벨트를 채우는 은우였다. 그 큼지막한 손에 깍지를 끼우고, 그 손에서 내뿜는 따스한 열감을 그녀에게 그대로 전해줬다.
“다 알아, 내가 아는 가질래는 아무한테나 처음을 허락하지 않아.”
“…….”
“그렇게 쉽게 벗을 만큼, 경솔한 사람이 아니야.”
“…….”
저를 가둔 남자의 손을 풀어내려 허우적대자 은우가 등을 굽혀 그녀의 정수리에 제 이마를 갖다 댔다. 동시에 그녀를 붙들던 남자의 손은 헐거워졌다.
“정말 가고 싶어?”
“…….”
질래도 은우와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은우의 불장난 같은 고백에 흔들릴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애로사항도 참 많았다.
제가 하필 강화그룹 장녀라는 것. TY 그룹 윤태윤의 약혼녀라는 것. 9살이나 어린 모델지망생, 그것도 모자라 한때는 남매였다는 리스크까지.
이게 누구를 위한 사랑인 걸까? 그 비수 같은 질문이 여자의 뇌리에 우레처럼 쏟아졌다.
“인생을 이런 도박에 허비하지 마. 나도 나지만 너도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두려워?”
“…….”
“아님, 무서워?”
“…….”
질래는 눈꺼풀을 지그시 아래로 내리깔았다. 가늘고 긴 눈매 끝에선 몽글몽글한 액체가 조금씩 그 부피를 키워갔다. 솔직히 제 자신이 뭘 진짜로 원하고 있는지조차 헷갈렸다.
저를 보호하던 남자의 손은 이미 맥없이 풀렸건만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은 것도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그저 남자의 이마가 가볍게 제 뒤통수에 닿았을 뿐인데, 질래의 몸이 하물하물 물러 터져 빠져나갈 의지를 상실했다.
그런데 여자의 망설임이 은우에겐 확신으로 다가왔다. 분명히 벗어날 기회를 줬지만 그녀는 또 제 안에 머물러 있었다.
“3개월 뒤라고 했지? 그럼 3개월 동안 나랑 연애하면 되겠네.”
“3개월 동안 너랑 물고 빨고 별짓 다 하다가, 다른 남자한테 가라고?”
은우가 돌아선 질래의 몸통을 제 쪽으로 원상복귀 시켰다. 행여나 작고 가녀린 몸이 허물어질까 봐 애지중지 소중하게 그녀의 몸을 터치했다. 사실 눈빛이 보고 싶었다. 지금. 둘 사이엔 거짓 없는 진심이 필요했으니까.
“많이 야해졌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또 자고 싶니? 처음도 가졌겠다. 보내기 전에 더 놀고 싶어?”
물론 은우가 그런 마음을 품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질래가 원하는 건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수많은 전제조건에도 흔들림 없는 남자의 마음이었다.
그런 확신을 주는 시그널이 백만 가지 있어도, 사실 될까 말까 한 사이니까.
그래서 질래는 은우의 매서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얼른 이불 속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미 질래의 시각에 은우는 형태를 잃어버린 투명한 실루엣에 불과했다. 그래서 도망친다는 게 고작 이불 속이라니. 아니, 사실은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걸 눈치챈 은우가 잠시나마 질래에게 그녀만의 시간을 허용했다. 들썩이는 이불을 바라보자니 은우의 마음도 축축해진 이불만큼이나 애통해졌다. 누군가를 향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은우에게는 도리어 낯선 경험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여자의 식어버린 마음을 데워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그녀만의 동굴 속으로 과감히 파고들었다. 이불을 걷어 낸 후 흔들리는 질래의 어깨를 제 팔로 감싸 안았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으로 바스스하게 엉킨 여자의 머리칼을 가지런히 쓸어줬다.
“가질래, 솔직히 그 결혼하기 싫지?”
여자는 말없이 울기만 했다. 질래와 헤어지기 싫어서 울고 있던 10살 꼬맹이, 그러니까 13년 전 자신의 비통한 얼굴이 질래한테 겹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질래도 눈물을 뚝 그치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의지 밖의 일이었다. 감정 컨트롤만큼은 능하다고 믿었건만, 스스로조차도 당혹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원치 않는 결혼. 뒤늦게 찾아온 가슴 뛰는 설렘. 그럼에도 어느 하나 제 맘대로 정할 수 없는 야박한 인생.
이게 남들이 부러워한다는 대한민국 상위 1%, 재벌가의 딸 가질래의 현주소였다.
32년간 지켜온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허망한 순간이었다.
그걸 모르고 살았던 것도 아닌데, 왜 이제 와 쌓였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왈칵 쏟아지는지.
“그러니까 석 달만, 석 달만 나랑 사귀어봐, 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양다리 치라고, 그 새끼랑, 나랑!”
“…뭐? 미쳤….”
“3개월 뒤에도 그 새끼다 싶음. 안 잡을 테니까.”
“…….”
은우 앞에서 창피하게 눈물이나 보이다니.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품에서 아이처럼 토닥임을 받고 있는 제 모습이 싫지 않았다. 이렇게 다 벗어젖힌 나신으로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는 게, 처음 느껴보는 포근함이었다.
사실, 질래의 인생에도 부모님에 대한 부재가 컸다. 친엄마에 대한 기억은 흐릿했고, 그나마 가장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사하라 여사한테서 배운 거라곤 밥그릇 싸움에서 ‘생존하는 법’과 ‘독기’. 이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로부터 뜨거운 부성애를 느껴본 적도 없었다.
오로지 강화그룹을 이끌어나갈 신(新)비밀병기처럼, 인생 대부분을 연단해 온 질래였다.
그런 제가 단 한 번도 의미를 둬 본 적도 없던 빨간 날, 크리스마스에 제 의지로 여자가 됐다니. 질래한테 이보다 더 큰 모험도 없었다.
그런 질래를 위해 은우는 이제 그녀를 어르듯 만지며 보이는 곳곳에 진한 애무를 퍼부었다. 사실 은우도 여자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서 그냥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할 뿐이었다.
문제는 그사이 질래의 허벅지 사이로 탐스럽게 솟아버린 기둥이었다. 뭐, 본능이니까.
은우는 일부러 제 분신을 외면한 채로 여자 달래기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울음을 그친 여자는 은우의 속도 모른 채 무심하게 쿡, 남자의 정곡을 찔렀다.
“…솔직히 또 하고 싶지?”
“…어.”
“어, 라고?”
“어. 맘 같아선 당장이라도 박고 싶지.”
“결국 또 하겠다는 거네?”
“아니, 가질래가 원치 않으면 안 건드려.”
“3개월이랬지? 그 기간 내내 거부하면? 그래도 사귈래?”
그 질문에 은우가 돌연 질래를 침대에 눕혔다. 여자는 너무 놀란 나머지 꺅!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꼿꼿이 차렷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러자 은우가 뭉뚝한 제 선단으로 여자의 두덩뼈 위, 흠뻑 젖은 치모를 쿠퍼액으로 문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거대하게 발기된 대물이 살금살금 그녀의 샅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야?”
“같이 있던 내내 한순간도 좆이 안 섰던 적은 없어. 그런데 내가 왜 참고 있을까?”
“그럼 깔끔하게 한 번 더 하고, 우리 사이 정리하던지.”
질래도 왜 제가 연애 조건으로 3개월간 섹스 금지 조항을 제시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남자가 제 몸을 탐하기 위해서 사귀는 게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런 사이 은우의 분신이 여자의 사타구니 사이를 쓰윽, 훑고 지나간다. 그렇지 않아도 애액과 핏물로 엉망이 된 음부건만. 은우는 결국 육욕을 선택하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