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같이 자자
“1억 올랐네요.”
“너 지금 장난해?”
민연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엄습했다. 그동안에도 질래의 협상은 폭주하는 열차처럼 멈추기를 거부했다.
“2억!”
“뭐 하는 거야? 무슨 그렇게….”
“…이제 4억이네요. 정말 이 남자 갖고 싶어요?”
“돈이 그렇게… 장난해?”
“6억이에요.”
“그만한 돈은 있고?”
도도하게 보이고픈 민연재의 거짓 당당함에 균열이 생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톱워치의 숫자만 주시하던 질래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10억, 끝!”
“야!”
장신의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이마를 잔뜩 구긴 채 질래를 무섭게 노려봤다.
“하루에 10억? 너무한 거 아냐?”
“하루? 잘못 아셨나 본데요 1시간이겠죠. 1시간에 10억! 그만한 돈 있으십니까?”
“누가 그 돈 주고….”
“어떻게 배워 먹었길래 사람을 사고판다는 소리가 나오지?”
“지금 돈으로 날 이겨보겠다는 거야?”
“아니요, 원래 사람은 돈 주고 사는 게 아니에요. 몰랐어요?”
질래가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제 명함 한 장을 뺀 후 민연재의 손에 정중히 쥐여 주었다.
삽시에 연재를 놀라게 한 건 아무나 들 수 없는 그 리미티드 에디션 명품백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화그룹 자율주행 팀장, 가질래 상무라는 이름, 그 석 자였다.
“가, 가질래?”
“제가, 충분히 이 차의 손실을 보상할 수 있는 사람인 건 확인 됐을 거 같고, 그래도 과실이 누구한테 있는지 명명백백하게 진위는 따져봐야겠죠? 조만간 사람 보내서 해결하겠습니다.”
“…….”
“그쪽 명함도 하나 주실래요? 유명하다는데 전 도통 누군지 모르겠어서.”
“…….”
“없으면 알아서 처리할게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내 차주가 그토록 애지중지 여기던 외제차로 다가가 앞 유리에 붙어 있는 번호를 질래가 제 휴대폰에 저장했다.
그사이 민연재는 한파에 휩쓸린 듯 모든 게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동시에 은우는 제 눈에 반짝이는 질래의 모습을 확실하게 새기고 있었다. 이지적인 외모며 정중한 말투. 도발적인 눈빛에 묘하게 뒤섞인 예의 바름. 이지러진 달빛에 반사된 하얀 눈보다도 더욱 영롱하게 빛나는 그녀의 모든 걸, 제 머리에, 제 심장에 고이고이 새겼다.
“가자, 질래야.”
남자는 질래의 손목을 닁큼 잡았다. 여자도 남자가 인도하는 곳으로 저도 모르게 동행하고 있었다. 마치 크리스마스이브에 원래 만나기로 했던 연인처럼. 마치 운명처럼.
그 모습을 연재는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뿐.
이 모든 상황을 출근길에 우연히 목격한 와인 바의 얼굴마담이자, 여자 회원들을 관리하는 일명 선수 휘진이 절망이 깃든 표정으로 서 있는 연재 곁으로 다가갔다.
“연재 씨 괜찮아요?”
“너, 아직도 나한테 관심 있니?”
“은우보단 제가 더 따뜻하게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연재와 휘진의 눈에도 은우와 질래는 한없이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
“어디 가니? 나 약속….”
“걸어 봤어?”
“안 걸어본 사람도 있니?”
“아니, 크리스마스이브에 눈 맞으면서, 길거리에서 말이야.”
“…….”
없었다. 단 한 번도. 이게 뭐라고, 지금 이 순간이 질래의 삶에 있어 가장 큰 모험이자, 일탈이었다.
“남자 손 잡고 걸어 본 적은 있고?”
“네가 남자야?”
순간 질래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남자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대신 따뜻한 기운이 질래 손바닥에 지그시 닿았다. 남자의 드넓은 손이 질래의 손과 합쳐진 것이다.
“가질래. 내가, 여자로 보여?”
“한 번 동생은 영원한… 어머!”
순시에 휘청휘청, 나부끼는 질래의 허리를 남자가 휘감아 끌어안았다. 어두운 밤마저 훤히 밝히는 은우의 몸에 제 가슴이 뭉개지자 심장이 쩡 하고 갈라지다 못해 빠르게 요동쳤다.
“조심해, 온통 빙판이라고.”
눈이 쌓였다 녹은 그 자리엔 아이스링크장처럼 빙판이 깔려 있었다. 연인들이 꼭 붙어 다니기 딱 좋은 크리스마스이브다운 얼음 카펫이었다.
이내 저를 따스하게 내려다보는 남자의 바짝 맞닿아 있는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괜찮겠어?”
“어, 걸을 수 있어. 놔 줘.”
“아니, 나랑 이렇게 손잡고 걷는 거. 괜찮냐고. 약혼했다며.”
“…오랜만에 동생 만난 게 죄는 아니잖아. 신경 쓸 거 없어.”
“3초당 1억짜리 동생? 손잡고, 껴안고, 키스하는?”
“…….”
질래는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애써 마른침을 넘겨 보려 했지만 숨 돌릴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남자였다.
“알아보자, 우리.”
“뭘 알아봐?”
“남매인지 아닌지.”
“뭔 소리야? 집에 가. 나 약속….”
지이이잉, 지이이잉.
때마침 질래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윤태윤이었다.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봐봐, 지금 너 때문에….”
하지만 울리는 휴대폰 화면을 명백한 증거로 제시했음에도 이미 가질래에게 흠뻑 빠져 있는 남자에게 통할 리 만무했다.
은우가 돌연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어디 가, 나 아까 그 호텔에….”
“아무도 없다.”
“뭐?”
“키스하게.”
“어? 안….”
‘돼’라는 말을 왜 또 잇지 못했을까? 혹 그날의 첫 키스가 너무도 달콤해서? 윤태윤은 그렇게 거부해 놓고?
인적이 드문 어둑한 골목길. 가로등 불마저 저 멀리 떨어진 이 낯선 곳에서 남자의 혀가 질래의 잇새를 가른 채 달큼한 꿀물을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건네주고 있었다.
함박눈에. 그의 타액에. 그녀의 체액에. 질래의 모든 것이 충분히 젖을 만큼.
잠시 동안 이성을 외면한 채 온전히 남자의 따스한 살덩이를 질래는 맛보고 말았다.
그래. 키스가 뭐. 그게 어때서. 어?
문제는 남자의 손이 어느새 질래의 코트 위, 정확히 가슴 쪽 옷 틈새로 슬금슬금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친 듯 부드럽게 여자를 리드하는…. 어린데, 어리지 않은 묘한 손길이었다.
이에 열릴 뻔한 코트 앞섶을 질래가 급히 손으로 제지했다.
“더는 안 돼!”
“안 될 거 같다면?”
“넘지 말라고, 선!”
“사과 잘 안 하는데, 미안.”
그때 남자가 제 품으로 확, 여자를 끼워 넣었다.
“자자. 질래야.”
“…….”
“같이 보내, 오늘.”
“…….”
침묵은 결코 완벽한 답변도, 온전한 의사결정의 표현도 아니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매를 일직선으로 굳게 문 질래가 드디어 고민하던 입술을 살며시 뗐다.
“착각하지 마. 아까는 네 체면 생각해서 그런 거니까.”
“불쌍해서?”
“가족….”
“아니잖아.”
어느새 은우의 한 손이 벽 한 면에 자리 잡더니, 그 안에 질래를 가둬버렸다. 들숨, 날숨이 느껴지는,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하고 비좁은 공간이었다.
질래는 더는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질식할 것만 같았다.
지이이이잉-.
그때 두 사람 사이로 흐르던 적막함과 어색함을 여자의 휴대폰이 깨주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질래가 은우를 응시했다.
“진짜 가 봐야겠다. 나 전화 좀….”
“가고 싶지 않은 눈빛인데?”
정확했다. 태윤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남자의 말에 질래의 속눈썹이 급격하게 바르르 흔들렸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무거운 입술을 달싹이는 그녀였다.
“일하던 중 아니었니?”
“아까 못 들었어? 이제 거기 안 가.”
은우와 대화 중에도 질래의 시선은 여전히 제 손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에 쏠려 있었다. 태윤에게 상처 줘놓고 은우와 이러고 있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서. 혹은 용서할 수 없어서.
굳은 입매를 애써 풀어냈다.
“각자 갈 길 가자. 연락처나 줘. 나중에 식사 한번 하자.”
“싫다면?”
“그럼, 그냥 가고. 억지로 붙들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말했는데? 못 간다고.”
“…왜?”
“안 보낼 거니까.”
뭐라고? 받아칠 말을 잊은 듯, 질래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 그대로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 사이 은우가 질래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아 제 재킷 주머니에 쏙 넣었다. 그리곤 고개를 꺾어 태연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뭐 하자는 거야? 이리 내.”
“하늘 좀 봐봐. 눈이 올라가고 있어.”
“무슨 헛소리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질래는 저도 모르게 은우와 똑같이 고개를 젖힌 후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의 어두운 밤하늘을 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녀의 시각에도 거세게 쏟아지는 눈발들이 하늘로 승천하고 있었다.
“정말 눈이 올라가네.”
질래가 하늘을 보고 있는 동안 은우의 시선은 이미 제 품에서 입꼬리를 양쪽으로 귀엽게 말아 올린 반짝이는 여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눈이 제 얼굴에 쌓이는 줄도 모르고 생전 처음 눈 구경하는 사람처럼 해맑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
“예쁘다.”
“…….”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듯이 홧홧한 기운이 훅 올라왔다. 그래서 은우가 저를 보고 한 말임을 알면서도 그 칭찬을 밤하늘에 돌려버린 질래였다.
“그러게. 눈 내리는 게 예뻐 보이긴 처음이야.”
“어릴 때도 눈 오는 거 좋아했잖아.”
내가 눈을 좋아했다고? 옛 기억을 갑자기 소환해 내는 이 남자에게 또 말려들까 봐 질래는 얼른 화제를 돌려버렸다.
“어머닌 잘 계시니?”
“돌아가셨는데, 역시 몰랐구나.”
답변한 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바람 따라 은우의 긴 속눈썹에 안착한 하얀 눈이, 왠지 스르르 녹아서 그의 눈매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뭐지? 원망? 서운함?
아까까지만 해도 설익은 살구처럼 상큼해 보이던 남자의 얼굴에 서서히 씁쓸함이 배어갔다.
멍든 살구처럼 쓴맛이 묻어나는 얼굴로 남자가 이번에는 여자의 귓가를 공략해 왔다.
“혼잔데….”
“…….”
“혼자이기 싫어서.”
“…….”
“나보다 더 쓸쓸한 여자랑 놀아주려고.”
“언제 놀아 달랬니?”
“쓸쓸한 건 맞나보네.”
“…….”
답변 대신 질래는 입술을 자잘하게 지분댈 뿐, 이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돌아보니 그날도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사하라 여사가 세 번째 부인으로 집안에 들어오면서 강제 이별을 맞이하게 된 누구보다 애틋했던 질래와 길래 남매. 엉엉 울면서 눈발을 가르며 뛰어오는 꼬맹이의 눈물이 애처로워서 사춘기 소녀였던 질래가 닦아줬던 기억이 새록새록 스쳐 지나갔다. 거센 눈발이 동생의 머리 위로 쌓여 젖지 않도록 잠시 동안 질래의 작은 손이 길래의 머리 위에 우산이 돼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꼬맹이가 제법 큰 남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의 빳빳했던 고개가 푹 꺾여, 질래의 머리통 위에 얹혀졌다. 순시에 날아오는 눈발이 그의 목덜미에 제멋대로 수놓더니 이내 투명한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질래가 젖지 않도록 남자가 제 몸으로 대신 눈발을 막아주고 있던 것이다.
“그거 알아?”
장신의 남자는 질래의 귓불을 집요하게 간지럽혔다. 나지막한 어조로 제 굵어진 음성을 그녀에게 전해왔다.
“13년 전부터 내 인생에 크리스마스 따윈 없었어. 가장 슬픈 날이었으니까.”
“은우야, 나도 그땐 어려서….”
“가질래랑 헤어지는 게, 악몽처럼 싫었어.”
뭉클뭉클, 가슴이 싸했다가 아렸다가. 두 사람 사이에 오랜 세월 풀지 못한 정체불명의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그 감정의 골에서 먼저 헤쳐 나온 건 이번에도 은우였다.
“이 정도면, 함께 놀 이유가 되나?”
질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책임져, 내 크리스마스 말이야.”
“…저기 은우야.”
“부탁 아니야, 협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