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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래요-5화 (5/84)

5화. 3초당 1억짜리

와인 때문인 걸까? 서서히 세상이 핑글핑글 도는 게 신체에서는 이미 경고등을 울리고 있었다.

질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숨결이 서서히 다가오는 게 눈을 감아도 그대로 느껴졌다.

어쩌지? 왜 이 순간에 또 다른 남자가 떠오르지? 미쳤구나, 가질래.

그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 닿기 직전, 질래가 저도 모르게 태윤의 얼굴을 밀어내고 말았다.

“잠시만요, 너무 긴장돼서 술 좀 더 마실게요.”

태윤의 입술이 한쪽으로 비틀린다. 잔뜩 겁먹은 질래의 얼굴이 귀엽기도 했지만 며칠 전 이은우라는 그 어린놈 앞에서 보였던 표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윤태윤과의 만남에 질래는 와인 대신 얼음이 담긴 냉수를 벌컥벌컥 삼키며 제정신을 찾아갔다. 그리곤 횡설수설, 자기도 모르겠는 말들만을 뱉어냈다.

“우리가 연인이긴 하지만, 장례식 끝나고 바로 이러는 건….”

콜록콜록, 갑자기 사레가 걸린 듯 질래가 뒷말도 못 이은 채 기침을 쏟아냈다. 태윤이 그런 질래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등을 쓸어주었다. 그리고 얼른 유리컵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 그녀의 입가를 축여주었다.

“고마워요.”

그의 손에 들린 물컵을 건네받은 질래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긴장감을 감추었다.

“솔직히 둘 다 처음도 아닌데, 오늘은 좀 더 어른다운 사랑을 해보면 어떨까 싶은데.”

뭐? 어른다운 사랑?

윤태윤의 손이 질래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어쩌지? 이대로 그와 첫 경험까지 하게 되는 건가. 생각해 보니 좀 억울하기도 했다. 실은 가질래 인생에 남자와의 경험이라고는 장례식장에서 은우와의 키스, 그게 전부였다. 아무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삶만 봐도 사랑이라면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일과 사랑에 빠졌던 질래에게 결혼은 그저 기업과 기업 간의 조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서서히 다가오는 저 남자의 입술이 더럽게 느껴지는 건 술에 취해서일까.

왜 저 얼굴이 은우였으면 싶은 건지, 질래는 제 마음을 알 까닭이 없었다.

안 되겠다. 도저히 그와 술김에라도 입술을 섞을 자신이 없었다. 쓴맛이 날 것만 같았다. 양치질을 수백 번 해도 신물이 올라 올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다음에.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요. 장례식 치르느라 심적으로 힘들었나 봐요.”

질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잔뜩 무드를 잡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태윤의 당황한 얼굴을 뒤로한 채 얼른 현관문으로 뛰어가 룸 밖으로 탈출했다. 와인 바 라운지를 가로지르며 잘만 뛰는 저를 보니 술 취했다는 건 핑계에 불과했나 보다.

하지만 기사를 돌려보낸 걸 깜빡하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때, 그녀의 귓가로 시끄러운 소음이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싸움이 난 듯싶어 저도 모르게 눈길이 그리로 향하고 말았다.

“야! 새파랗게 어린놈이 발렛 했음 말 다했지. 이거 어떻게 보상할 건데? 이게 얼마짜리 차인 줄 알고 이래?”

질래는 정말이지 무시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싸움 구경이 제 취미도 아니요, 남들 싸움에 오지랖 부릴 만큼 여유로운 기분도 아니었다. 남의 싸움에 휘말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친구는 자기가 한 게 아니라는데요.”

와인 바 매니저가 발렛 파킹하는 직원을 위해 대신 해명하는 듯 둘 사이를 적극적으로 중재하고 있었다.

“뭐라고요? 얘가 반성은 안 하고, 어디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아닌 걸 아니라고 하지, 그럼 두 눈 뜨고 뒤집어씁니까?”

어라? 이 낮은 톤의 목소리는, 뭔가 질래에게 작은 떨림을 주는 목소리였다.

“그냥 사과드려. VIP 손님인 거 몰라서 그래?”

“이분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스포츠 방송계의 여신으로 유명했던 민연재 아나운서님 아닙니까? 위자료도 준재벌급으로 챙기셨다더니, 참 구차하시네.”

“뭐? 지금 말 다 했어?”

와인 바 매니저가 그 발렛 파킹 아르바이트생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달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저 남자애, 보통내기가 아니다. 문제는 그 독한 놈이 질래 눈에 상당이 낯이 익다는 점이었다.

도리어 민연재란 여자가 질래의 눈에 더 생소하달까. 평소 스포츠에 관심 없던 탓에 그쪽 계통 아나운서를 알 리가 만무했다.

“아무래도 일 그만둘 때가 왔나 보네요. 제가 돈 없다고 불합리한 대우 받는 건 딱 질색이라.”

그래, 내가 아는 사람일 리가 없잖아, 쓸데없이 정의감을 불태울 필요는 없어.

그렇게 돌아서려던 순간.

찰싹! 여성이 자신보다 훤칠한 장신의 알바생의 뺨을 끝끝내 가격하고 말았다.

질래는 가끔 저도 모르게 화가 날 때가 있었다. 흔히 적당히 가진 놈들의 도가 지나친, 주제넘은 갑질. 이 상황을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자세히 보니 이건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주에게 뺨을 맞은 남자의 옆모습이 아는 사람과 흡사해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가길래?

그때였다.

전직 아나운서였다는 오만함이 화수분처럼 넘쳐흐르는 여자가 알바생에게 기막힌 제안을 걸어왔다.

“그래, 그럼 연말까지 내 애인해! 그럼 차 긁은 빚 없던 거로 해줄게.”

“와! 재벌 물었다 이혼했다더니 여기까지 추락했어요? 그 고상한 이미지는 어쩌시려고 저 같은 천한 것을 만나보려고 할까.”

“뭐? 그럼 도색할 돈 당장 내놓을 순 있고?”

와. 저 여자, 어디서 수작질이야. 기껏 어린 남자애에게 누명이나 씌우고 원한다는 게 몸이라니. 질래의 새하얀 주먹에 푸른 핏줄이 도도록해졌다.

알바생이 차주의 어이없는 제안에 고개를 젓자 그녀는 더 흥분해서 날뛰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질래는 주차장에 설치된 반사경을 통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결국 울려대는 휴대폰의 진동도 무시한 채 저벅저벅, 그들에게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럼, 저 생각할 시간 좀 주시죠. 딱 30초만.”

“뭐? 30초?”

알바생이 주차장에 설치된 볼록거울 너머를 잠시 흘깃거린 후, 키 170cm도 족히 넘어 보이는 민연재를 주시하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그런데?”

“저, 애인 만나기로 했는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애인? 너 애인이라고 그랬냐? 누가 영원히 사귀재?”

팔짱을 낀 민연재가 어깨를 들썩이며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 알바생에게 애인이 있다는 말이 순시에 질래의 가지런한 눈썹을 실그러뜨리고 말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 대책 없이 떨어지는 눈발 때문에 짜증이 나는 거라며, 질래가 애써 제 감정을 컨트롤하며 다가갔다.

“그 애인 정리해, 내가 훨씬 괜찮은 여자일 테니까.”

큰 키에 늘씬하게 잘빠진 몸매. 민연재는 비록 성형한 티가 많이 나긴 했지만 누가 봐도 미인형으로 외적으로 수려한 편이긴 했다. 차도 꽤나 고가의 외제차로 수도권 아파트 한 채 값 정도는 돼 보이니 재력이 있는 것도 확실했다.

하지만 이 가질래가 그녀를 모른다는 건, 제 급의 상류층은 아니란 증거였다.

“정말 제 애인 이길 자신 있어요?”

그사이 알바생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차주를 설득해 갔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여자를 만나길래 그래? 가길래. 너 진짜 많이 컸구나.

장례식장에서 저에게 키스했던 남자의 진심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생각에 서운함이 몰려오기도 잠시. 질래의 눈이 함박눈보다 동그래졌다.

“왜 이제 와. 얼마나 기다렸는데.”

“……?”

“춥지?”

분명 뒤돌아서서 말을 거는 남자는 저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순각에 질래는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차장에는 본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흰 눈만이 소복소복 쌓여가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가질래.”

“뭐?”

“내 탓 아니다. 분명, 누나가 제 발로 온 거야.”

잠시 질래의 머릿속 판단력에 버퍼링이 걸렸다.

“…응?”

원래도 검었던 세상이 흑백 처리된 채 순간 정지됐다. 가로등 빛을 조명 삼아 함박눈을 맞으며, 마치 겨울 패션지 화보처럼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는 한 남자.

며칠 전 질래의 입술을 범했던 그가, 그녀 앞으로 다가오더니 제 품에 질래를 꼭 넣은 채 따뜻한 입김을 질래의 얼어버린 정수리에 쏟아냈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읊조렸다.

“내 애인, 가질래.”

“…….”

“갖는다고, 내가.”

“무슨 소리야?”

“크리스마스 선물 같다. 안 그래?”

“…….”

파바바박- 팍!

동시에 질래 뒤에 서 있던 대형 트리의 점등식이 시작됐다. 화려한 네온 싸인, 대형 트리에서 발산하는 환한 불빛이 그의 얼굴을 형형색색 물들일 때쯤 은우의 입술이 질래의 이마에 온기를 전해줬다. 냉랭했던 가슴이 녹아내릴 만큼 강렬한 열기였다.

물론, 이걸 멀찌감치 떨어져 계속 지켜볼 만큼 민연재가 성격 좋은 사람은 못 됐지만. 그녀는 어느새 이들 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꼴값 떤다. 딱 봐도 연상이네?”

부드럽게 질래를 바라보던 은우의 루돌프 같던 눈빛이 돌연 사나운 맹수로 돌변했다.

“기다리고 있어.”

눈 때문에 이마에 달라붙은 여자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성스레 쓸어내린 후 은우가 고개를 돌려 장신의 여자를 쏘아봤다.

“만나면, 꼭 껴안기. 그게 우리 인사라서 잠시 실례했네요.”

“그 대단한 애인 분이 저분이셔?”

“그래서 얼만데요?”

내가, 길래 네 애인이라고? 진실을 왜곡한 남자의 말이 질래의 머릿속을 둔탁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어째서 이 어린 남자의 말을 부정하지도 못한 채 묵묵히 지지하고 있는 건지. 제 마음을 알 듯 말 듯 모르겠다.

그 사이, 질래보다 반 뼘 정도 커 보이는 민연재가 싸늘하게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우리 알아요?”

민연재가 질래를 보고 내린 결론이 그랬다. 뭔가 본 듯 만 듯한 알 수 없는 사이. 질래도 그녀의 질문에 뭐라고 답해줘야 할지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그때였다.

“넌 얼마 주고 샀니? 얘. 내가 두 배 쳐 줄게 팔아, 나한테.”

민연재의 기막힌 도발에 미간이 좁혀질 만큼 식겁한 질래였다.

“뭐? 팔아? 사람을?”

한 번도 제 또래가 질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한 걸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반말로. 하긴, 공식 미팅 자리 외에는 사람도 잘 만나지 않는 재미없고 메마른 삶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싶던 찰나.

“목적은 똑같으면서 어디서 고상한 척이야?”

질래에게 패만하게 달려드는 민연재를 가로막은 건 그녀보다 하늘에 더 가까이 닿아 있는 남자, 은우였다.

“차 긁은 건 내가 해결할게, 그냥 무시하고….”

“좋아요, 거래해요.”

순시에 뱉어진 질래의 단호한 답변에 은우의 동공이 어둠 속에서도 찬란할 만큼 파동을 일으켰다.

“얼만데? 이 곱상한 애, 얼마에 넘길 거냐고!”

민연재가 질래의 도발에 맞섰다. 날 선 두 여자의 팽팽한 신경전에 주차장에는 무거운 기압 차가 형성됐다.

범상치 않은 두 여자의 대화에서 가장 먼저 발을 뺀 건 와인 바의 매니저였다. 은우에게 눈빛으로 ‘이따 보자’는 무언의 메시지만 남긴 채 조용히 자리를 떠나버렸으니까.

그 사이 민연재에 대한 질래의 맞대응도 계속되고 있었다.

“금액 감당할 자신 있어요? 고민할 시간 30초 줄게요.”

“웬 30초?”

“뭐든 정확한 게 좋잖아요.”

질래가 휴대폰을 꺼내 스톱워치 애플리케이션을 클릭한 후 스타트 버튼 위에 제 검지를 갖다 댔다.

“3초당 1억, 그럼 시작합니다.”

“뭐? 3초당 1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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