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오늘은 제가 갖겠습니다
맹수 같던 은우의 눈망울이 길 잃은 강아지처럼 슬퍼졌다. 질래가 왜? 라는 물음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은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표정을 읽은 은우가 질래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진심을 전했다.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
질래는 여기서 무슨 말을 하는 게 정답일지 고민됐다. 얼마 만에 만난 동생인데 이대로 인연 끝이라고? 또다시 헤어져?
아쉽다. 아니, 이은우로 돌아온 길래가 보고 싶을 것만 같았다. 그럴 거면 왜 키스하고 난린데. 불시에 뒤숭숭해지는 마음이 거지 같았다.
고작 몇 분이 흘렀을 뿐인데. 가슴이 시리다니.
그 마음을 들킨 걸까?
일부러 재빨리 커튼을 걷고 나가려던 그때, 남자가 질래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내가 계속 좋아하면, 가질래 탄탄대로 무너질까 봐.”
“…….”
“그래서 그래.”
말도 안 되는 말이 희한하게 납득이 갔다. 그래서 그저 제 말만 하고 저 커튼 밖으로 혼자 나가버린 무심한 남자의 뒷모습을, 질래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떠난 뒤에도 그 모습이 잔상처럼 그려지는 게 이상해서 그 좁은 커튼 뒤의 공간에서 몇 분간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말 여자보다 머리 몇 개는 더 큰, 누가 봐도 돌아보게 만드는 모델 같은 저 남자가 내가 키우다시피 했던 그 아이, 가길래라니.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방금 전의 키스가 준 설렘이 뭔지 홀로 떠올리던 그때였다.
“언니 거기서 뭐 해? 방금 나간 남자 누구야? 아까 장미꽃 맞지? 왠지 낯익은데?”
“어? 그게….”
은우가 나간 자리에 커튼을 펄럭이며 열고 들어온 건 동생 줄래였다. 순간 ‘길래’가 왔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아니! 말하지 말자. 질래는 얼른 고개부터 절레절레 젓고 본다. 줄래는 어릴 때부터 길래한테 적대적이었던 기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추측하기로는 새엄마와 함께 온 길래가 마치 굴러들어온 돌처럼 제 막내 자리를 빼앗은 것만 같아서, 유독 질투가 많았던 줄래는 그가 싫었나 보다.
그렇게 질래가 시치미를 뚝 뗀 채 눈가에 맺힌 눈물을 얼른 훔쳐냈다.
“울었어? 왜? 슬퍼서 울었을 리도 없고. 사 여사, 나보다 더 싫어했잖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사람이 죽었는데 당연히 슬퍼야지.”
“또, 나만 못됐네. 하긴 언니는 행동도 감정도 매사가 답안지였지.”
조롱하듯 경멸을 담아 말하는 동생의 말에 뜨끔하면서도 질래는 차마 대놓고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난, 너처럼 솔직할 수 없는 위치니까.
차마 화내지도 못한 채 속으로만 동생에게 대답해 줬다. 질래는 줄래가 아무리 저에게 무례하게 굴어도 단 한 번도 혼낸 적이 없었다. 엄마를 일찍이 여읜 탓에 줄래를 동생 이상의 감정으로 돌봐왔고, 아버지는 매사에 민망할 정도로 장녀 질래만을 챙겨 왔다. 그가 평생에 걸쳐 줄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시했던 까닭에 질래는 줄래에게 아무리 잘해줘도 늘 죄짓는 기분이었다.
가족한테조차 솔직한 속내를 꺼내 놓지 못하는 게 바로, 대한민국 상위 1% 기업을 이을 차기 주자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태윤의 말대로 상주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야만 하는 거니까.
그런 언니의 복잡한 속내도 모른 채 줄래의 입방정은 계속되고 있었다.
“지나 알지? 곧 문상 올 거래. 나랑 몇 번 술자리 같이했었거든. 사 여사 후배이기도 하고.”
지나라니. 아이돌 출신으로 모델 겸 배우인 톱스타 지나를 말하는 걸까. 줄래의 일방적인 통보에 질래는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손님맞이도, 언론사와 보안 팀에게 이 정보를 흘려주는 것도 결국 질래의 몫이었으니까.
또 이 빈소가 얼마나 떠들썩해지려는 건지. 질래는 숨이 가빠져서 잠시 상주실에 있는 화장실로 이동했다.
이 답답한 현실에서 유일하게 일탈했던 시간. 은우와의 키스 장면이 떠오르는 듯 사정없이 뛰어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달랬다.
화장실 문을 닫은 후 거울을 보며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비비었다. 그러면서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기를 반복했다.
그 시각,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를 등에 업은 톱스타 지나가 사 여사의 빈소에 등장했다.
누가 스타 아니랄까 봐 수수한 차림에서도 빛이 나는 여자였다. 지나가 제 검은 구두를 벗은 후 장례식장 안으로 진입하려던 그 순간, 신발을 신고 퇴장하려는 은우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이은우, 여긴 웬일이야?”
“아! 저도 존경했던 사람 보러왔거든요.”
“사 여사 팬이었니?”
“그랬나?”
그렇게 무미건조한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은우는 장례식장 밖으로, 톱스타 지나는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 장면을 질래 대신 상주 자리를 자처한 태윤과 줄래가 유독 눈여겨 지켜봤을 뿐, 침울했던 장례식장은 장미보다 화사한 지나의 등장으로 때아닌 생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새빨간 장밋빛 인생, 사하라 여사가 장미 향과 함께 영원히 저문 지금.
질래는 자유다.
가식으로부터의 자유.
제 자식을 강화그룹에 꽂아 넣으려 했던 그 탐욕 덩어리 ‘사하라’라는 장애물로부터의 완벽한 자유.
그렇게 오랜만에 한남동 저택으로 돌아가는 차 안.
질래는 평소 직접 운전하고 다녔지만, 며칠 동안 밤낮없이 지낸 탓에 오랜만에 기사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귀가 중이었다.
창밖으로는 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거리를 온통 축제 분위기로 만들어버리는, 꼭 반갑지만은 않은 함박눈이었다.
그때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질래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평소 같으면 받지 않고 끊어버리고 싶은 전화였지만, 하염없이 울어대는 휴대폰을 웬일로 뚫어져라 쳐다보는 질래였다.
아마도 오늘만큼은 그 전화가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잠시라도 강화그룹 장녀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알코올에 흠뻑 취하고 싶은 밤이었다.
그 드넓은 한남동 저택에 홀로 누워 있다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두 얼굴이 질래를 괴롭힐 것만 같아서.
하나는 일그러진 흉측한 얼굴로 발견된 죽은 사하라 여사. 그리고 또 하나는 제 입술을 파고든….
휴… 아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놀자!
질래가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
기사를 돌려보낸 후, 일명 아지트로 불리는 청담동의 한 호텔의 고급 와인 바로 들어서는 길.
호텔 옆에 독채로 지어진 와인 바 건물은 VIP 회원이 아니라면 입장할 수 없는, 대한민국 상류층이나 유명인만이 애용할 수 있는 펜트하우스 형식의 파티 공간이었다.
“대형 트리가 꺼져 있네.”
주렁주렁 달려 있는 장식들이 무색할 만큼, 화사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제 빛을 못 내고 있는 트리가 못내 아쉽기도 잠시.
떨리는 마음을 안고 가게 안, VIP 회원들만 이용 가능한 라운지를 지나 친구들이 말해준 룸으로 향했다.
20대 이후로 처음 가보는 펜트하우스 룸이었다. 오랜만에 대학 동기 모임에 참석하려니 마음이 살짝 어색했다. 심호흡으로 두근대는 가슴을 달래보는데 당황스러운 건 이 타이밍에 왜 한 남자가 남기고 간 입술의 감촉이 또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질래는 저도 모르게 손끝으로 입술을 지그시 누른 후 그 자리를 훑어냈다. 은우와 재회했던 날 이후, 전에는 없던 이 행동이 반복되고 있었다.
사실 사하라 여사의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날 때까지, 아니 끝나고 나서도 질래는 종종 은우 생각이 났었다.
그래! 어쩌면 이대로 안 보는 게 더 나을지 몰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머릿속을 정리한 후 방문을 열었다.
뭐지? 왜 소파엔 윤태윤 혼자 앉아 있는 것일까.
생화와 촛불로 로맨틱하게 꾸며진 룸 안은 누가 봐도 프러포즈를 하려는 남자의 이벤트처럼 보였다.
하긴, 약혼 관계로 지낸 지도 거의 1년. 3개월 후면 그의 아내가 될 예정이긴 했다.
그럼에도 가끔 만나서 식사한 거 외에는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해본 적도 없었다.
스킨십? 아직까지 그와 손잡은 이력도 없었다.
선뜻 그의 곁으로 다가가는 게 겁이 났다.
태윤이 문가에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질래를 보곤 먼저 입술을 뗐다.
“크리스마스이브라서, 같이 보내고 싶었어요. 속여서 미안해요.”
하긴, 그가 불렀으면 질래가 거절할 게 분명했다. 솔직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불편했다. 재밌지도 않았고, 남들이 그렇게 탐내는 윤태윤이 저를 오매불망 바라보는 게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집안끼리 약속을 맺고 공식적인 애인으로 지낸 1년 동안, 태윤은 바쁜 와중에도 거의 매일 데이트를 신청해왔다. 그럼에도 질래는 일주일에 딱 한 번, 간단한 식사 자리를 함께하는 것 외에는 태윤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어차피 결혼하면 살 비비고 살 사이일 텐데 벌써부터 그에게 마음을 주고 싶지 않았다. 실은 그와의 연애에 시간 쓰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던 질래였다.
“아. 아니에요, 어쩐지 좀 이상하다 싶었어요. 연락 없던 친구가 갑자기 불러내서.”
“오늘 처음으로 둘이 술 한 잔 어때요? 한 번도 질래 씨랑 단둘이 마셔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장례 치르느라 수고했는데 오늘은 둘이 연인 놀이 좀 해봅시다.”
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질래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동생 줄래는 그를 어른미 넘치는 섹시한 남자라고 칭찬해 왔었다. 알고 보면 재벌계의 엄친아로 여러 여자가 탐냈던 스마트하고, 훌륭한 매너남이기도 했다.
주변 이야기로는 취향이 까다로워 여간 유혹하기 어려운 남자인 동시에 여자관계도 제법 깔끔하다고 했다. 다만 오래전부터 연인 사이로 지냈던 여자 한 명이 있다는 소문 정도만 들었을 뿐.
문제는 그런 남자가 질래 앞으로 다가와 소파까지 에스코트해주는 로맨틱한 상황에도 질래는 누군가와 그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왜, 하나도 안 설레지.
은우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설레는 감정을 모르는 연애고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전, 한 남자가 입술에 남기고 간 무자비한 키스에 반응했던 심장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저와 곧 결혼할 남자, 남들이 다 갖고 싶어 하는 남자와 이런 달달한 공간에서 단둘이 있음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으니, 질래도 미치겠다.
게다가 기껏 태윤과 소파에 마주 앉자마자 꺼낸다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되게 오래된 연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정리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제 앞에 세팅된 와인으로 찜찜했던 입 안을 헹궈냈다. 첫맛은 생각보다 달큼했다. 식사 대용으로 놓인 스테이크와 간단한 치즈 안주까지.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별말 없이 와인을 몇 모금 넘겼을 뿐인데 순간 알딸딸해지는 걸 보니 독주인 듯했다. 아무래도 태윤이 오늘 작정한 게 분명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런 성대한 펜트하우스에서 프러포즈 이벤트를 왜 준비했겠는가. 바보가 아닌 이상 남자가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 누구라도 눈치챌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장례식장에서 은우와의 키스를 들켜버린 까닭에 태윤이 어느 정도 마음에 품고 움직일 거란 예상 정도는 하고 있었다.
제가 아는 윤태윤은 제 것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기 싫어하는, 승부욕 강한 남자란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문, 믿었어요? 나는 질래 씨 말고 진심으로 좋아해 본 사람 없는데. 괜히 질투하는 것 같아서 기분 좋은데요?”
입가에 미소가 번진 태윤이 투명한 와인 잔을 들어 시원하게 한 모금 꿀꺽 넘겼다. 그의 목젖이 유독 출렁거렸다. 손을 쥐었다 피는 게 매우 긴장돼 보였다.
“태윤 씨는 경험 많아요?”
질래의 질문에 태윤이 의외라는 듯 눈매가 넓어졌다. 이내 목청을 가다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갔다.
“저는 질래 씨가 남자한테 아예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장례식장에서 좀 놀라긴 했어요.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기도 했고요.”
“뭐가 다행이라는 거죠?”
차라리 화를 내지. 윤태윤의 수가 읽히지 않아서 질래도 덩달아 긴장감이 몰려왔다.
“혹시라도 제가 처음일까 봐, 항상 조심스러웠거든요. 연애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어서.”
뭐야? 내 뒷조사까지 한 거야? 질래는 태윤의 말이 솔직히 불쾌했다. 사실 은우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질래의 첫 키스 상대가 될 뻔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그것이 첫 키스임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태윤과의 관계에서 저만 처음이란 게 억울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아닌데, 저 유학 갔을 때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 있었어요, 모르셨구나?”
물론 거짓말이었다.
“둘 다 어린 것도 아닌데 과거가 뭐 중요하겠어요. 그래서 오늘은 질래 씨랑 연애다운 연애 좀 해보고 싶은데.”
이제 가질래 나이 서른둘. 결혼을 기약한 남자와 혹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이상할 리 없는 성인이었다.
예상대로 마주 보고 있던 태윤이 질래가 앉아 있는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태윤과 이렇게 바짝 붙어 앉아보기는 처음이었다.
태윤은 질래 옆에 앉는 순간, 술기운을 빌렸음에도 온몸이 떨려 죽을 뻔했다.
가질래. 어릴 때부터 홀로 짝사랑해왔던 여자였다. 오죽하면 그녀와 닮은 사람과 잠시 사귀었을 만큼 태윤은 오랜 기간 가질래를 짝사랑해왔다.
절대로 마음을 주지 않는 여자. 그녀를 품기 위해 제가 어떠한 노력을 해왔는지 그녀는 알지 못하리라.
조심스레 여자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제길, 다른 새끼의 흔적이 보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그녀의 새하얀 피부에 하트모양이 새겨져있었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오늘은 어떻게든 약혼녀의 입술이라도 훔치고 싶은 심정에 태윤은 조심스레 분위기를 잡아갔다. 파르르 떨리는 질래의 볼에 제 손을 살포시 얹은 후 선포했다.
“오늘 그 입술, 제가 갖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