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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래요-3화 (3/84)

3화. 새겼다, 하트!

은우는 태윤이 제 눈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약 180cm쯤 돼 보였지만 모델 데뷔를 앞둔 은우보다는 역시나 작은 키였다. 은우의 키가 187cm 정도니 웬만한 남자는 다 그의 시선 밑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당연했다.

그 사이 태윤은 은우의 뒤에 숨겨진 상기된 여자의 얼굴을 설핏 확인하고 말았다. 순간, 펀치를 정면으로 맞은 듯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도도녀 가질래의 흐트러진 모습. 태윤에겐 최악의 그림이었다.

“어차피 높아서 제대로 때리지도 못할 주먹, 안 뻗은 게 덜 쪽팔렸을 거예요. 전 가질래 씨랑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서.”

나가 달라며 앞뒤로 손을 흔드는 은우를 보며 태윤의 이마에 꾸불꾸불 석 삼(三) 자가 기어가듯 그려졌다.

뭔데 저렇게 재수가 없지? 감히 TY 그룹 장남인 나, 윤태윤을 건드려?

그에게 연이어 어퍼컷을 맞은 듯한 치욕적인 패배에 태윤은 다리가 풀릴 뻔한 걸 겨우겨우 벽에 손을 짚어 버텨냈다.

“아직 어린 친구가 키 좀 크다고 뵈는 게 없나 본데, 나이 들면 진짜 높고 낮은 게 뭔지 확실히 알 거예요.”

어른답게 한 소리 해보지만, 제 여자를 두고 퇴장해야 하는 남자는 씁쓸했다. 차라리 오지 말았어야 할 장례식장. 그 은밀한 공간을 습격한 태윤이 은우와의 달갑지 않은 만남에 멘탈 붕괴를 경험할 동안,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들끓는 질래의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마치 그냥 넘어가 달라며 애원하는 듯했다. 그 바람을 외면할 수 없었던 태윤은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입술로 겨우겨우 일침을 가해본다.

“질래 씨도 제자리로 돌아오셔야죠. 상주니까. 있어야 할 자리로 오시죠.”

많은 말이 내포된 뼈아픈 한마디만 날린 후 태윤은 뒤돌아 상주 완장과 떨어뜨렸던 재킷을 챙겨 든 채 그대로 커튼을 닫고 나가버렸다. 그 와중에도 완장을 챙겨 든 태윤의 정신력이 대단하다 싶은 은우였다.

“잠깐만요 태윤 씨.”

당황한 질래가 나가려 들자, 이조차도 은우는 허락하지 않았다. 빠져나가려는 여자의 힘을 반동 삼아 용수철처럼 힘껏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질래는 이번엔 은우가 노리는 게 입술이 아님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분명한 건 여기서 멈춰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미쳤어? 왜 이래?”

나름 절박하게 은우의 귓가에 속삭였는데, 그게 오히려 그에게는 자극으로 쏟아졌나 보다.

“그래서, 애인 맞아?”

짝! 질래의 작은 손이 은우의 뺨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용서할 수가 없었다. 13년 전 동생에 대한 연민은 있었지만 지금의 무례함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리화될 수 없었다.

“확실하게 말해줄게, 결혼할 사이야. 그리고 너.”

질래가 옷깃을 여민 후 은우를 노려보았다.

“한 번만 더 내 몸에 함부로 손대면 신고할 거야.”

“사랑하는 건 아니라는 거네.”

“약혼자 몰라? 못 알아들어?”

그러자 은우가 특유의 퇴폐미를 그 좁은 공간에 빼곡하게 발산하기 시작했다. 나른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제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약혼자란 놈이 제 여자가 남의 품에 안겨 있는데, 보고도 그냥 가?”

“여기 기자들 쫙 깔렸어. 날 위해서 조용히 나갔겠지. 너야말로 이러는 목적이 뭐야?”

“…서운하다. 아까부터 보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못 알아들으니까, 억울해서라도 조금만 더 알아보고 가야겠다.”

“뭐?”

은우가 제 곁을 떠나려 발버둥 치는 여자의 옷고름을 망설임 없이 쭉 잡아당겼다. 그대로 상복의 앞섶이 홍해 갈라지듯 쩍 하니 벌어졌다. 그러자 속치마에 꽉 눌려 터질 듯한 탱글탱글한 가슴골이 남자 앞에 고스란히 드러나 버렸다.

“돌았구나?”

당황한 질래가 얼른 양손으로 제 가슴골을 가렸다.

“예나 지금이나 사이즈는 여전하네.”

“놔줘, 나갈 거야.”

“그 차림으로?”

“어쩌다 이렇게 됐니?”

“열 살 꼬맹이랑 스물세 살 사내랑 비교하는 게 억지 아닌가?”

질래에게 쪽팔린 건 차후 문제였다. 일부러 강단 있게 나가지 않으면 여기서 말릴 것만 같아서 일부러, 온몸의 떨림을 숨기고 냉철하게 그에게 한소리 한 후 나가려 했다. 하지만.

“앗! 안….”

‘돼’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남자가 질래를 뒤에서 꼭 껴안고 말았다. 기어코 속저고리도 풀어내는구나 싶던 그때, 여자를 제 안에서 빙글, 가볍게 돌려세웠다. 사실 겁만 주려 했지, 정말 질래를 범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저를 너무 몰아세우길래 오기가 생겼을 뿐, 은우에게 가질래는 무턱대고 오를 만큼 쉬운 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드높은 에베레스트의 정상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제가 이 여자에게 정말 남자가 되어 돌아왔음을 알려주고 싶었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그리던 사람이 제게 어떤 존재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은우는 속치마를 삐져나와 골짜기를 이룬 여자의 깊고 깊은 젖무덤에 제 코를 처박았다. 어느새 고개를 든 그의 입술이 또다시 질래의 입술을 침범했다. 뜨끈한 입술을 색색거리는 여자의 숨결과 맞물렸다.

“하지… 흐읍.”

저항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잇새를 타고 나와 묵직한 장례식장 공기와 뒤섞였다. 질래는 두 번째 키스마저 속절없이 당할 순 없었다. 그래서 남자의 드넓은 가슴을 있는 힘껏 밀쳤다.

그런데 은우가 밀어내는 저를 내려다보며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딱 한 번만. 한 번만이라고. 왜 그의 눈빛이 이렇게 숨이 막힐까. 그간 그의 소식을 모른 척하고 살아온 삶을 속죄하듯 꼭 들어주고만 싶은 이 마음은 뭘까.

어느새 남자의 타액이 뒤섞여 또 입안에 우물을 이뤘다. 질척이는 소리가 들릴 만큼 충분히 격렬했고 흥분감이 온천수처럼 펑펑 솟구치는 열정적인 입맞춤이었다. 문어 빨판처럼 착 달라붙은 두 개의 혀가 서로의 입안에 이지러져 구석구석을 탐험하더니 끝끝내 넘어서는 안 될 문턱까지 이를 정도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더한 것도 하고 싶게끔. 두 사람은 지금 욕망의 터널을 함께 지나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감아 조였던 은우의 손이 여자의 상복 저고리 안으로 슬금슬금 어릴 적 감추었던 욕망을 실현하듯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 안, 웁.”

쇄골 밑을 더듬는 남자의 손등 위로 다급히 여자의 손이 겹쳐졌지만, 그의 욕구를 저지하긴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속치마라는 견고한 방어벽이 가슴을 지켜내는 철벽 수비에 성공했지만 얇은 천 위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행위가 여자의 가슴에 고스란히 전달됐다. 길고 큰 남자의 손 안에서 차고 넘치는 여자의 살덩이가 쥐락펴락 잘도 빚어지고 있었다.

그 탓에 움찔거리던 여자의 입에서 목울음이 새고 말았다. 진심이든 아니든 대부분이 침울함을 유지 중인 장례식장 안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롤러코스터 같은 짜릿한 키스 때문에 흘러버린 신음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능욕할까 봐. 보들보들한 입술 사이로 샘솟는 단물을 주고받던 남자가 여자의 턱을 치켜 올려 좀 더 깊숙한 곳으로 제 것을 밀어 넣었다.

여자가 흘리는 신음마저 빨아들이려는 듯, 모든 촉감이 너무도 강렬해서 질래의 시각에 세상이 요지경으로 변해버렸다. 알 수 없는 묘한 찌릿함. 그래서 더 알 수 없이 제 안에 복받쳐 오르는 미묘한 감정들.

“언니! 질래 언니!”

밖에서 저를 찾는 동생 줄래의 목소리가 또 들려온다. 하지만 저를 찾는 동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은우가 여자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 귀 뒤쪽 은밀한 살점을 춥춥 빨아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찔한 자극에, 뜨거운 호흡에 질래의 심장은 이미 째깍째깍 시간이 다 된 다이너마이트처럼 펑, 폭발해 버렸다. 온몸이 산화되는 듯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5살 어린 꼬맹이가 뭣도 모르고 사춘기 소녀의 품에 안겨 볼을 비비던 그 애잔했던 장난과는 차원이 달랐다.

목덜미로 지분지분 기어와 귀밑을 앞니와 입술로 실컷 빨아낸 후 귓가를 자극하듯 속삭이는 어린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진짜 문제였다.

“새겼다. 하트.”

저 때문에 녹아버린 심장을 기어이 귀밑에 새겨버리다니.

질래는 자신이 미친 거라고 생각했다.

미치지 않고선 장례식장에서 9살 어린 연하남이 제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남기게 할 미친년은 없을 거라며, 거친 날숨을 숨기느라 질식할 뻔했다.

그것도 장미꽃 만개한 새엄마의 마지막 길, 일부러라도 슬퍼 죽겠어야 할 장례식장에서.

알다가도 모를 어린놈 때문에 생전 처음으로 온몸이 오소소 전율하는 듯한 오묘한 설렘을 경험해 버린 것이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눈물은 허용됐으나, 그 외의 샘이 솟아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사하라 여사가 그토록 추구했던 고결한 삶의 마지막 길을 장녀인 제가 음란한 마음으로 망쳐서는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잠시.

내가 왜? 라는 물음이 이내 질래의 마음을 죄어 온다.

야성미를 내뿜는 어린 사자의 밭은 호흡이 스치는 곳곳마다 살갗이 일어났다. 오돌토돌한 닭살을 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꿍꿍거리는 심장만이 무정하게 나대고 있었다.

그런 찰나에도 빈소를 비운 장녀를 찾는 애타는 목소리가 질래의 현실을 자각시켰다.

“질래 언니, 대체 어디 간 거야?”

“잠시 저 안에서 쉬는 것 같던데.”

“상주실 두고 굳이 저기서?”

“있다 나온다고 했어. 좀 쉬게 둬. 힘들어 보이더라.”

“어쩐지 아까 저기 오래 있는다 싶더니, 오빤 항상 질래 언니 편이지? 나도 힘든데.”

다른 남자와의 스킨십을 목격하고도 오히려 나서서 동생 줄래를 안심시키는 윤태윤. 그의 행동이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건지, 질래는 태윤의 본심조차 의심스러웠다.

질래 만큼이나 냉정하고 무심하기로 소문난 태윤이, 유독 저한테만 친절한 게 늘 의아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희고 고운 손가락 관절마저 섹시한 남자의 손이 질래의 흐트러진 검은 상복을 친절하게 여미어 주고 있었다.

“상주니까 가 봐야겠다. 그치?”

언제 그랬냐는 듯 한없이 자상해진 은우의 손길이 질래는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이 기묘한 재회의 끝이 보이자 가슴이 알짝지근한 게 이상했다.

“…뭐 하고 사니?”

“…궁금하긴 했어?”

낮은 그의 음성 하나하나가 고막을 타고 심장을 묘하게 진동시킬 동안, 그는 묵묵히 질래의 옷을 원상복구 시켜 놓았다.

솔직히 다시 상주로 돌아가려니 끔찍했다.

왜 제가 사하라 여사의 상까지 치러야 하는지조차 모르겠을 만큼 질래와 사 여사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이곳에서 낯선 남자와의 일탈보다 장미가 만발한 사 여사의 빈소를 지키는 게 질래에겐 더 고된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길로 가야만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슬픈 표정으로 커튼 밖으로 나가려던 그 순간.

“가질래.”

“…….”

“행복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왜지? 저 한 마디가 뭐라고 코끝이 시큰시큰하고 동공이 흐물흐물 투명하게 풀려갔다.

드디어 상주답게, 눈시울도 빨개졌다.

질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래야만 한때 가족이었던 이 어린 남자와의 교통정리가 끝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질래는 더더욱 쿨한 척해 본다.

“이길래든, 이은우든 찾아와! 밥 사줄게.”

이 말만 남긴 채 그와의 아쉬운 이별을 선언하던 그때. 질래의 손목이 남자의 강한 힘에 이끌려 그의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와락 갇혀버렸다.

“가야 돼. 나중에….”

“나중 같은 거 없어.”

“일단은 놔, 나중에 내가….”

“안 돼! 다시 마주치면 그땐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래서 오늘로 멈출 거야. 상대가 가질래니까.”

사람 숨도 못 쉬게 가슴 터지게 만들어 놓고, 알 수 없는 말만 나열하는 이 남자는 또 무슨 꿍꿍이인지, 질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무슨 소리야?”

“은혜 갚는 소리.”

“못 알아듣겠다면?”

“…울지 말란 소리.”

“…….”

“마음 아프니까.”

이런. 진짜로 힘들게 억지로 참고 있었는데, 왜 또 눈물이 뚝뚝, 그의 검은 재킷에 또렷한 검은 점들을 새겨가는 건지.

남자의 온기를 품은 손이 질래의 눈가를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그 손끝이 흡수되지도 않는 눈물을 잔뜩 머금을 때 즈음.

“내 맘 확인해 버렸으니까, 진짜 이별이다.”

“진짜 이별?”

“다신 나타나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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