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100화 (100/101)

100.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눈앞에 자신이 있었다.

사방에 색색의 리시안셔스가 활짝 핀 꽃밭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여인은 가을의 벌판을 닮

은 색의 머릿결이 흩날리고 있었다.

반달로 접힌 갈색의 눈에는 친애의 감정을 가득 담고 사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와 사샤의 두 손을 맞잡았다.

-   고마워요.

-   …….

-   고마워요, 살아줘서.

그녀는 끊임없이 사샤에게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   그리고 정말 고마워요, 다시 알렌을 사랑해줘서.

사샤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진짜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진짜 알렉산드라일지도 모른다고. 사샤는 눈앞의

여인을 보며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   당신이 진짜, 알렉산드라인가요?

사샤의 질문에 여인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두 사람 사이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인은 물끄러미 시선을 내리고 뭔가를 깊이 생각하

고는 다시 사샤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   나는 진짜 알렉산드라예요. 그리고 당신 역시도, 진짜 알렉산드라입니다.

-   아….

-   알렌이 몇 번이나 시간을 돌리면서, 우리가 잠시 나눠진 것뿐. 우리는 모두 진짜예요.

그녀의 말을 선뜻 이해하기 힘들면서도, 또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기도 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알렌의 능력을 재판정에서 직접 목격했고, 또 이렇게 자신을 눈앞에 두

고 있지 않은가.

-   나 역시 진짜라면, 우리는 어째서 이세계의 기억을 갖고 있는 건가요?

왜 나에게는 남들과 다른 기억이 있는 거지? 알렌이 나를 죽인 것은 밀레나가 건 저주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 의문만큼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   그건 나도 몰라요.

허무할 만큼 시원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사샤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   하지만 나 역시 모른다는 게, 당신이 가짜가 아니라는 증거 아닐까요?

-   …….

-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는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가짜라든지 저주에

씐 게 아닌걸요. 더 이상.

그녀가 사샤의 손을 붙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

-   나는 너무 약했어요. 저주에 마음을 지배당해서 나 스스로를 해쳐버렸어.

그녀는 사샤에게 들려주었다. 어째서 알렌에게 청혼을 받은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

이번 생과 똑같이 밀레나의 저주에 걸려, 꿈속에서 알렌에게 몇 번이나 죽임을 당했다고. 그

때마다 그가 뱉던 저주의 말과, 너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차가운 독설들이 점점 그녀의

마음을 산산조각 냈다고.

눈을 떴을 땐, 공포로부터 정신없이 도망쳐 뛰어든 곳이 물속이었다고…….

-   진짜로 죽음을 맞이해서야 모든 걸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었어요.

담담한 어조에서 오히려 짙은 슬픔이 느껴져 사샤는 먹먹한 가슴을 달래려 주먹을 쥐었다.

-   당신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요. 결국 알렌이 당신을 찾아냈잖아요. 그리

고 이건 내 덕이 아니에요. 마르가리타가 노력해줘서. 그리고 알렌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날 찾아준 거니까.

사샤의 말에 그녀는 다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웠다. 누가 누구랄 것 없이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어차피 둘은 하나니까.

-   이번의 당신은 꼭 알렌을 지켜줘요. 당신은 할 수 있어. 나도 행복해요. 다시 알렌을 만

났으니까.

-   약속할게요.

꼭 지킬게요, 사샤의 씩씩한 대답에 그녀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   나는 이제 갈 거예요. 그곳에는 알렌도 있고, 리타도 있어요. 난 정말 행복하니까. 당신

도 꼭 행복해야 해요.

-   ……고마워요.

사샤는 이제 만날 수 없을 자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한동안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초점 없던 동공에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차마 가다듬지 못한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거친 숨을 얼마나 몰아쉬었을까. 잇새에서 저도

모를 말이 새어 나왔다.

"이럴 수가…."

사샤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두 사람 다 개의치 않았다.

"알렌, 알렌……."

사샤는 여전히 꿈을 꾸는 사람처럼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응, 나예요."

"알렌……. 고마워요, 나 만나고 왔어요. 나를 만났어. 그녀에게 전부 들었어요. 당신이 날

위해서 얼마나 애써줬는지. 어떤 각오로 날 찾아줬던 건지."

사샤가 눈물을 닦고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알렌. 정말 고마워요."

그토록 바랐던 티 없이 해맑은 사샤의 웃는 얼굴이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정말 사랑해요."

방금 닦아낸 사샤의 눈가에서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건 기쁨의 눈물이니까.

가슴이 벅차올라 연인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마음껏 웃었다.

이 미소를 지키기 위해, 기적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없이 반복했던 노력을 드디어 보상받았다

.

알렌은 사샤를 더욱 깊이 끌어안고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위에 얼굴을 기대었다. 심장이

또 크게 뛰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자신이 사샤와 함께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알

렌은 빙긋 웃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당신이 만들어 준 이 엄청난 기적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사샤."

"네, 알렌."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면서도 아주 오랜 옛날에 겪었던 일처럼 아득해진, 달빛 아래에서

의 청혼을 다시 한번 속삭였다.

알렌의 품에 안겨있던 사샤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당신과 평생 함께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당신과 행복하고 싶습니다."

"……네."

사샤가 흐드러지게 웃었다.

꽃이 피었다. 네가 웃으니 세상의 모든 꽃이 그렇게 피어났다. 알렌의 푸른 눈에 울컥, 감

정이 어렸다가 다시 웃어냈다.

"이제 바쁘겠어요, 우리 사샤 양."

"그러게요. 아그네스 전하의 시녀로 한 달간 황성에 있기로 했고 가게도 더 신경 써야 하고

, 이번 달 말부터는 청귤을 수확할 수 있으니까 상품 개발도 해야 하고요."

사샤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세어가며 해야 할 일을 나열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알

렌이 덧붙였다.

"또 뭔가가 있지 않아요?"

"뭔데요?"

알렌이 말없이 웃자 사샤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식 준비도, 해야겠죠?"

"우선 할 일도 많고, 둘 다 바쁘겠지만. 내일 아침은 같이 아버지와 마르가리타 씨에게 다

녀올까요?"

"저도 그 생각을 하던 차였어요."

우리 앞날에는 기쁜 일만 있지는 않겠죠, 하지만 슬픈 일도 당신과 함께라면 기꺼이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아침이 있기에 밤이 있고, 태양이 지면 달이 뜨니까.

우리는 이렇듯 수많은 어려움을 딛고 마주 보고 있으니까.

이 첫걸음이 당신과 함께여서 얼마나 행복한지. 마지막 걸음까지 당신과 함께일 거라는 사실

이 날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두 손을 맞잡은 연인은 천천히 발 맞춰 걸어 나갔다.

Epilogue

나의 사랑하는 아기, 잘도 잔다, 엄마 품에서 편안히 잠들어라….

사샤가 칭얼거릴 때마다 마르가리타는 딸을 달래면서 막연히 기억에 남아 있던 자장가를 읊

조렸다. 칭얼거리며 잠투정을 하다가도 사샤는 엄마의 품에 안기면 귀신같이 쌔근쌔근 대며

다시 잠들고는 했다.

자신보다 소중한 존재에 대해 리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갑작스럽게 생긴 아비도 모르는 생명을 마주했을 때, 당혹감이 불쾌함으로 변하고, 종국에는

안쓰러움만 남았다.

숨기지 못할 만큼 불러버린 배를 만지면서 무미건조한 말투로 아이에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 같은 사람을 만나서 너도 참 불행하겠다. 라고.

산통이 극에 달했을 때 몇몇 동료 여인들의 도움으로 핏덩이의 작은 생명체를 안았다.

리타는 자신의 얼굴에 흐르던 것이 눈물인지 땀인지 분간할 수 없게 축축해진 몰골로 어색하

게 아이를 안았다.

이 자그마한 것을 내가 정말 낳았구나. 기절할 것 같은 고통과 스러지는 의식 속에서 막연하

게 그런 생각을 했다.

갓난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리타 주변의 여인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을 하거나 얼마 키우지 않고 다시는 만날 수 없

는 곳으로 보내곤 했다.

아이를 받아주었던 동료 중에 한 명도 조심스레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이 아는 고아원이 있다

고. 그곳에 가면 아이는 운이 좋으면 누군가의 자식으로 자랐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받기 힘든 삶을 살았다.

처음에는 리타도 흔들렸다. 이미 혼자서도 충분히 버거운 인생이었다. 아이를 갖고 난 이후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독한 마음을 먹고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꼭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마

냥 뚫어지게 어미를 바라보았다. 다 이해한다는 듯이.

결국 고아원 앞에 아이를 놓고 가기로 결심하고 포대에 잘 싸서 밖으로 나온 날, 줄곧 외면

하던 아이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을 때 깊고 커다란 갈색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추악하

게 흔들렸다.

내가 대체 이 어린것에게 무슨 짓을.

한순간 머리를 강타당하는 것 같은 충격이 지나가자 팔에 소름이 올라오며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렸다.

“미안해…….”

리타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리타가 다가오자 그때서야 울음

을 터트렸다. 리타 역시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아이를 다시 안아 올렸다.

“어, 엄마가 미안해….”

리타는 그제야 처음으로 아이에게 자신을 ‘엄마’라고 칭했다. 그간 리타는 아이를 바라보는

복잡 미묘한 눈빛 속에서 끊임없이 갈팡질팡했다. 이 아이의 무엇이 되어줄 수 있을까 하고.

하지만 지금까지의 고민이 무색할 만큼 아이를 다시 안은 리타에게 설명할 수 없이 선명한

감정이 깨어났다.

“너를 위해 살게.”

리타는 ‘엄마’가 자신을 알아주자 잠시 칭얼대던 울음을 그치고 꺄르르 웃는 아기를 안고 중

얼거렸다. 그것은 아기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그날, 리타는 자신을 꼭 닮은 눈을 가진 딸에게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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