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알렌 폰 에른스트 공작은 언제 도착하지.”
“곧 도착합니다. 영지에서 사건을 마무리하고 황성으로 오고 있습니다.”
에른스트 공작의 보좌관인 칼라일 에이든은 황제의 물음에 의연하게 대답했다. 재판정의 뒤
쪽에 있던 사샤는 안심한 듯 숨을 내쉬었다.
“알렌 폰 에른스트 공작이 들어옵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알렌은 뚜벅뚜벅 재판장 안을 걸어 들어왔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대질의 당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조그만 동요조차 느껴지지 않
았다.
사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알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알렌은
사샤의 앞을 지나갈 때 그녀와 눈을 맞추며 보일락 말락 아주 살짝 웃어 보였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영지의 일은 잘 마무리되었는가.”
황제는 환복조차 제대로 하고 오지 못한 알렌의 모습을 보자 더욱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네, 마수를 모두 처리했습니다. 시내가 파괴된 곳이 있어 인력을 동원해 복원이 진행될 겁
니다.”
“알겠다.”
황제는 평소보다 더욱 딱딱하게 대답했다. 이 상황에서 알렌에게 평소 같은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제부터 그를 심문하는 재판을 시작해야 하니까.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요한은 자리에 일어나 발언을 시작했다. 말투는 예의 바르고
정중했지만, 그 안에는 숨겨지지 않는 표독스러움이 도사렸다.
“에른스트의 영지에서 일어난 분란이 잘 마무리되었다니 몹시 기쁩니다. 하지만….”
기쁠 리가 있나, 거짓말도 뻔뻔히 하는군. 사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에른스트의 영지에만 비정상적인 마수의 출현이 일어난 걸까요?”
요한은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황제와 귀족들을 향하며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미 의문을 던져서 의심을 심고서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모습에서 알렌을 향한 그의
악의가 잘 느껴졌다.
“누군가가 에른스트를 모함에 빠뜨리려고? 물론 그 생각이 상식적이지요. 하지만 말이죠.”
그는 일부러 한 템포 쉰 다음 말을 이어갔다.
“보다 폭넓게 생각해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건 어떻습니까. 에른스트에서 은밀하게
관리하던 마수에게 문제가 일어난 건 아닐까, 하고요.”
“…그게 무슨 말이냐.”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동 제국에 있을 때 이미 에른스트 공작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
다. 마법사의 탑 소속 마법사들 중에 에른스트와 손을 잡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
기 때문입니다.”
에른스트가 관리하던 마수? 마법사의 탑? 요한의 진술은 하나하나 충격적이었기에 일동이 동
요를 감추지 못하고 술렁였다.
마탑은 언제나 중립에 서서 고고하게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고 자신들의 길을 고집하는 은
둔자들 아닌가. 그런데 그들이 에른스트와 결탁하고 뭔가를 꾸몄다고?
“아무 증거도 없이 이런 말을 하면 에른스트에 대한 모함밖에 되지 않겠지만….”
요한은 일부러 말끝을 길게 늘였다.
“이걸 아바마마와 재판정에 있는 여러분께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요한이 꺼낸 서신을 받은 황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분명한 알렌의 필체였다.
에른스트 공작가는 더 이상 황실에 충성하지 않는다. 마법도 능력도 누구보다 뛰어난 나는
더 높은 곳에 올라서겠다. 은밀하게 마수를 길들여서 황성을 엉망으로 만들고 서 제국 황제
의 암살할 것을 모의하는 내용이 적나라하게 쓰여 있었다.
“이성이 없는 마수와 이성을 갖고 있는 사람, 동시에 두 가지를 주무르기 위해 알렌은 금단
의 저주를 손에 넣었습니다. 오래전 멸족한 마녀의 비술이죠.”
요한은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알렌에게 모두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대담하기 그지없었지만 자신 있었다.
북쪽 에른스트의 영지에 보낸 살수들이 알렌을 해치우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그에
게는 아직 많은 패가 남아 있었다.
그중에 가장 든든한 것이 이 비술이었다.
알렌 폰 에른스트를 무너뜨리기 위해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요한은 아주 오래전부터 야심 있는 마탑의 무리들과 오늘이 오길 기다렸다.
더 높은 차원의 마법과 힘을 얻기를 원하던 그들의 끈기가 결국 봉인되어 있던 마녀의 비술
을 찾아내었을 때, 요한은 이 오랜 목표가 결국 달성되고 말리라 확신했다.
마법사의 탑에서는 이미 은밀히 요한의 계획이 진척되어 있었다.
걸리적거리던 마법사는 사고를 가장해 없애거나, ‘꿈의 비술’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
다. 능력이 쓸 만해서 없애기 아까운 인물은 정신을 개조해 자신들의 편에 세웠다.
이제 이 모든 걸 알렌과 그들의 편이 되지 않은 나머지 마법사들의 작당 모의였던 것으로 뒤
집어씌우면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마탑과 에른스트 공작가를 손아귀에 쥐게 된다.
우리의 결탁은 오랜 시간 동안 빛나는 미래가 되어 순조롭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눈이 빛났다.
“의심할 수 없는 알렌 폰 에른스트의 필체이자, 인장이다.”
황제의 앞에 놓인 서신을 읽은 중년의 공작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에른스트와 가까운
가문이었기에 알렌의 필체도, 에른스트의 인장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부가 다시 한 번 들썩이는데도 알렌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최악의 순간에도 그의 곧은 콧날과 날카로우면서 섬세한 이목구비의 어디에서도 위기의식은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알렌이 선명하게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재판
정을 가르며 모두의 이목을 집중하게 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아신 것 같군요.”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사샤는 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한 채 집중했다.
“저 편지를 쓴 사람이 저일 수 없다는 것을.”
“뭐, 라고?”
요한은 알렌이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뱉어낼 말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방금 그가 한 말에 대한 대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신이 조작된 것임을 황제가 읽자마자 알 것이라고? 내용의 어디에도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 그저 발칙하게 제국을 삼키려는 야망에 미친 공작의 모습이 그럴듯하게 그려질 뿐인데.
요한의 옅은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신의 내용에 제 아버지와 가문의 영달을 위해 황제가 되겠다는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어디가 어떻단….”
“레오폴드 폰 에른스트 선대 공작은 제 친아버지가 아닙니다.”
드디어 내 입으로 말하게 되는군, 알렌은 쓰게 웃었다.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황제와 알렌
두 사람만의 평생 비밀로 묻어놨을 사실이었다.
“전 황제 폐하의 여동생인 레오나 황녀의 아비 없는 자식으로 에른스트에 입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알렌은 황제의 조카였다는 건가?
요한의 얼굴이 차차 일그러졌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폐하께서, 이 편지의 주인을 저라고 믿으실 리 없죠. 그
구절을 읽자마자 이미 아셨을 겁니다. 오늘 재판은 누군가 절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일부러
만든 자리라는 것을요.”
누구 하나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살얼음판 같은 긴장이 이어지는 중에 알렌만이 당
당하게 말을 이어갔다.
“물론 누구일지는 안 봐도 명확합니다만.”
태연함을 가장하려고 해도 요한은 더 이상 당혹스러움으로 굳어진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여러분은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그러니 지금부터 제가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편지를 진짜 작성한 사람이 누군지.”
알렌이 낮은 음성으로 읊조리자, 형형한 푸른빛이 그를 감쌌다.
빛은 황제의 앞에 놓여 있던 편지로 향해 공중에 들어 올렸다. 공중에 떠오른 편지는 마치
시간이 되감기는 것처럼 잉크가 분해되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편지 위에 요한의 형체가 떠 있었다.
- 드디어 알렌 폰 에른스트의 파멸이 코앞에 다가왔군.
그는 깃펜을 들고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서신을 작성하고 있었다.
- 네 모든 것은 전부 내가 가져줄 테니까.
“이, 이게 대체 무슨.”
“저의 능력입니다. 저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사물에 깃든 시간을 이렇게, 재구성해
서 보여줄 수도 있죠. 이건 편지의 종이가 목격한 그 날의 진실입니다.”
황망한 듯 말을 잇지 못하는 황제의 앞에서 알렌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요한 황자가 에른스트의 영지에 마수와 함께 보낸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했을 때, 제
가 원래 갖고 있었던 이 능력이 각성했습니다.”
“그게 가능할 리 없지 않습니까, 아바마마! 전부 이 자의 거짓 자작극입니다!”
이성을 잃은 요한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쳤다.
검지로 알렌에게 삿대질을 하며 눈을 부릅뜬 요한은 열변을 토하며 알렌이 했던 말을 부정했
다.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시간을 돌릴 수 있던 마법사용자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마탑의 대현자
도 불가능했던 능력을 갑자기 이 남자가 각성했다니, 이 남자의 증언만으로 믿으십니까?”
요한의 발언 역시 숙고의 여지가 있었다. 알렌의 능력 발현은 너무나 갑작스럽다.
알렌의 능력이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환각을 보여주는 능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
었다.
물론 편지를 쓴 것이 알렌이 아닌 것은 명확하다. 그러나 알렌의 주장 외에는 다른 증거가
없기에 요한이 썼다고 곧바로 믿기도 어렵다.
어쩌면 알렌이 요한에게 앙갚음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황제로서는 제 아들과 조카,
전부 의심해야 하는 작금의 상황이 몹시 고통스러워 잇새로 한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재판정의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
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