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마르가리타.”
“네?”
“당신의 딸이 위험해. 사샤를 살리고 싶다면 에른스트 공작을 유혹해. 날짜는….”
“대체 무슨 말이야, 당신.”
알렌은 황당해하는 마르가리타를 향해 눈을 빛내며 으르렁대듯 말했다.
“다섯 살 때 잃은 아이를 또다시 잃을 생각인가?”
“…뭐라고?”
“시간이 없어. 내 말 잘 기억해.”
알렌의 말을 듣는 마르가리타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이내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
를 끄덕이고, 다급하게 어딘가로 뛰어갔다.
그리고 마르가리타가 말했던 대로, 얼마나 실패했는지 셀 수 없던 회귀 동안 벌어진 적 없는
일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첫 만남이 바뀌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며 알렌은 드디어 해냈다는 듯 후련한 표정으로 옅은 미소를 그렸다.
에른스트의 저택에서 결혼을 앞둔 공작과 마르가리타의 소개를 위해 동석한 두 사람은 불편
하고 어색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던 사샤가 어렵게 입을 열어 알렌에게 말을 걸자 그가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 뭐야.
- 저, 알렉산드라라고 합니다….
아아, 다행이다 사샤.
난 너를 미워하고, 넌 나를 불편해하는 첫 만남이 드디어 만들어졌어.
이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그날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지? 그러니 이대로 계속 나에게
거리를 둬줘.
난 틀렸어, 난 또다시 널 사랑하게 된 것 같아, 바보같이.
너라도 날 받아주지 말고….
아니,
아니야.
사실은 아니야.
다시 날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저주 같은 것에, 지지 말고 씩씩하게, 강하게.
……다시 한 번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쿨럭, 기침과 함께 쏟아낸 피가 손바닥을 흠뻑 적셔도 알렌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아, 이제 정말 끝인가. 마나와 생명력이 다 한 것이 느껴진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구나.
사샤, 이게 맞는 걸까?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했어. 아니, 사실은 부족해. 더 할 수 있었는데. 당신을 위해 더 노
력하고 싶었는데.
이제, 네가 보이는 것 같아.
- 알렌.
위가 어둑해지고 점멸해가는 적막 속에 멀리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결이 굽이치듯 찰랑
이는 밀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너무나 그리워하던 그녀가 멀리서부터 알렌에게 다가오고 있
었다.
알렌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시야가 흐릿해져도 마음껏 웃었다. 간절히
바라던 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여전히 처음 보던 그날처럼 너의 미소는 정말, 나를.
* * *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영원보다 길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을 때, 알렌은 더 이상 봉인석에 마력을 눌려 목숨이
위태롭던 그가 아니었다.
다시 눈앞의 남자들에게 시선을 던진 알렌의 단정한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을 생각하니 두려워서 눈물이 흐르나 보네?”
“이래서 이름만 그럴듯한 샌님이란…. 잘 가라고 젊은 공작.”
알렌은 굳게 닫혀있던 메마른 입술을 열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되뇌었다.
오른손에서 눈이 부시도록 푸른빛이 발산하자 알렌 앞을 막고 있는 남자들은 눈이 멀 것 같
은 빛에 전부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니, 마법을 어떻게 쓰는 거야!”
“분명히 봉인석으로 막았는….”
마법사는 당황해서 자신이 들고 있는 봉인석을 바라보았다. 이미 봉인석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을 증명하듯 제빛을 잃어 있었다.
“아무리 주물럭대봐야 그건 이제 그냥 구슬일 뿐이야. 봉인마법이 각인되기 전으로 되돌렸거
든.”
알렌은 완전히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새파란 눈동자를 가느다랗게 뜨며 눈앞의 남자들을 비
웃었다.
“감히 내 영지에서, 나의 영지민들을 괴롭게 한 벌은 달게 받아야겠지?”
* * *
에른스트에서 알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샤 옆에는 나넬이 있어 주었다. 안나와 코발레프
도. 가게를 꼭 부탁한다는 사샤의 간곡한 애원에 에른스트에 출퇴근하며 가게를 열어주고 있
었다.
모두에게 폐를 끼치는 걸 알면서도 사샤는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알렌이 무사히 돌아오길 손 모아 기다리고 있는 것 말고
는.
겨울의 끝에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칼라일이 사샤의 방문을 노크했
다.
“수상한 사람이 당신을 찾아왔습니다만, 당신을 만나지 않으면 절대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고 있군요. 우선 사람을 해칠 만한 무기는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로비에서 잠깐 얼굴
이라도 확인하시겠습니까? 행색을 보아하니 집시 여인 같습니다.”
“…뭐라고요?”
사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넬이 놀라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녀를 향했다.
“당장 만나야겠어요.”
여인은 로비에서 사샤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숨을 몰아쉴 만큼 급히 달려온 사샤에게 여인
이 고개를 돌렸다.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왔어요.”
겨울비에 완전히 젖은 로브 아래에서 집시 여인은 보랏빛 입술을 열었다.
장미의 월요일에 축제에서 사샤의 점을 봐주었던 그 여인이었다. 그뿐 아니라, 지하 감옥에
서 그녀를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줬던.
그렇게나 찾으려고 애썼던 그 여인이 사샤의 앞에 서 있었다.
“……두 사람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겠어요.”
칼라일의 얼굴에 잠시 걱정스러운 빛이 스쳤지만 단호한 사샤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입을 다
물었다. 그는 작은 응접실에 두 사람을 안내했다.
“사샤.”
벽난로에서 모닥불이 타오르는 작은 공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을 때, 여인은 금방 부드러운
눈빛으로 변했다.
그녀가 사샤의 이름을 부르자, 그 목소리와 시선이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한지 사샤는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녹아내릴 것 같았다.
외롭고 힘들어졌을 때마다 몸부림치도록 그리웠던 바로 그….
사샤의 입이 덜덜 떨렸다.
낯선 목소리인데, 어째서인지 사샤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리타?”
“응, 사샤…. 내 아가.”
사샤는 떨리는 양손으로 여인의 손을 꼭 잡았다.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어찌나 억세게 붙
들었는지 아플 정도였지만 여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웃어 보였다.
“엄마, 엄마…….”
어찌나 덜덜 떨리는지 사샤는 마치 억지로 비튼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다시는 못 부를 줄 알았던 상대를 되뇌었다.
리타는 몸을 당겨 사샤를 끌어안았다. 사샤는 행여 밖에 소리가 빠져나갈세라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리타의 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떨어트렸다.
리타는 사샤의 숱 많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언제나 그래 주었던 것처럼.
“네게 꼭 할 얘기가 있어. 그걸 위해서 이 몸을 빌려서 온 거야.”
“……어떻게 그게 가능해?”
눈물로 엉망이 된 사샤의 눈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어째서 다른 이의 몸에 깃드는 걸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할 수 있는 거지? 리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잖아. 나처럼. ……나처럼?
“엄마는, 누구야?”
사샤의 낯빛에 혼란스러움이 덧씌워졌다. 리타 역시 오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다시 물끄러미 미소를 그렸다.
“이 몸의 주인은.”
리타는 그녀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닫혀있던 보랏빛 입술이 움직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잠시 몸을 빌린 이 여인은 멸족했다고 전해지는 마녀의 후손이야.”
“마녀…….”
“그리고.”
리타는 엉망으로 흘러내린 사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어리
광을 부리듯 그 손길에 머리를 기댔다.
“나도, 그리고 내 딸인 너 역시.”
“….”
“사샤,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해. 그동안 내가 했던 일은 모두 너를 구하기 위해서 한 것이
었단다. 에른스트 공작과 재혼한 것도 말이야.”
리타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우고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마차 사고는 정말로 우연이었지만.”
“그럼 혹시…. 사고 빼고는 전부 리타의 계획이었던 거야?”
레오폴드 공작과 만난 것도, 그와 연애하고 결혼하게 된 것도 모두 평민인 모녀에게 찾아온
기적 같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
리타는 아무 말 없이 웃었지만, 사샤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언의 긍정임을 알았다.
리타는 사샤의 두 손을 꽉 잡고 눈을 맞췄다. 이목구비도, 목소리도 그 무엇도 원래의 마르
가리타가 아니었지만 눈빛만큼은 분명 그녀였다.
“사샤, 네게 말해 줄 다른 이야기도 있단다. 네가 수없이 죽었던 과거는 진짜가 아니야. 끔
찍한 꿈을 현실이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저주에 걸렸던 거였어.”
사샤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리타가 사라지고 나서 일어난 일인데.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 몸을 빌려서야 알게 되었어, 이 몸의 주인이 나에게 알려줬어. 우리 일족이 남긴 비술
중에 그런 것이 있다더구나. 대상자를 가장 괴롭게 만들 수 있는 꿈을 반복해서 꾸게 하고,
그게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저주가 있다고 했어. 그 비술이 널 해치려는 사람의 손
에 들어갔고….”
네가 그 저주로 인해 몇 번이나 죽었다는 걸 정말 몰랐어. 알았다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에른스트 소공작은 단 한 번도 널 죽이지 않았어. 전부…. 요한 황자와 밀레나 황녀의 음모
였어.”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저주?
요한이 나에게 몇 번이나 회귀했다고 한 게,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게 사실 나를 그렇게 만
든 범인이 밀레나와 요한이었기 때문이라고.
이 모든 게 저주 탓이었다고….
머릿속이 마구 뒤섞여 고통스러워하는 사샤의 볼에 갑작스러운 따뜻함이 느껴졌다. 리타가
어느새 그녀의 뺨에 한 손을 가져다 대더니 쪽, 입을 맞추어 주었다.
“사샤, 혼란스럽겠지만 에른스트 소공작을, 알렌만큼은 믿어줘. 그 사람은 널 지키기 위해
뭐든지 해왔고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엄마.”
리타는 여전히 알렌을 에른스트 소공작이라고 불렀다. 호칭에서 그녀의 부재가 여실히 느껴
지자 사샤는 가슴이 찌를 듯이 아파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리타의 눈빛과 어조에는 조금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리타는 사샤를 한 번 더 끌어안으
며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샤.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너한테 해 줘야 할 얘기를 해 줄 수 있
었던 것도. 하지만 이제 이 몸을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시간이야…….”
반드시 전해야 할 이야기를 전달한 그녀의 얼굴은 한결 개운해져 있었다. 이별의 아쉬움이
크지만, 결국 자신의 아이를 지켜냈다는 그런 뿌듯함이 드러났다.
리타는 문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곧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 이제 다시는……. 못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