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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94화 (94/101)

94.

“이제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 거예요.”

“….”

“어떤 것도 절대로 숨기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진실한 얼굴로 말하면 화내지도 못하잖아요.

“당신과의 결혼은 황실에도 허락받았습니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얼굴로, 행복함을 숨기지 않고 말하면. 나는….

“그러니, 에른스트 공작부인이 되어 주시겠어요?”

“알렌….”

사샤는 쑥스럽게 웃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잠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결심한 듯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해요.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저

당신 옆에 있고 싶으니까….”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지 사샤는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었다.

“나를 당신의 신부로 삼아주세요.”

알렌은 가슴이 벅차 사샤를 끌어안았다. 그녀를 품 안에 안은 알렌은 사샤의 귓가에 계속해

서 고맙다는 말을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한동안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내던 사샤는 밤이 깊어지자 집에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냈다.

“여기서 자도 될 텐데.”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았어요, 엄마도 그렇고요. 게다가.”

사샤는 아쉬워하며 붙잡는 알렌을 향해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마음의 준비가 조금 필요해요.”

“알겠어요.”

알렌은 푸른 눈을 둥그렇게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내일 당신을 데리러 가겠습니다.”

“네, 내일 빨리 데리러 와줘요!”

“약속합니다.”

알렌은 사샤의 앞머리를 살짝 걷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샤는 알렌 품에 안겨 세상에서 가

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당신의 아내가 되는 건가요.”

“네, 알렉산드라 폰 에른스트가 됩니다.”

“말도 안 돼….”

사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양손으로 뺨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앞으로 평생, 당신에게 이보다 더 큰 행복을 드린다고 약속하겠습니다.”

“흑….”

사샤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였다. 새하얗게 뜬 커다란 달빛을 한 몸에 받는 듯이 그녀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알렌이 사샤의 입에 입을 맞추자, 사샤의 물기 어린 눈이 감기며 긴 속눈썹을 따라 눈물이

한 방울,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럼 내일 데리러 오겠습니다.”

“네, 알렌, 내일 만나요.”

“들어가 볼게요.”

리타가 에스코트를 받으며 먼저 마차에 올라가고, 사샤가 마차에 타기 전이었다. 알렌은 사

샤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품에 넣으며 다시 한 번 포옹했다.

“잘 자요. 좋은 꿈 꿔요.”

“당신도 너무 많이 일하지 말고 빨리 자요.”

그래야 일찍 데리러 오지, 사샤는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알렌의 양손을 잡았다.

“내일 만나요.”

그 내일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임을. 너와의 그날이 영원히 나에게 남았다는 것을, 그때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알렌은 수백 수천 번을 후회했다.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그녀와 함께 잠들어야 했는데.

그녀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 * *

“사샤가, 당신에게 갔나요?”

아침 일찍 알렌은 그녀의 집으로 향했을 때,

마르가리타가 엉망이 된 몰골로 알렌을 붙잡았다. 맨발로 뛰쳐나온 그녀는 눈에 보일 만큼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샤가, 사샤가 보이지 않아…. 그 아이의 영혼이.”

느껴지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마르가리타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작가의 기사들이 전부 온 수도를 뒤지며 사샤를 찾으러 다녔다. 사샤는 몇 시간이 지나서

야 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사는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강의 하구에서 발견된 그녀는 이미 차가운 시신이 되어

있었다.

“안 돼…, 안 돼, 내 아가…….”

마르가리타는 사샤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며 몸부림쳤다. 비통한 어미의 울음이 사방에 울

려 퍼졌다.

“아악 안 돼!!”

사샤의 얼굴은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듯 편안해 보였다.

“사샤….”

사샤. 알렌은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중얼거렸다.

“눈을 떠요.”

비틀, 비틀 사샤 앞으로 걸어온 알렌이 그녀의 앞에 주저앉았다.

“일찍, 데리러 오라고….”

알렌은 말문이 막힌 채 덜덜 떠는 두 손을 그녀의 얼굴에 가져갔다. 이미 싸늘해진 뺨을 어

루만지며 애원했다.

“일어나, 사샤, 제발…. 눈을 떠….”

알렌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흐느낌이 낮은 오열로 변하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알렌은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다가가 마지막이 될 입맞춤을 했다. 얼음장 같은 그녀의 입술

에는 예전의 온기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잠시 대고 있던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든 알렌은 입안을 세게 깨물었다. 그의 입술 아래로 붉

은 피가 한두 방울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서 제국의 사교계는 에른스트 공작가의 이야기로 들썩였다.

에른스트의 젊은 공작이 평민 여자와 결혼을 약속하고 얼마 되지 않아 여자가 시신으로 발견

되었다.

결혼을 약속한 다음 날 죽은 것은 원래 연인이 있어서라느니, 사실 아이가 있어서였다느니,

전에 만나던 남자가 앙심을 품고 죽였다느니 따위의 너절한 소문들이 흥밋거리로 소모되었다

.

알렌은 그 소문을 들을 수 없었다. 만일 그에게 그런 이야기가 들렸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원지를 찾아내어 그를 찢어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알렌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공작가의 일은 칼라일에게 맡긴 채 그는 마탑에 틀어박

혔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법을 연구하면 시간을 돌릴 수 있다. 지금은 불가능할지라도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미친 사람처럼 마법 연구에만

몰두했다.

“알렌….”

막시밀리안만이 불러도 대답 없는 알렌의 뒤에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벌써 며칠째 끼니를 걸렀는지 알렌의 볼은 해쓱하게 패어있었다.

“그러다 너까지 죽겠어. 죽고 싶은 거야?”

“….”

“그 사람을 어떻게든 되살리고 싶다며, 그러려고 이러고 있잖아. 살아야지.”

처음에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내 친구가 완전히 미쳐버린 거라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의 연구에 조금이지만 진척이 보였다. 불가능에 가까운

난이도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갔을 뿐인데도.

어쩌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생각할 때쯤 점점 알렌은 망가져 가고 있었다.

이러다 연구가 성공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절명할 것 같았다.

그제야 알렌은 천천히 뒤를 돌아 막시밀리안과 눈을 맞췄다.

알렌의 아름다웠던 푸른색의 눈동자 주변은 이미 혈관이 다 터져 충혈되었고, 눈가가 새카맣

게 물들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 결혼을 앞둔 행복한 남자의 얼굴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사람 꼴이라

고 볼 수 없을 처참한 지경이었다.

극의에 도달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셀 수 없는 실패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알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내고,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에야 간신히 도달

할 수 있었다.

마침내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기쁨의 눈물조차 흐르지 않을 만큼

메말라 있었다.

사샤, 이제 너를 되찾을 수 있어.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어.

시간은 단 1분, 과거의 자신에게 돌아가서 경고하는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죽게 내

버려 두지 말라고.

* * *

낮달이 이지러지지 않고 불길하게 빛을 내던 날이었다.

“당신은…….”

알렌은 자신을 찾아온 눈앞의 여인이 누구인지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사샤의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밝은 금발이 탐스럽게 찰랑이던 모습이 거짓말인 듯 푸석하고

쇠약해진 모습으로 나타나 알렌을 향해 중얼거렸다.

“사샤를, 사샤를 구하는 건 어떻게 되고 있어요.”

“…이미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기껏해야 1분이었다.

알렌은 과거의 자신을 몇 번이나 만났지만 1분으로는 어떤 것도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사샤를 구하라고 외쳤지만, 헛수고였다. 알렌은 다시 사샤를 만났고, 똑같은 방법

으로 또 그녀를 잃어야 했다.

그래서 다음은 아예 갈색 머리의 여인과 엮이지 말라고,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

지만, 그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어떤 방법을 써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다시 사샤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말아요.”

“….”

“자꾸, 그래서, 그녀가….”

“…….”

“사, 사샤가 그렇게 된 날로 돌아가려고도 해봤어.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날만큼은 갈 수가

없어.”

빌어먹을, 알렌은 욕설을 뇌까리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멍한 눈으로 그의 얘기를 듣기만

하던 마르가리타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알렌의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나에게, 나에게 말해 줘요. 나를 찾아가.”

“당신을?”

“두 사람이 만나기 전에 먼저 증오부터 생기게, 내가 당신의 아버지를 유혹할 테니까.”

“무슨 말을….”

“당신의 아버지, 공작께서 시한부였다고 했죠.”

마르가리타는 당황한 알렌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시한부인 아버지가 갑자기 술집 작부와 결혼한다고 하면 당신은 어떨 것 같아?”

그녀의 눈에서 어느새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주, 우리 모녀를 미워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마르가리타는 알렌에게 시간을 돌려서 자신을 만났을 때 반드시 해야 할 말을 알려줬

다.

이 말이면, 무조건 당신의 말을 따를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알렌은 결심한 듯 오른손을 열어 봉인했던 마력을 열었다. 처음 회귀를 했을 때보다 훨씬 불

안정하고 희미해진 푸른빛이 불길하게 흔들거렸다.

알렌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던 의심이 곧 확신이 되었다.

이번이 마지막 회귀이다. 처음부터 생명력을 소진해서 시간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

었다. 이 몸은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

이번에 회귀를 하면 그대로 나는 끝날지 모른다. 그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난 네가 없는 세상이 이제 더욱 두려워졌어,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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