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리자, 사샤의 등 뒤에 알렌이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붙잡고 있
었다.
“당신이 없어서, 마스터에게 물어봤어요.”
헉헉, 가쁜 숨을 내뱉으며 알렌이 말을 이었다.
“알려주지 않으려고 해서…. 그래서 나도 모르게 뛰어나와서 당신을….”
사샤는 그저 굳은 채로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어색
한 표정과 길게 이어지는 침묵에 알렌은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무작정 그녀가 없어서 뛰쳐나왔다. 정신없이 골목을 뛰어다니며 그녀의 흔적을 찾았다. 달빛
을 받아 흔들리는 뒷모습이 보였을 때 알렌의 심장박동이 한층 더 커지더니 이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차분해야 한다는 이성과 반대로 입은 이미 그녀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당신께 부담이 된 모양이군요.”
사샤의 당황한 표정과 뻣뻣하게 굳은 동작에서 그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눠보진 않았지만 어쩌면 이미 연인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었을까. 저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라면 그녀를 아껴
줄 사람이 없는 게 더 이상하잖아.
알렌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따라온 자신을 책망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알렌은 그녀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은 뒤 눈인사를 하고 뒤돌았다.
“잠시만요!”
사샤가 그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그런 게 아니에요, 저, 저는.”
“….”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너무 부끄러워서…….”
사샤의 얼굴은 터질 것 같이 새빨갰다. 부끄러움으로 목소리까지 울먹거리며 뒷말을 잇지 못
했다.
그 모습에 알렌은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었다. 말없이 사샤의 한쪽 팔을 당겨 자신
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달이 갈고리 모양으로 이지러져 옅은 빛을 뿜어내는 어둑한 골목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
안 서로를 끌어안았다.
사샤의 집 앞에서 천천히 속도를 맞춰서 걷던 두 사람의 발자국이 멈췄다.
“여, 여기예요.”
사샤가 괜찮다고 했지만 알렌은 꼭 그녀를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집 앞에 서서 사샤는 신발
끝으로 땅을 툭툭 건드리며 아쉬운 듯 말을 꺼냈다.
“조심히 들어가셔요.”
“저.”
알렌은 한 손을 들어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로 사샤의 손을 잡았다.
알렌의 커다랗고 하얀 손의 온기가 느껴지자 사샤는 알렌에게 너무 빨리 뛰고 있는 자신의
맥박이 들킬까 당황했다.
“다름 아니라, 오늘 가게에서 말하려고 했는데.”
알렌은 조금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일부로 임무가 끝나서 돌아가야 합니다.”
“아, 그, 그런가요.”
아직 아무 말도 전하지 못했는데.
“조금 기다려줄 수 있을까요.”
알렌은 사샤의 손을 조금 더 꼭 잡으며 물었다. 그의 긴 속눈썹 아래로 달빛이 드리워져 있
었다.
“금방 돌아올 테니.”
“…네.”
당장 사랑한다는 말도, 미래를 약속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헤어지기엔 너무 아쉽고
, 무언가를 약속하기엔 서로를 알지 못했다.
그래도 알렌은 이 말만은 전하고 싶었다.
“당신이…, 보고 싶을 겁니다.”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을.
사샤의 볼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저, 저, 저도요.”
저 분 앞에서 이상해 보이겠지? 눈이 팽글팽글 도는 것 같이 어지러워. 사샤는 약간의 현기
증을 느끼며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알렌은 잽싸게 그녀의 허리를 붙잡으며 휘청거리는 사샤를 잡았다.
“괜찮아요?”
“아, 네네!”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달빛 아래 쿵쾅거리는 두 사람의 심장 소리만이 울렸다. 가을밤이 점점 익어가고 있었다.
알렌이 에른스트 공작가로 돌아갔을 때, 침상에 누운 그의 아버지는 평소처럼 기운 없는 환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예전처럼 힘이 있고 엄숙하면서도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에른스트의 공작으로서 말한다.”
“….”
“당장 그 신분과 맞지 않는 아이에 대한 생각은 저버리고 격에 맞는 귀족 영애를 만나거라
.”
“공작님.”
“그리고.”
공작은 쿨럭이며 마른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네 아비로서 말하겠다.”
병색이 완연해도 표정만큼은 예전의 에른스트 공작처럼 강인하고 부드러웠다.
“네가 누군가를 욕심내는 표정은 처음 보는구나.”
“……공작, 아버지.”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한다.”
“아버지….”
“알렌, 꼭 행복하거라.”
알렌이 두 손을 꽉 잡아도 레오폴드 공작은 반드시 전해야 하는 말을 해서 후련해진 사람처
럼 천천히 눈을 감고 숨소리를 내었다.
공작은 그날 새벽, 잠자는 것처럼 평온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 * *
알렌이 평소보다 어두워진 가게 문을 열자, 사샤는 손님이 전부 나가 텅 빈 가게를 정리하고
하고 있었다.
“오늘은 영업이 끝났….”
“잘 지냈어요?”
의자를 테이블 위에 올리며 청소를 하던 사샤는 알렌을 보고 깜짝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사샤의 얼굴은 금방 평소의 친절한 표정으로 바뀌었지만 목소리는 어두웠다.
“……미안해요, 너무 늦었죠.”
“괜찮아요. 그러실 수 있죠.”
사샤는 태연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여느 손님을 대하듯 말했지만 조금 쓸쓸해 보였다.
“영업이 끝났나요?”
아, 그게…,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의자를 내려놓으며 사샤는 조금 머뭇거렸다.
주방에 있던 요리사가 그 모습을 보고 사샤를 불렀다. 그는 사샤에게 뭔가를 말한 뒤 어깨를
두들기고는 뒷문으로 나갔다.
“가게는 닫았는데, 잠깐 계셨다가 가도 돼요.”
“아, 그러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음….”
사실 공작의 장례식 이후로 제대로 먹지 못했다. 업무도 너무 바빴고 식사를 제대로 챙길 마
음의 여유도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조차 부족한 나날이었다.
“사실 좀 배가 고픕니다.”
“그럼 잠깐만 앉아 계세요. 뭐라도 만들어 드릴게요.”
사샤는 불 꺼진 주방에 들어가 급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금방
뭔가가 끓고 볶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급하게 만든 거라 맛은 보장 못 하지만.”
사샤가 가져온 따뜻한 감자 수프는 그녀의 겸손한 말과 달리 아주 맛있었다. 공작가와 황성
에서 최고급 요리사의 손을 거친 음식을 많이 먹어 보았어도, 알렌에게는 그녀가 만들어준
그 소박한 수프가 훨씬 특별했다.
“아주 맛있어요.”
알렌의 진심이 담긴 칭찬에 사샤의 얼굴이 금방 환해지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뭔
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시면.”
사샤는 술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대 밑에 있는 서랍장에서 커다란 양주병을 꺼내왔다.
“같이 한잔하실래요?”
한두 잔 잔을 기울였을 뿐인데 조명 때문인지 사샤의 얼굴에는 금방 홍조가 돌았다. 사샤는
볼을 부풀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두 달이나 안 오실 줄 몰랐어요.”
“미안해요.”
“아뇨, 뭐…. 미안하실 건 없지만요.”
알렌이 집에 데려다주던 날, 들어오자마자 사샤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 파고들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던 낡고 커다란 인형을 품에 안고 얼굴을 묻은 채 그녀는 계속해서 저
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알렌 씨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아름답고 다정한 사람이 나를….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출근한 사샤는 씩씩하게 일했다. 한동안 오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얼마나 걸릴까? 일주일? 열흘?
- 빨리 보고 싶다.
사샤는 누구도 들을 수 없게 조용히 중얼거리며 테이블을 닦았지만, 발그레해진 양 볼까지
숨기지 못했다.
알렌은 기다려 달라고 했다. 사샤는 그 말만을 믿고 열심히 그를 기다렸다. 열흘, 스무날이
지났을 때, 그녀는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과 싸워야 했다.
아니야, 그가 오지 않을 리 없어. 약속했잖아.
한 달이 훌쩍 지나자 사샤는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
구나.
그렇게 두 달을 꼭 채운 날, 알렌이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많이 바쁘셨나요.”
“사실.”
한동안 흐르던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깬 것은 알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알렌의 덤덤한 말에 더 놀란 것은 사샤였다. 그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두 손을 내
저으며 변명하듯 사과했다.
“아, 미, 미안해요.”
설마 그가 오지 않은 이유가 그런 것일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괜찮아요. 이미 꽤 오래 편찮으셨기에,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돌아가시고
난 후 정리할 게 너무 많아서 이곳에 오지 못했어요.”
“그랬군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사샤가 용기를 내어 조심히 입술을 떼었다.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냐. 알렌이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다. 공작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아버지였는지.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 두 부자는 너무나 바빴고, 가깝지 못했다.
“본인의 일에 충실하신 분이었습니다. 살가운 부자 관계는 아니었지만, 인품이 훌륭하셨죠.”
“…어머니께서 많이 슬퍼하시겠어요.”
사샤는 아버지가 없었기에 아버지를 잃는 슬픔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슬퍼하는 모습이나, 혹시 어머니를 잃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
지게 아팠다. 마르가리타를 떠올리자 조금 울컥한 마음을 추스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 어떡해. 정말 죄송해요….”
이번에도 말실수였던 것 같다. 사샤는 덜덜 떠는 아랫입술을 가리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막
고 초조하게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당신의 잘못도 아닌걸요.”
“….”
시무룩하게 있는 그녀를 보며 알렌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사샤, 당신의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